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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93화 (257/300)

293화 안전장치(4)

틱, 틱.

금속제 지포 라이터 뚜껑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자, 어두운 조명 아래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불꽃.

내가 피워 올린 이 자그마한 불꽃은 왕룽 외교부장에게 거대한 횃불이 되어 다가간 모양이었다.

“……!”

확장된 동공과 그에 맞추어 벌어진 입. 이마를 흐르는 식은땀 줄기와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까지.

‘먹힌 건가…?’

서한만 유전을 통째로 불 싸질러버리겠다는 협박.

그것은 단지 바닷속 석유만이 활활 타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니, 먹힐 거다. 왜냐하면, 저 서한만 유전은 태자당 일파의 모든 욕망이 응축된 곳이나 다름없으니까.’

서한만 유전을 담보로 한, 북한 망명정부의 국채.

그리고, 그 노다지나 다름없어 보인 채권에 재산 대부분을 끌어다 투자한 태자당 일파.

달콤한 꿈을 꾸던 그들 모두가 시커멓게 검은 하늘 위의 연기가 되어버릴 운명일 테니까.

떨리는 팔을 간신히 추켜올려 내게 간신히 삿대질하는 왕룽 외교부장.

“어, 어, 어떻게 그 채권 건을…!”

잭폿(Jackpot)이다.

도박수가 먹혀들어 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그저.

“대통령님. 지금 바로 병력 투입 가능합니까?”

패가 말린 호구의 피를 바싹바싹 말리는 것뿐.

“예? 아, 예! 가, 가능합니다. 1시간 내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바지사장 대통령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내 장단에 곧바로 합을 맞추어 주는 최 대통령.

아예 유선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척하는 그에게, 내가 과장된 목소리로 거들듯이 말했다.

“잘됐네요. 아예 대규모로 폭발까지 하면 더 좋겠습니다. 한눈에 보이는 게 강렬하면 국민들도 이해해 줄 테니까요.”

“그, 그럼요! 회장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쾅!

호구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걸까?

원탁을 박차고 일어선 왕룽 외교부장이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도대체 무엇을 이해한다는 거요! 서한만 유전을 불태우고 또 뭘 하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호구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선택을 하는 그때는 바로.

“무제한 항쟁.”

“뭐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중국 측에서 걸겠다면 말이죠.”

모든 자제심을 잃고, 구석으로 몰렸을 지금과 같은 때다.

“그 서한만 유전… 잿더미가 되면 남조선 정부도 막대한 손해일 것 아닙니까!”

“글쎄요. 손해는 무슨 손해입니까. 캐서 팔아야 돈이지. 못 캐면 그냥 애물단지밖에 더 됩니까.”

뻔히 간파할 수도 있는 블러핑에도 맥없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아니, 손해이긴 하겠네요. 한국 정부 측이 아니라.”

나는 턱 끝을 까딱거리며 쐐기를 박아 넣었다.

상대가 어떤 패를 들고 있든 상관없이, 내가 풍기는 느낌만으로도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 쐐기를.

“당신네 중국 측.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탐욕에 눈이 돌아간 태자당 일파 전체가.”

“…….”

째깍, 째깍.

착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알리는 시곗바늘 소리.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레 이 적막을 깨기 시작한 성북동 상왕.

“굳이 시간을 길게 끌 필요가 있나 싶구먼. 이보게, 국방장관.”

“예, 어르신.”

“그냥 시작함세.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봐야지 믿으려나 보구먼.”

“알겠습니다. 바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짜둔 판에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국방부 장관.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채 끝나지도 않은 그 순간.

“이런 미친…! 잠깐,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아연실색한 얼굴로 양손을 휘젓는 왕룽 외교부장.

나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그에게 핀잔을 주듯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뭡니까. 다 끝난 일인 것을.”

낚싯바늘에 코가 꿰인 호구가 펄떡거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말로 합시다, 말로. 원하는 걸 주고받고자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매섭다던 대(大) 중화의 회초리 안 맞으려고 만든 자리입니다만.”

“거, 말장난은 그쯤 하시고! 원하는 바를 말해 보십시오. 진짜 원하는 바를!”

그리고, 호구의 코가 꿰인 그 낚싯바늘에는 그럴듯한 미끼가 걸려 있었다.

버둥거리며 바늘을 벗어나려 애써도, 결코 입을 벌릴 수 없을, 치명적일 만큼 달콤한 미끼가.

“이제 좀 말이 통하네요. 자, 그러면.”

스윽, 조심스레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원탁에 올려둔 나.

얼음장 위를 미끄러지듯이, 빼곡하게 글씨가 적힌 그 서류는 왕룽 외교부장 코앞에 멈추어 섰다.

“뭐, 저희 쪽 조건은 이렇습니다.”

* * * *

여전히 다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왕룽 외교부장의 입.

그러나, 그의 붕어 같은 입을 벌리게 만든 이유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반문하는 그의 모습.

“정말, 정말 이것으로 족합니까…?”

여러 차례, 서류를 보았다가 다시 내 얼굴을 보기를 반복하는 왕룽 외교부장.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건이 후하다 여긴 것일 테지.’

예상보다 후한 조건.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 측에 제시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반도 불개입에 대한 반대급부는 다음과 같았다.

① 청천강-함흥시 이북 지역의 북한 망명정부 지위 비공식적 인정.

② 해당 북한 망명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지 아니하는 한, 더 이상의 진군 중단.

왕룽 외교부장이 제시한 내용에서 굴욕적인 부분만을 뺀, 어찌 보면 중국 측에 유리하기까지 한 것처럼 보이는 제의.

동해안 항구 할양이야 애당초 큰 기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질러나 본 것이겠지.

“전반적으로 흠집 잡을 것은 없습니다만… 정말 문제가 없겠지요?”

“난 이제껏 서류로 장난을 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나는 서류로 장난을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장난처럼 보이는 작은 조항 하나에도, 아주 치밀하게 함정과 요새를 파 두어 상대가 걸려 넘어지기를 유도하곤 했으니까.

“설령, 서명 이후 다가올 결과가 내게 예상치 못한 결과를 안겨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으음….”

“피차 그 부분은 마찬가지가 아니십니까? 왕룽 외교부장님.”

얼굴에 감정을 지우는 것조차 잊을 만큼 만족했다는 것일까?

하늘 위로 솟아오르려 하는 양쪽 광대를 좀처럼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왕룽 외교부장.

뭐, 그렇다면… 나중에 저 못난 얼굴을 다시 봐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다음번, 그의 얼굴에 새겨질 감정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크흠, 물론 그렇긴 합니다. 한번 체결된 조약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되돌리기 어려운 법이니. 그런데….”

“또 뭐가 문젭니까.”

“아니, 아니. 여기 서한만 유전 부분 말입니다.”

서류에 적힌 세 번째 합의 조항.

그것은 바로.

“고작 지분 25% 정도로 만족하시겠다고요? 정말로?”

③ 서한만 유전에 대한 권리는, 북한 망명정부가 75%. 한국 측이 25%를 갖는다.

“피차 태워버리려 했던 것. 이만하면 족합니다.”

75%라는 숫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맹점.

①, ②, ③. 모든 조건은 하나의 명제를 대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 합의 조항은 결국, 북한 망명정부의 존속이 없다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다는 것임을.

그리고.

“물론, 하나 더 추가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 조약이 휴지 조각임을 알았음에도, 상대가 움직일 수 없게 만들 교묘한 함정 하나.

“여기 적힌 것 외에 특약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만.”

“특약을 말입니까…?”

“아닌 말로, 칼자루를 쥔 중국을 영 신뢰하긴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내 쪽으로 서류를 가지고 온 나는, 만년필을 들어 즉석에서 뒷장에 ④를 적어넣었다.

숫자 뒤에 북부전구 인민해방군을 주어로 하는 문장을 써 내려가며.

“하! 이거, 꼭 무슨 북부전구 군대라도 해산하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칼자루를 쥔 팔을 자르라고는 말씀 못 드리지요. 하지만.”

슥, 슥. 묵직한 잉크 냄새를 풍기며 완성돼 가는 문장.

“칼이 들어간 칼집만큼은 조금 꺼내기 뻑뻑한 물건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침표를 끝으로 마무리된 그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뻑뻑한 칼집으로는 이 사람이 적절치 않나 싶습니다만?”

④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부전구 사령관 인선은 양측이 합의한 해당 인물로 한다. 성명:(주더 장군).

“주더 장군이라. 가만, 가만… 이 자는 그러니까.”

주름진 이마에 손가락을 올리며 고심하는 왕룽 외교부장.

잠시 깊은 고민에 빠진 그의 입에서, 깊은 신음과 함께 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상하이방 출신…?”

* * * *

같은 시각, 싱가포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 꼭대기 층.

“가능하리라 보는가?”

길게 늘어뜨린 흰색 수염을 비비 꼬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는 상하이방의 최고 원로, 주 전(前) 총리.

“주더 장군. 엄연히 상하이방 파벌인 그가 북부전구 사령관직을 맡을 수 있을 거라 보냐 이 말일세.”

“불가능할 것은 또 무에 있겠나.”

그리고, 그런 불안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드렁한 눈치로 대답하는 장 대인.

별다른 걱정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그는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를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이미 수차례 가능케 만든 자이거늘.”

“흐음… 내 자꾸 심려스러워서 그런 게지.”

“쯧쯧쯧, 영감탱이 현명하다는 것도 다 옛말이로군. 마카오에서 직접 보았으면서 무에 그리 걱정인지.”

“크흠, 그야 그렇긴 하네만.”

화창한 햇빛이 내리쬐는 푸르른 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평안하기 그지없는 태평양을 바라보는 장 대인.

태평양은 늘 그랬다. 사랑하는 이의 품속처럼 잔잔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돌연 폭풍을 불러왔으니까.

“왕룽 그자는 한서준 회장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네.”

마치, 지금. 삽시간에 몰려온 먹구름처럼.

“너무 큰 욕심 때문에 눈이 멀어서 모르거든. 아니, 잊고 있거든.”

우르릉, 천둥소리를 신호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굵은 빗방울.

순식간에 태평양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그 폭우가 퍽 반가웠던 걸까?

드르륵, 창문을 열어 휘몰아치는 시원한 빗줄기를 손에 담는 장 대인.

“한때 칼을 겨누었던 자라도 같은 적 앞에서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때.

장 대인의 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문을 두들기는 바깥의 노크 소리.

“어르신. 준비되었습니다. 한서준 회장이 이르기를,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합니다.”

“아아, 그래. 그렇겠지.”

옷소매 끝부터 팔뚝 전체가 흥건하게 젖은 장 대인.

조용했던 태평양을 한순간에 바꾼 그 빗물을 손바닥에 꾹 부여잡은 그가, 주 전(前) 총리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음 지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않은가.”

태평양 위쪽, 동북아시아에서 쏟아져 내릴 폭우를 한껏 기대하는 얼굴로.

“아랫것들에게 이르게나. 조만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 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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