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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94화 (258/300)

294화 공중분해(1)

베이징, 중난하이.

자금성을 옆에 낀 이곳에서는, 오늘따라 유독 큰 웃음소리가 누각을 떠들썩하게 울리고 있었다.

“으하하하! 이 겁쟁이 같은 조선 놈들 같으니! 그 허장성세를 다 부려 놓고서, 종국에 내놓은 타협안이 이것이라고?”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탁자 위에 놓인 서류뭉치를 두들기는 핑 주석.

늦은 밤이었으나, 그의 눈은 대낮의 한창인 모습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늘, 왕룽 외교부장이 급히 마무리 짓고 온 비밀 조약의 회의록을 읽고 난 후부터.

“서한만 유전에 불을 싸지른다느니, 항쟁을 무제한으로 이어나겠다느니, 아주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었습니다. 주석 각하.”

그리고, 핑 주석과 같은 종류의 웃음을 얼굴에 띄운 왕룽 외교부장.

자만과 승리감, 도취감과 고양감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그가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물론, 위대한 대(大) 중화의 위용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내린 개 꼴이 되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오죽 두려웠으면 이런 조건들을 다 수용했을까 싶군.”

펄럭, 핑 주석의 손끝에서 넘어가는 종잇장.

거기에는 오늘 하루, 용산 벙커 가장 깊은 곳에서 종일 논의하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을, 4가지 조항이 적힌 기밀 문건이.

① 청천강-함흥시 이북 지역의 북한 망명정부 지위 비공식적 인정.

② 해당 북한 망명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지 아니하는 한, 더 이상의 진군 중단.

중국의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①, ②번 조항.

한자로 번역된 그 검은색 글씨가 대견하기라도 한 듯,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핑 주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질적으로 완충지대 이북에 알짱거리지 않겠다는 굴종이지. 북한이라는 국체를 또다시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실로 그러합니다, 주석 각하. 여기에 더해서.”

왕룽 외교부장의 대답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핑 주석의 눈길.

국가 안보에 이어, 앞으로 그들 집권 세력의 탄탄한 돈줄이 되어줄, 경제 부문에 관한 조항.

③ 서한만 유전에 대한 권리는, 북한 망명정부가 75%. 한국 측이 25%를 갖는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얼굴의 왕룽 외교부장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이 서한만 유전의 값어치도 똑바로 추산하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조건을 제시하지 못할 터.”

군침이 도는지 입맛을 다시는 핑 주석.

어차피 북한 망명정부를 손바닥 안에 꽉 잡는 이상, 결국 서한만 유전에서 나오는 이권은 자신들이 차지할 심산이었다.

바다에서 쏟아져 나올, 검은 황금을.

“500억 배럴. 그 막대한 채굴량의 75%라.”

①부터 ③까지의 조항을 다시금 곱씹는 핑 주석.

모든 것이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필시 영구 집권도 무리가 아닐 터다.

그렇게 신(新) 중국의 시황제가 되는 꿈을 머릿속에 그려가는 찰나.

“한서준 그 헛똑똑이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핑 주석의 귓가에 들려오는, 무언가 꺼림칙한 이름 석 자.

“남조선 정부의 실세 노릇을 하는 자가 그리 어리석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꺼림칙한 감정은 눈에 보이는 막대한 성과 탓에 가려지고 있었다.

그림자 안에 숨은 채,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린 채로.

“그렇지. 필시 한서준 그자가 북조선을 붕괴시킨 것은 그저 요행이었을 터다.”

“치기 어린 자의 얕디얕은 잔꾀가 우연찮게 먹혔다고 봐야 함이 옳은 듯합니다.”

그리고, 눈이 가려진 핑 주석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방심 한 조각.

벌써 시황제로 즉위라도 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인심 좋은 청년에게 선물 꾸러미를 쥐여준들 나쁘지 않겠군.”

그 여유가 시간이 지나가면 순식간에 제 몸을 시퍼렇게 물들일 맹독이 담긴 것임은 생각지도 못하고서.

“주더 장군이라.”

펄럭, 다시금 넘어가는 서류뭉치의 종잇장.

무의식적으로 핑 주석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④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부전구 사령관 인선은 양측이 합의한 해당 인물로 한다. 성명:(주더 장군).

긴장의 끈을 놓은 제 주인에게 불길함을 알리는 주름이.

“주석 각하, 이 인선을 받아들여 주실 생각이십니까?”

“본래라면 아니 될 일이지. 허나.”

숙청 대상 중 하나였던, 상하이방 출신의 주더 장군.

그런 자이니만큼, 핑 주석의 말에 따르지 않을 심산이 컸다. 행여나 있을 비상 상황에, 북부전구 병력을 몰아 북한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을 만큼.

그러나.

“번국(藩國)의 외신(外臣)이 이리 불안에 떨고 있으니, 이 정도 선물은 내려 줄 수밖에.”

“참으로 관대하십니다, 주석 각하.”

애당초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현 상황.

매섭게 짖던 개가 꼬리를 말고서 배를 까뒤집으면, 굳이 떡갈나무 몽둥이를 들 필요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아, 그리고 하나 더. 내 한서준 그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좋겠군.”

“주석 각하…?”

흙 묻은 간식을 하나 주면 모를까.

“이토록 평화를 바라는 이에게 어울리는 것이 있지 않던가.”

재미있는 것이라도 생각난 것인지, 음흉한 웃음을 짓는 핑 주석.

그는 이 말 잘 듣는 개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다.

“작년이었다지? 한서준, 그자가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것이.”

“예.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지요. 물론 후보에 그쳤습니다만.”

명예를 가장한 모욕을 통해서.

“그럼 이번에는 진짜 상을 타게 만들어 주어야겠군. 대(大) 중화의 발아래 엎드린, 굴종의 노벨 평화상을 말이야.”

말을 꺼냄과 동시에 만년필을 꺼낸 핑 주석.

슥, 슥. 순식간에 노벨 위원회에 보낼 추천서 한 장이 그 자리에서 쓰였다.

“참으로, 참으로, 뜻깊은 선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보구먼.”

물론, 그 명예를 가장한 모욕은.

“물론입니다. 한서준 놈은 앞으로 상장을 볼 때마다 곱씹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누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지를.”

어떤 식으로 다시 자신들을 향해 돌아오게 될 것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 * * *

핑 주석이 나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으흐흐흐, 이거 완전 바보들 아니여. 지들이 똘똘한 줄 착각하는 띨띨이들.”

“어처구니가 없네요, 이건.”

물론 저쪽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것인지는, 따로 해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뻔한 일이기는 하다.

명예를 가장한 모욕.

정말이지 끝까지 사람을 엿 먹이려 드는 모습이다.

뭐, 엿 먹여지는 쪽이 자신들이라고는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흐흐흐, 속인 건 우리 회장님이잖어. 진짜 부처님이 손바닥 안의 손오공을 보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다니까.”

제삼자가 보더라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퍽 우습긴 한 듯했다.

배꼽이 빠지도록 웃음 짓다가 이제 좀 진정이 된 듯한 김원철 아저씨.

“상 준다고 하면, 받을 거여? 흐흐흐.”

“노벨 평화상을 준다면 마다하지는 말아야죠. 나중에 판이 뒤집히면 그것도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되면 진짜 제대로 볼 만할 것이여.”

촤르륵.

이제 곧 방문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펼쳐 놓은 햇빛 가리개를 거두기 시작한 김원철 아저씨.

“자기 등 뒤를 칼로 찌를 사람에게, 제발 상을 주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쨍하고 나타난 햇살은 금세 방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바보입니다, 차라리 얼굴에 이렇게 써 놓고 돌아다니는 게 덜 창피하겄어.”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이내 문이 열리고 내 집무실 안으로 노인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 비서실장님 말이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장 대인?”

싱가포르에서 막 한국에 온, 장 대인이었다.

“이거야 원, 중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바보짓으로 장식되겠구먼.”

탁, 탁.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는 지팡이 소리.

“뭐, 노벨상을 받건, 핑 주석 그놈이 지구촌 동네 바보로 전락하건, 그건 알아서들 하게나. 지금 중요한 것은.”

무심한 듯, 탁자 위에 문건 하나를 올리며, 장 대인이 말했다.

“D-day가 사흘도 남지 않았다는 게지.”

D-day.

핑 주석이, 그리고 그의 지지 세력인 태자당 일파가 몰락하는 그날.

모든 게임이 끝날 바로 그날은 한 행사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 탁자 위에 펼쳐진, 서류 제목에 적힌 그 행사로부터.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비정기 인사 발령 및 이·취임식 계획]

“좋습니다. 핑 주석 쪽에서 미끼를 물었네요.”

핑 주석이 문 미끼.

혹시나 있을 상황에, 칼을 똑바로 빼 들 수 없게 만들, 뻑뻑한 칼집 역할을 할 그자는.

-신임 북부전구 사령관: 상장(上將) 주더.

주더 장군.

핑 주석이 쉬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하이방 출신의 인사였다.

“그나저나, 주더 장군에 대한 통제는 확실히 할 수 있겠지요? 상하이방이 말입니다.”

“이를 말인가. 걱정하지 말게.”

힘에 부친 모양인지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고는, 천천히 소파에 앉는 장 대인.

백색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가 웃음 지었다.

“상하이방 그치들도 이번 일에 목숨줄을 건 셈이니. 압록강 변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북부전구는 꿈쩍도 않을 걸세. 물론.”

한때 베이징의 노괴라 불린, 노련한 정치인답게.

“베이징에서 피바람이 불어도 말이야.”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제 뇌관을 터트릴 때가 되었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

책상 서랍에서 미리 준비된 여권을 집어 든 나는, 곧바로 코트를 몸에 걸치며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뿌틴 대통령과 보드카나 병째로 마시러 가야겠네요.”

본래 러시아까지 갈 필요는 없이, 서류상으로만 진행해도 될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러기보다 남자 대 남자로 술을 대작하며 일을 진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도 있기 마련.

다가올 술자리. 그에 걸맞은 안주를 기대하며, 나는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핑 주석이 그토록 믿고 있는, 칸(Хан) 은행이 허공에서 폭파되는 것을 안주 삼아서 말입니다.”

이 길고 긴 이야기의 최종 장을 향해 다가가며.

* * * *

모스크바, 크렘린궁.

“칸(Хан) 회장은?”

“곧 도착한다 합니다, 각하.”

칸(Хан) 회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동반사에 가깝게 웃음 짓는 뿌틴 대통령.

평소 차가운 무표정만 유지하던 그의 색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보좌관이 물음을 던졌다.

“각하. 유독 칸(Хан) 회장, 그자 이야기만 나오면 즐거워 보이십니다만…?”

“아아, 이거 잔뜩 기대가 되어서 말이지.”

장식장에서 독한 술 한 병을 꺼내는 뿌틴 대통령.

유리잔 속, 찰랑거리는 보드카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좋은 술과 재미있는 술친구. 거기에 곁들일 훌륭한 안줏거리까지.”

미리 준비해 둔, 핑 주석이라는 환상적인 안줏거리를 상 위에 펼쳐 놓는 것만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어서 빨리 불을 댕기고 싶어 미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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