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공중분해(2)
간만에 만난 뿌틴 대통령.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뒤뜰로 나를 끌고 갔다.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닥불. 야외에 놓인 나무 벤치와 탁자까지.
이미 오기 전부터 미리 한잔 걸치고 있었던 것일까?
유리잔에 반 정도 찬 보드카를 졸졸졸 따르며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칸(Хан) 회장 자네가 노벨 평화상 유력 후보자라. 이거 어처구니가 없군.”
“뭐, 이미 작년에도 후보자 딱지는 받긴 했습니다만.”
“작년이야 종교쟁이들 화해 건으로 그런 것이고. 이번에는 다르지. 전 세계를 쏘다니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끌끌끌, 취기가 도는지 아저씨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새로운 술을 꺼내 드는 뿌틴 대통령.
또 보드카를 꺼내는 게 아닌가 했건만, 웬일인지 이번에 선보이는 술은 포도주였다.
피처럼 진한, 붉은색의 적포도주.
“아마 그 과정에서 흘린 피만 드럼통 열 개는 너끈히 채울 것인데 말이야. 일단 김정은이는 죽었고.”
“무슨 표현이 꼭 살인마 같지 않습니까.”
“칸(Хан) 회장 자네가 피바람을 부르는 건 맞지 않은가.”
뽕! 경쾌한 코르크 마개 열리는 소리. 앞으로 흐를 피를 암시하기라도 한 듯, 잔을 가득 채우다 못해 가장자리 끝으로 흘러넘치는 적포도주.
야외 탁자를 뒤덮은 흰 식탁보가 붉게 물들고서야, 병을 든 뿌틴 대통령의 손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번 불꽃놀이는 베이징에서 열릴 것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럴 리가. 불쌍한 운명을 맞이할 핑 주석을 위해, 그저 주님께 기도드릴 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던 걸까?
한층 더 험악한 표정으로 하던 말을 이어나가는 뿌틴 대통령.
“아, 물론 구원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건 아니네. 더 화끈한 지옥불에서 타 죽으라 기도드리는 게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무언가 아는 것이 있을 터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 무지막지하게 차가운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수작질을 익히 들었다던가 하는 식의.
“동해안에 항구 할양까지 요구했다지? 그것도 두 개 이상을 99년이나.”
그리고, 그 예시는 적절했다.
부동항.
뿌틴이 찜해둔 항구에,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주요 항구 전부를 다 할양하라던 왕룽 외교부장의 요구.
‘셋째, 동해 항구 가운데 한 개, 아니, 두 개 이상을 99년간 할양할 것.’
와그작, 파열음과 함께 금이 가기 시작한, 뿌틴 대통령이 쥔 유리잔.
아무래도 역린 비슷한 것이 건드려진 모양이었다.
“라선, 청진, 그리고 원산까지 세 개를 차지하고 싶어 뱃가죽을 까뒤집고 안달 난 핑 주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
신(新)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서 용납할 수 없는 역린이.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될 것을 넘보는 그 모습이 말이야.”
타닥타닥, 마지막 꺼지기 직전 갑작스레 화하고 타오르는 모닥불.
일렁이는 불꽃 주변으로 회색빛 재가 가볍게 흩날리던 그때.
“각하.”
“아, 그래. 시간이 되었나 보군.”
갑자기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야외에 설치된 대형 TV 한 대.
도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내가 뿌틴 대통령에게 무어라 물음을 던지려는데, 그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이번 건 말이지. 각본, 연출, 주인공까지 자네 홀로 다 했지 않은가.”
이번 연극의 마지막 장.
그 화려한 피날레를 알리는 커튼을 몸소 걷으면서.
“그렇다면 적어도 무대 막을 올리는 것 하나는 내가 하고 싶더군.”
틱, 곧바로 불이 들어온 TV 화면.
빨간색 천 배경 위에 황금색 낫과 망치가 수놓아진 로고.
핑 주석의 얼굴이 정면에 보이는 이 영상은, 실시간으로 중국 국가기관 내부에서만 송출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비정기 인사 이·취임식]
“아니, 이건 또 어떻게 볼 수 있는 겁니까. 중국 쪽 내부망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일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는 내게 대답하는 뿌틴.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화면 안에는,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핑 주석 앞에 서 있었다.
가슴팍에 달린 붉은색 명찰에는 [주더]라는 이름이 수놓인 채로.
“저기 저 대머리 장군이 북부전구 사령관 깃발을 건네받아 흔드는 순간, 핑 주석의 입지도 흔들리게 될 테니까.”
치익, 또다시 개봉된 세 번째 술.
이번에 내어진 술은, 독하디독한 보드카도, 피처럼 붉은 포도주도 아닌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좋은 안줏거리로군. 역시 칸(Хан) 회장이 가지고 온 것답게.”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축하를 위해 등장하는 황금빛 술.
샴페인이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액체가 잔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핑 주석으로부터 검은색 북부전구 깃발을 건네받아 허공 위로 흔드는 주더 장군.
이 시각 부로… 그토록 원하던 안전장치는 철컥 소리를 내고 허리춤을 단단히 휘감았다.
그 어떤 거친 행보를 보이더라도, 유리창 앞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몸을 메어주도록.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뭇한 얼굴로 새로운 사령관들에게 소리치는 화면 속 핑 주석의 모습.
-위대한 중화 제국의 부흥을 위해, 신임 사령관들께서는 각자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길 당부하는 바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신(新) 중국의 도약 만세!
지축을 흔들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만세 소리.
그러나.
-핑 주석 만세! 만세! 만세!
광란의 열기가 넘쳐흐르는 화면 속, 인이어를 낀 채 표정이 굳어져 가는 핑 주석.
아까 전,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뿌틴 대통령의 목소리가 핫라인을 거쳐 귓가에 전해졌으니까.
“만세는 만족할 만큼 실컷 부르셨는가, 핑 주석?”
* * * *
-뿌틴 대통령? 당신이 어째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누가 이 말 좀 꼭 전해달라 해서 말이야.”
실시간으로 연결된 통화.
뿌틴 대통령은 나를 바라보며 눈 한쪽을 깜박이고는, 곧바로 핑 주석에게 직구를 날려댔다.
“핑 주석, 당신이 눈물 나게 모은 돈. 이제 시원하게 잘 받아 갑니다. 라고 전하라는구먼.”
-뭐, 뭐라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요!
“당사자를 바꿔 줌세. 그럼, 즐거운 대화 나누어 보라고.”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건지, 시원하게 일침을 끝마치고는 내게 전화기를 넘기는 뿌틴 대통령.
화면 속 핑 주석의 낯빛은 이제 하얗게 질리다 못해,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처럼 검게 물들고 있었다.
곧 다가올 미래를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간만입니다. 핑 주석님.”
-네놈은 또 누구냐! 칸(Хан) 은행의 돈을 받아 가겠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간만에 듣는, 핑 주석의 목소리.
조금 아쉽다. 이 정도까지 왔거늘, 아직도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니.
그렇다면, 이 눈뜬장님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나갈 수밖에.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핑 주석, 당신을 궁지로 몰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는데.”
-설마, 설마… 한서준?
“이번에 작성한 기밀 조약 서류는 보셨을 테지요? 그 일방적으로 핑 주석님이 이익을 보는 듯한 내용이 적힌.”
화면 속, 입을 굳게 다물고는 눈알을 빙그르르 돌리는 핑 주석의 모습.
분명, 왕룽 외교부장과 합의하여 작성한 조약 내용에는, 핑 주석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을 얻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데… 거기에 제가 말하지 않은 맹점 하나가 있습니다.”
맹점.
핑 주석이, 왕룽 외교부장이, 그리고 태자당 일파 모두가 보지 못한, 이번 조약의 가장 큰 맹점.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와서일까?
화면 속에 자신의 소리치는 모습이 나오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언성을 드높이는 핑 주석.
-무슨 개소리인가! 칸(Хан) 은행 자금을 횡령하겠다는 것도 찢어 죽이고 싶은 참인데!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요. 둘이 연결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꽃처럼 성을 내던 그의 모습은, 뒤이은 내 말을 듣고 난 후, 곧바로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져 버렸다.
“북한 망명정부의 소멸.”
-……!
그간 보지 못했던, 보려 하지 않았던 맹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았기에.
-설마, 설마… 이 모든 것이 전부 한서준 네놈이 짠 판이라고?
물론,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지만.
“잘 받아가겠습니다. 핑 주석님이 주신 예산에 더해, 태자당 일파분들이 십시일반 모아 주신 쌈짓돈까지, 전부.”
* * * *
같은 시각.
베이징, 중난하이.
연단에 오른 채 씩씩거리며 성을 내는 핑 주석.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비정기 인사 이·취임식]이라는 현수막 아래. 그는 이제는 통화가 종료된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며 연신 목청을 드높였다.
“지금 이게 무슨 개 같은 짓인가! 한서준! 뿌틴! 이 찢어 죽일 오랑캐 놈들!”
“주, 주석 각하?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중국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이 공식 행사에서 이상행동을 하는 제 주인의 모습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핑 주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리를 옮길 것을 권유하는 왕룽 외교부장.
그러나.
“끄악…!”
격노한 모습으로 그의 한쪽 뺨을 후려갈기는 핑 주석.
“왕룽! 너 이 머저리 같은 놈은 도대체 뭐 하는 작자인가!”
“주, 주석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하기도 싫다! 직접 확인하도록!”
곧바로, 통화 내용 녹음본을 가지고 왕룽 외교부장에게 다가오는 보좌진들.
해당 내용 전부를 듣던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날 용산 벙커에서 있었던 일.
“이런…! 남조선에 대응하는 조약의 주체가 중국이 아니라, 북조선 망명정부였음이… 놈이 파둔 함정이란 말인가!”
“이 쓸모없고 아둔한 놈! 그 큰돈을 이제 어찌 찾아야 하느냐 이 말이다!”
뿌연 안개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씩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짜 맞추어졌다.
전례 없던 파멸의 그림을 그려가며.
“주석 각하! 지금 그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
그리고, 그 파멸은 단순히 칸(Хан) 은행의 자금이 허공에서 사라졌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서한만 유전을 포함한, 북한 망명정부 앞으로 달아 두었던 조약 내용까지.
지금 이 순간, 마지막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모든 것은 공중분해 될 것이었다.
김한소라는 방아쇠가.
“김한소! 지금 김한소의 신변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급보! 급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들은 너무 늦게 파악한 뒤였다.
이미 마지막 방아쇠는 진즉에 당겨진 지 오래였으니까.
“지금 김한소가… 남조선으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핑 주석의 관자놀이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