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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96화 (260/300)

296화 공중분해(3)

그날, 핑 주석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공중분해 되던 저녁.

국가정보원 요원과 함께, 제3국을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한소.

“이제 곧 도착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시지요, 김한소 전(前) 위원장님.”

국정원 요원이 건넨 말에, 김한소는 피식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마음의 준비는 저보다 그쪽이 해야 하지 않갔시요?”

“네…?”

검은색 인민복, 짧게 자른 우스꽝스러운 머리칼, 알 없는 안경까지.

제 할아버지 김일성을 그대로 본뜬, 억지로 만들어진 외양은 아직 채 고치지 못한 김한소.

그러나, 그의 가슴팍은 시원하게 비어 있었다. 백두혈통 최고 지도자 얼굴이 그려진, 붉은색 배지는 진즉에 떼어버렸으니까.

“호칭부터가 아직도 위원장이 뭡네까. 아무리 전(前)자가 붙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네다.”

“아아, 그랬지요. 이게 참, 습관이 되어서요.”

“존재해서는 안 될 나라였고, 없어져야 할 나라였습네다. 그냥 김한소 씨, 이렇게 불러 주시라요.”

존재해서는 안 될 나라. 없어져야 할 나라.

야심한 밤 시각, 비행기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구(舊) 북한 지역은 여전히 암흑 속에 잠들어 있었다.

앞으로 맞이할 빛의 세상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김한소 씨. 일단 내리시면 곧바로 국회의사당으로 이동하실 겁니다.”

북한 망명정부의 수반이었던 김한소이니만큼, 그리고, 이번 일이 워낙 중요한 만큼, 국회의원들 또한 협조적인 자세로 나섰다.

현재 시각 23시 50분.

이 늦은 시간에도 300명의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본회의장에 앉아 있었으니까.

조금씩 내려가는 비행기 고도. 국정원 요원이 김한소에게 물었다.

“가시게 되면, 일종의 투항 연설을 하시게 될 겁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물론입네다.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립네다.”

위이잉, 거친 엔진음과 함께 땅에 가까워져 가는 비행기.

깜빡이는 방향 유도등을 따라 동체가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김한소가 대답했다.

“이 거대하게 짜인 판의 끝을 장식하는 것 아니갔습네까. 물론, 이 판을 설계한 사람만은 못 하지만.”

“아아, 그 사람은… 좀 규격 외라고 봐야 하니까요.”

쿵, 약간은 거칠게, 그러나 안전하게 군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은 비행기.

미끄러지듯 한동안 활주로를 따라 택싱(Taxing)하던 비행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 인파가 준비된 곳에 멈추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국회의원 나으리들보다 저는 그 사람이 더 보고 싶습네다.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남자.”

그 환영 인파 맨 앞자리에는, 손에 든 천사 가면을 흔들며 김한소를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도 러시아에서 이제 막 도착했을, 이번 판을 설계한 그 남자는 바로.

“한서준 회장. 이번엔 천사 가면을 벗은 그의 진짜 얼굴을 말입네다.”

드리워진 이동식 계단 바로 앞, 천천히 열리는 비행기 문.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김한소. 그는 벅찬 마음으로 제 앞에 선 남자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카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그대로의 인사를.

“백두혈통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되돌아온 김한소 씨.”

* * * *

솔직히 강행군이기는 했다.

러시아에서 뿌틴 대통령과 마셨던 술이 채 깨지도 못했는데, 곧바로 김한소를 데리고 여기까지 와야 했으니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국회 본회의장 내빈석. 옆자리에는 늘 그렇듯 성북동 상왕이 함께 자리해 있었다.

“시작하는군.”

늦은 시간을 감안해서인지, 의전은 간략하게 하고 곧바로 시작되는 김한소의 연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 김한소입네다.

내가 써준 대본을 줄줄 읽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김한소는 그래도 나름 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었다.

옆자리의 성북동 상왕 또한 같은 생각인지, 연설을 듣다 말고 내게 이렇게 귓속말을 건네었다.

“한 회장, 자네는 참 신기한 사람이야. 마카오에서 뭘 어떻게 구워삶아 놓았길래, 김한소 저 친구가 이리 순순히 따르는 건지.”

“구워삶았다기보다 확실하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랬지.

그때 마카오 카지노에서 보여주었었지.

-백두혈통이 다스리는 북조선이라는 유사 전제 왕정 국가를 저더러 다시 이으라니, 이 어찌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네까! 아니 그러합네까!

독재자의 운명을 거부하고 싶던 김한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김한소 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역할. 트로이의 목마가 된다면, 그 백두혈통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말이죠.”

“나는 권력이 없으면 살아 있을 의미가 없으니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니네만.”

권력을 사랑해 마지않는 성북동 상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그런 사소한 가치관의 차이 따위야 상관없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 한마디를 내뱉는 그의 모습.

“뭐, 한 회장, 자네 설계대로 되어가는 모습은 참 보기 흡족하구먼.”

-북조선 망명정부, 이는 허투루 세워진 가짜 국가입네다! 존재하여서도 아니 되고, 존재할 수도 없는 국가!

“바로 지금 김한소가 목청껏 부르짖는 연설처럼 말이지.”

탁자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김한소.

팔락, 그의 앞에 놓인 첫 번째 종잇장이 넘어갔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미리 연설 대본을 건네받았기에 다시금 집중하는 모습.

-가짜 국가와 맺은 모든 조약이 있다면, 그 또한 마땅히 무효일 것입네다!

김한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쓴 대본의 내용.

핑 주석과 태자당 일당에게 ‘당신들은 이제 다 끝이다.’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 국회 본회의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가짜 국가가 보증하고 발행한 증서 또한 전부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습네다! 그것도 부당하게 발행한 채권이라면 더더욱!

짜인 각본에 맞게,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는 300명의 국회의원.

짝짝짝, 그 우렁찬 갈채 소리 속에서, 나는 피식 웃음 지으며 성북동 상왕에게 귓속말을 건네었다.

“지금 베이징에서 이걸 보고 있을 핑 주석은 아마 정신이 어질어질할 겁니다.”

마침내 대동강 물을 시원하게 팔아먹었다는 귓속말을.

“지난번 벙커에서 맺은 비밀 조약도, 서한만 유전을 기반으로 한 채권도 전부 공중분해 되었으니까 말이죠.”

“어질어질하다 못해 울상을 짓고 있겠지. 핑 주석, 그 양반.”

-가짜 망명정부의 가짜 국가원수였던, 이 김한소가 말합네다! 이제 모든 가짜 놀음은 전부 끝나 없어졌음을!

“와아아아아아! 대한민국 만세! 통일 한국 만세!”

눈부신 카메라 플래시 속, 포효하는 김한소와 그에 환호하는 연출을 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

이 거대한 연극의 연출이 퍽 마음에 든다. 여기 옆에 관객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그 관객으로 가장 적절한 사람을 꼽자면.

“그러게요. 그 신호등처럼 울그락불그락 변해가는 핑 주석 특유의 표정을 다시 못 보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국회 본회의장.

깜빡거리는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곧 3월로 접어 들어가는 시기. 새로운 봄날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과연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어떤 피바람이 불어닥칠지를.

* * * *

“내가, 신(新) 중화 제국의 시황제가 될 내가! 저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에게 당했다는 건가!”

피바람의 발원지는 베이징에서 시작되었다.

원화 1,000조 원의 자금,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북한 망명정부.

공중에서 시원하게 분해된 두 대들보는, 조각조각 난 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핑 주석의 머리 위를 향해서.

“왕룽!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 무슨 참담한 일인가 이 말이다!”

“…송구합니다, 주석 각하.”

“죄송하다는 말만 나불대지 말고! 무슨 대책이라도 내놓으란 말이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쨍그랑! 왕룽 외교부장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벼루 하나.

검은색 먹물이 흥건한 그 벼루는 곧바로 벽에 닿아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후우, 후우… 김한소가 남조선에 망명을 갔다! 그것도 자신이 국가원수로 있던 국체(國體)를 전부 부정하는 발언을 했고!”

조만간 맞이할 그들의 운명처럼.

“왕룽 네놈이 그 용산 벙커에서 맺은 조약도! 북조선 망명정부 채권도! 전부 한낱 쓰레기만도 못한 종잇조각이 되어 버렸단 말이다!”

그리고.

“그, 주석 각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북부전구 군대를 움직이심이….”

“그 무슨 개 같은 헛소리야!”

마찬가지로 산산조각 난, 제 손으로 해제한 안전장치.

“상하이방의 주더 장군이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거늘, 북부전구 군대가 어떻게 움직이겠나!”

한반도에 개입할 운명이던 북부전구 군대.

그러나, 이미 상하이방의 주더 장군으로 사령관이 바뀐 상황에서, 그들 군대가 움직일 리는 요원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주, 주석 각하! 큰일입니다!”

“자네는 또 무슨 일인가!”

바깥에서 급보가 거침없이 날아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상하이방 놈들이… 다음 주에 열릴 양회(兩會)에 참석하겠다며, 베이징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놈들이…!”

중국공산당의 권력 구조를 결정하는, 매년 3월에 개최되는 양회(兩會).

본래 이번 양회에서는 상하이방에 대한 모든 숙청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던 핑 주석.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오히려 숙청의 칼날이 향할 곳은 핑 주석 자신이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거대한 실책이 성적표에 그대로 찍혀 나오게 될 터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시의적절하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소식은 들었겠지?

“장 대인…?”

핑 주석에게 직통 전화를 건 장 대인.

혀를 끌끌 차며, 전화기 너머의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과욕이었네. 그리고 자네가 가진 욕망의 크기에 비해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특히나.

이 거대한 판을 뒤집은, 괴물 같은 남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한서준이라는 괴물 놈을 상대하려면 더더욱 부족하고말고.

“장 대인! 지금 나를 조롱하려고 이러는 겝니까!”

-쯧쯧쯧, 시체에 오줌을 싸는 짓은 하지 않는 법일세. 나는 그저 자네에게 제안할 뿐이야.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툭 던지는 한마디 제안.

-다음 주에 열릴 양회(兩會), 그곳에서 자네와 태자당 일파가 피 흘리지 않고 안전하게 물러날 안을 말이지.

구석에 몰린 이에게 있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는 장 대인.

체스판 위, 마지막 남은 킹을 손가락으로 툭 쓰러트린 그는, 데구루루 바닥에 떨어진 체스 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이래나저래나 결국 웃는 쪽은 한서준 고놈이겠지만.

이번 연극의 끝은 체크메이트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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