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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97화 (261/300)

297화 노벨 평화상(1)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흘러갔다.

뱃속의 태아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인 아홉 달.

김한소의 망명으로 마무리 지어진 3월의 종장(終章). 그로부터 시작된, 아홉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고 있었다.

그 변화의 첫 화살이 쏘아진 곳은 베이징이었다.

“지금부터 제19차 중국공산당 양회(兩會)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존경하는 핑 주석 각하의 모두발언이 있겠습니다.”

침통한 모습으로 연단 앞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나가는 핑 주석.

그는 지쳐 있었다. 모든 싸움에서 온전히 패배해 더는 일어설 힘도 없이 탈진한 모습.

툭, 툭.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마이크를 두드린 핑 주석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내각 관료들, 인민해방군 장병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들까지.”

마이크를 만진 손가락과는 달리, 아주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로.

“저는… 일신상의 이유로 인해, 더 이상 주석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허리 숙여 사퇴의 의사를 표하는 핑 주석.

그 순간, 장내에 있는 모든 카메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이 뿜었다.

특히나, 해외에서 온 외신 기자들의 고함까지 곁들인 채로.

“Holy Shit!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핑 주석의 건강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시 말하잖나.”

활화산처럼 들끓던 장내가 조금 진정되고, 간신히 되찾은 정숙.

실금이 인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이 긴장된 장내의 분위기.

짧은 한숨 소리. 그늘진 얼굴. 해탈한 모습의 핑 주석은 하던 연설을 마저 이어나갔다.

“불민한 제 처사로 인해, 많은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점,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연설을.

“이에, 저는 다음의 내용을 공표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금 이 시각부로 저는 주석직을 공식적으로 내려놓겠습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소란스러움이 몰려오는 장내.

“What! 정말인가!”

“이런! 미쳤군! 이거 초대형 특종이 따로 없어!”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

본회의장 위쪽, 유리창 너머로 이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두 노인.

장 대인과 주 전(前) 총리였다.

* * * *

“핑 주석, 저 친구가 순순히 내려오다니. 이거야 원,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구먼.”

이 광경을 한 장면이라도 더 눈에 담고자, 지팡이를 짚은 채로 몸을 지탱하는 주 전(前) 총리.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정말이지 꿈만 같구먼. 한서준, 그 젊은 치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했네.”

“지지기반인 태자당도 힘이 빠진 게지. 원화로 500조 원에 달하는 채권 투자 금액이 죄 휴지 조각이 되었잖은가.”

북한 망명정부 앞에 달아놓은, 서한만 유전을 담보로 한 국채.

그 국채를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북한 망명정부는 이제는 사라져 없어졌다. 물론, 그 담보인 서한만 유전은 남한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 북부전구 병력은 꿈쩍도 못 할 것이고.”

마지막 조커(Joker) 카드였던 북부전구 병력.

핑 주석의 손에서 고삐를 놓아버린 순간, 그 조커 카드는 더는 쓸 수 없는 종잇조각이 되어 버렸다.

마치 핑 주석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처럼.

“양회(兩會)에서 축출되는 모양새가 되느니, 차라리 이리 자진하여 사퇴하는 편이 나을 걸세.”

“암! 평생 감옥에 유폐되는 것보다는 훨 낫지.”

-후우….

한숨을 내쉬는 것이 다 들릴 만큼, 수심이 짙은 모습을 한 핑 주석.

입술을 연신 씰룩거리며, 그가 연설문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계속하려나 보는구먼.”

“뭐, 사실 어쩌면 이번에 말할 건이 더 중하다 볼 수도 있을 걸세.”

주석직 사퇴보다 더 중한 것.

단지, 중국 내부의 국내정치만이 아닌, 그 이상의 국제 외교에 관한 그것은 바로.

-둘째, 북조선 망명정부를 포함한,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에 대한 불개입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한반도 전장의 불개입.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핑 주석.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도 그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그저 해야 할 말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서한만 인근의 유전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분쟁 또한 국제사법에 의거하여 해결토록 하겠습니다.

힘 빠진 발걸음으로 연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는 핑 주석.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장 대인.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합의된 대로 행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모든 것이 순리대로 정리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린 밑그림에 색을 칠하는 것처럼.

“한서준이 뜻대로 되었구먼.”

“그러게 말일세.”

거대한 황금색 벽 앞에 놓인 큼지막한 붉은 깃발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놓인, 중국공산당의 웅장한 상징물.

평소 압도적인 위압감을 드러내던 그 상징물은 오늘따라 유독 빛이 바래 보였다.

고작 한 사람의 계책이 낳은 결과에 의해서.

“정말이지… 대단한 친구야. 세상 돌아가는 틀을 다시 짠 셈이나 다름없을 정도이니.”

* * * *

급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

특히나, 천지가 개벽할 만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단연 북한 지역이었다.

서산 너머로 머리를 수그리는 햇살. 군것질거리를 손에 쥔 채, 한 통통한 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척척척척척 발걸음. 우리 김 대장 발걸음. 2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아홉 살의 어린 꼬마 아이.

작년까지만 해도 그토록 학교에서 외우라 했던 김정은 찬가였다.

이미 선율이 입에 달라붙어서인지, 아이는 집 대문 앞에 도착하고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 온 나라 인민이 앞으로 척척척.”

“예끼, 이 간나 새끼! 그런 노래는 와 부르고 댕겨 싸니!”

그리고, 바뀐 세상에 걸맞게 아연실색하며 손바닥으로 꼬마의 엉덩이를 때리는 아이 어머니.

“아야! 어메가 그랬잖슴메! 이 노래 안 외우면 다리몽뎅이에 회초리로 시뻘건 줄을 새겨 버리갔다고!”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이, 아즉꺼정…!”

훈육의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근처 길가를 걷던 군인 하나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는, 그 집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으니까.

“고저, 군관 나으리. 그거이 아이고예….”

잔뜩 긴장한 모습의 아이 어머니.

행여나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녀는 아이를 안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특유의 서울 말씨로 아이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군인.

건빵 주머니에 든 군것질거리를 꼬마에게 나누어 주며, 그가 전달 사항을 말했다.

“이따가 저녁 6시에 종이 울리면 가족분들과 함께 마을 회관으로 와 주십시오.”

“회관은 어째서 가라 하는 겁네까…?”

“긴급 식량 배급이 있습니다. 인원수에 맞게 지급되니, 온 가족이 다 가셔야 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저벅저벅, 멀어져 가는 군홧발 소리에 멍하니 그 뒷모습만을 바라보는 두 모자(母子).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히야… 내래, 군관이 저래 친절한 건 처음 본다야.”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선 아이 어머니에게 다가간 동네 아낙.

광주리를 머리에 진 채, 그녀가 말을 건네었다.

“고거이, 참말로 모든 게 변하긴 변했지비. 아, 거 아랫동네는 천지가 개벽했다지 않음메?”

“천지가 개벽했다니, 그거이 또 무슨 소립네까?”

방금 겪은 상황도 당혹스럽건만, 자꾸만 바뀌어 가는 세상.

“응? 함흥댁은 그것도 모르나?”

“내래 뭐이 아는 거이 없어 그렇습네다. 뭔데 그럽네까?”

그 변화 가운데 가장 거대한 무언가가, 지금 이 순간 바닷속 한가운데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석유가 난다던데? 청천강 앞바다에 말이지비.”

검은 황금을 내뿜을 준비를 마친 채로.

* * * *

올겨울은 다행히 그리 춥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서운 바닷바람 대신, 포근하기까지 한 기온이 나를 반겨주는 청천강 앞바다.

핑 주석 실각 이후, 아홉 달의 지난 시간은 벌여 놓은 일을 정리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나,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관리한 부분은, 바로 지금 이곳 서한만 유전 개발이었고.

“히야… 여기서 석유가 나올 것이다 이거지? 진짜 감개무량 그 자체여.”

감탄의 목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아저씨도 어지간히 기분이 좋긴 한 모양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회상하듯 조금은 아련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내뱉을 정도였으니.

“흐흐흐, 이거 얻으려고 우리 회장님이 아주 그냥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렇게 돌아댕겼는디.”

“그러게 말이죠. 올 한 해 동안 워낙에 다사다난했으니까요.”

참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김정은을 돼지 바비큐로 만든 것부터, 2차 한국전쟁을 거쳐, 중국의 주석 자리를 갈아버린 일까지.

정말이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순 동화 속 이야기 아니냐며 딴죽을 걸 만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다 정리가 끝나고 최종 결과를 보게 되니 기분이 좋긴 하네요.”

물론, 정말 동화 속 이야기처럼 해피 엔딩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겠지만.

“으히, 석유가 수도꼭지 튼 것마냥 콸콸콸 쏟아져야 하는디 말이여… 어어, 시작한다.”

쿠궁, 거대한 해상 플랜트 안,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추 장비.

-지지직…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이번 첫 시추의 현장 총괄은 성원식 부회장이 직접 나섰다.

뜻깊은 자리이니만큼, 현장에 있었을 때를 다시 몸에 새기고 싶다나.

“그럼, 전 잠시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다들 슬슬 모이고 있네요.”

“어여 갔다 와. 여기 통제실은 나랑 성원식 부회장 둘이 있으면 되니까.”

텅, 텅.

안전화를 신은 발로 철제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나오는, 드넓은 상부 갑판.

“어어, 한 회장.”

“오셨습니까.”

늘 그렇듯, 능글맞은 미소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성북동 상왕.

이 아저씨도 참 대단하다. 자기 정치력이 커질 만한 곳은 이렇게 빠지지 않고 찾아오다니 말이지.

“오늘의 주인공이 한마디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성원식 부회장에게 무전을 쳐 준비가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나.

그래, 이 기념비적인 날에 숫자 정도는 내가 세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가 이곳, 서한만 유전의 주인이니까요.”

여기 서한만 유전에 대한 모든 권리를 내가 가지게 되었으니까.

지지직,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성원식 부회장의 목소리.

준비가 끝났으니 카운트다운을 외쳐도 좋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부터 서한만 유전 첫 시추를 시작하겠습니다.”

벅차오르는 감정.

마치 유전을 찌르는 시추 장비처럼, 이 카운트다운을 모두 외치면 아마 이 감정이 터져 나오겠지.

“바닷속에서 쏟아져 나올 검은 황금. 그 힘찬 분출을 위해 모두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외쳐 주시길 바랍니다.”

검은 황금, 갓 뽑아 올린 석유처럼.

오늘따라 평화로운 서한만 일대. 파도 한 점 없는 바다 위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5! 4! 3! 2! 1!”

드디어, 그간의 결실을 수확할 때가 왔노라고.

“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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