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해리 네쳐[1]
2020년 3월 4일 글로벌 아레나 파크(모어컴 홈구장)
FA컵 5라운드 재경기 모어컴 대 레스터
영국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모어컴의 축구 구단인 모어컴 FC의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글로벌 아레나 파크에 박지석이 앉아있고, 그 자리로 김하늘이 뒤늦게 합석하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 자리는 괜찮으신가요? 지난 경기 항의 결과 때문에 전화 통화하다가 늦었습니다.”
"항의 결과는 나왔나요?"
"네 나오기는 했습니다. 항의 내용과 보낸 영상 자료로 봤을 때 주심의 판단 미스에 대한 재교육과 벌금 내리겠지만, 인종 차별적인 요소는 찾기 힘들다고 하네요."
그 말에 박지석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인종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 골치 아프니 아마 그 정도 선에서 주심 재교육과 벌금 정도로 끝낼 겁니다. 더 항의를 하면 오히려 피해 의식을 가졌다고 이야기와 함께 역으로 축구협회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벌금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걸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죠. 저는 이런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이 일을 이슈화 시켜서 언젠가는 뿌리 뽑을 겁니다."
의욕적으로 보이는 김하늘을 보며 박지석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구단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저도 옆에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 팀도 우리 팬들과 버금갈 정도로 열정적이군요"
박지석은 경기 시작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어컴의 서포터즈들을 보며 살짝 놀란 듯 말하자, 김하늘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죠. 열정적인 팬들이죠. 지난 시즌에 리그2에서 리그1으로 승격하고 지금 리그1에서도 승격 순위에 올라온 상황에 FA컵에서도 언더독의 반란을 이끄는 팀이니 응원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죠.”
“하긴 리그1 팀이 FA컵 5라운드에 올라온 것도 대단한 거죠. 게다가 제가 알기로는 모어컴이 지금까지 이렇게 두각을 들어낸 팀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심지어 레스터 홈경기에서 무승부를 만들고 재경기까지 하니 홈팬들이 열정적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오늘 이 경기에서 이기는 건 모어컴이 될 겁니다.”
“네에? 모어컴이요?”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바쁘신 감독님을 모시고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겠죠.”
김하늘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박지석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물론 경기장을 찾기 전에 박지석은 지난 FA컵 5라운드에서 모어컴과 레스터의 경기는 이미 봤기는 했지만, 모어컴의 특별난 부분을 찾지는 못했다.
그나마 괜찮은 건 리그1 팀 치고는 상당히 뛰어난 수비 조직력과 수비력인데 그것도 레스터 시티가 힘겨운 리그 일정에 대다수 비주전 선수를 기용했기에 뚫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 들리는 정보로는 레스터 시티가 주전 선수들을 대거 기용한다고 했으니 레스터 시티가 이길 가능성이 높았고 생각한 것이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레스터 시티가 이길 것 같은데요. 구단주님.”
“당연히 지난 경기의 모어컴을 보셨으면 그렇게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는 엄청난 선수가 선발 출전하거든요.”
"엄청난 선수요?"
선수 하나로 팀이 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기력이 크게 변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그렇게 뛰어난 선수가 리그1팀에 있는 건 더욱 흔치 않았기에 박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김하늘을 봤다.
그때 경기장 아나운서가 모어컴 선수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와
-다 부셔버려라!!
열정적인 팬들의 목소리에 둘은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고, 1만석의 작은 구장은 선수들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팬들은 아나운서의 선창에 후창으로 응답하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아나운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이름이 아닌 소개 말을 읽기 시작했다.
“두 경기 징계 이후 복귀하는 모어컴의 심장 해리 네쳐!!!”
꼭 격투기 선수를 설명하는 듯한 경기장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183cm의 건장한 체구에 2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선수가 입장했다.
-해리 네쳐!!
-너만 믿는다!!!
-레스터를 부셔버려라!!
팬들의 엄청난 응원에 해리 네쳐는 입장했다. 그는 관중석을 향해 팔을 허리에 짚고 다른 팔을 내리면서 허리를 숙이는 일명 귀족 인사법으로 팬들의 응원에 화답했다.
그리고 그 선수가 나오자, 김하늘은 자신의 품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박지석에게 건넸고, 박지석은 하늘이 건넨 PC에서 해리 네쳐의 얼굴과 대략적인 정보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서는 서양인 사이에서 흔치 않은 실눈과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는 프로필 사진이 나와 있고 그 밑에 그 선수의 나이가 적혀 있었다.
“에에? 17살? 저 얼굴에 정말 17살이 맞나요?”
“아.. 먼저 나이를 보셨군요. 그 부분은 저도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사실입니다. 좀 조숙해 보이죠.”
“아니. 그래도 이 얼굴로 17살이라니 상당히 놀랍네요.”
“그것보다는 그 밑에 있는 경기 기록 정보를 보시죠.”
김하늘의 말에 박지석은 스크롤을 내려 경기 기록 정보를 확인해 봤고, 다른 수치는 평범했지만, 활동량, 키 패스, 도움, 프리킥 골 그리고 피파울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수치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피파울률을 때문에 그러신 거죠?”
“맞아요. 이 정도면 한 경기에 7개 넘는 파울을 당한 것 같은데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게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박지석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김하늘을 봤고, 김하늘은 그런 표정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는 레스터 시티의 공으로 시작되었고, 모어컴은 4-1-4-1 전술을 구사하며 수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경기에서 레스터 시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진행되었다. 해리 네쳐는 중앙 미드필더에서 경기를 시작했지만 프리롤을 부여 받은 듯 경기장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경기에 관여했다.
“활동량이 상당히 좋군요. 저렇게 뛰어다니다가는 금세 지칠 것 같은데요.”
“아니요. 저 선수의 활동량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지금까지 리그1 경기만 봤을 때 경기당 13~ 14km가까이 뛰죠.”
“13~14km나 뛴다고요? 무섭군요. 지금 보니까 오프 더 볼 움직임이나 협력 수비 능력도 뛰어난 것 같은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덕분에 모어컴을 상대하는 팀은 필드에 11명이 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어진 경기에 김하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해리 네쳐는 공이 오는 곳 뿐 아니라 레스터의 패스 줄기를 읽고 공간을 점유하면서 역으로 공격을 하는 레스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레스터 시티가 공을 돌리며 공격적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해리 네쳐의 적극적인 수비와 활동량에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경기는 어느새 20분이 지나갔다.
그때
뻐어엉!!
신경질이 난다는 듯 레스터의 공격수인 켈레치 이헤아나초가 슈팅을 때렸고, 공은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김하늘이 박지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 겁니다. 유심히 해리 네쳐 선수를 지켜보세요.”
모어컴의 골킥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해리 네쳐 선수는 이번 경기에 중앙 미드필더로 나온 레스터의 제임스 메디슨 선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레스터의 다른 중앙 미드필더인 유리 텔레만스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순간 제임스 메디슨 선수가 격앙된 표정으로 해리 네쳐 선수에게 뭐라고 쏘아 붙이더니, 유리 텔레만스가 제임스 메디슨을 말렸다.
하지만 해리 네쳐 선수는 제임스 메디슨이 흥분해진 게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때
뻐어엉
모어컴의 골키퍼는 해리 네쳐의 앞 공간을 보고 길게 공을 찼고, 공은 상당히 길게 뻗어 나가 패널티 에어리어 인근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낙하 지점을 포착한 해리 네쳐가 공을 잡기 위해서 뛰어 들어갔고, 이번 경기에 해리 네쳐 선수를 마크하는 제임스 메디슨 선수와 자연스럽게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제임스 메디슨이 빠른 발을 이용해 공에 먼저 접근했지만, 해리 네쳐가 큰 덩치와 다르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먼저 공을 소유하게 되었다.
제임스 메디슨은 해리 네쳐에게서 공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지만, 해리 네쳐에 우월한 피지컬과 생각보다 뛰어난 발재간에 제임스 메디슨은 가볍게 제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촤르르르~~
멀어져 가는 해리 네쳐를 향해 제임스 메디슨은 이성을 잃은 듯 백태클을 걸었고, 그 순간 주심은 바로 휘슬을 불었다.
삐이익!!
관중석에서는 야유 소리가 터져 나왔고, 제임스 메디슨은 태클로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는 해리 네쳐를 보며 뭐라고 말을 했고, 옆에 있는 선수들이 제임스 메디슨을 말리기 시작했다.
고의적인 백태클과 이어진 태클을 당한 선수에게 비매너 행동을 한 제임스 메디슨은 당연히 레드 카드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제임스 메디슨이 경기장에서 나가게 되자, 해리 네쳐는 괜찮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예측한 듯한 김하늘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면 말을 이어갔다.
“재미 있는 선수 아닌가요?”
“재미 있다니요? 설마 해리 네쳐 선수가 제임스 메디슨 선수의 백태클을 유도하셨다는 건가요?”
“맞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진 패널티 에어리어 앞에서의 프리킥에서 해리 네쳐는 직접 프리키커로 나섰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해리 네쳐는 직접 골대를 향해 공을 찼다.
공은 왼쪽 골대 상단을 향해 날아갔다가 급격하게 꺾이면서 공문 안으로 들어갔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프리킥 방어율을 다섯 손가락에 뽑히는 카스퍼 슈마이켈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채로 골을 먹히게 되었다.
-우아아아아아!!
-날 가져!! 해리 네쳐!!!
-해리 네쳐!!
골이 터지는 순간 중년의 남성팬들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다 흘리면서 크게 해리 네쳐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흡사 지진이 일어난 듯 수많은 모어컴의 팬들은 자리에서 뛰면서 해리 네쳐의 골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을 향해 해리 네쳐는 아까 등장했을 때 관중들을 향해 보여주었던 귀족식 인사법으로 세레머니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지석이 김하늘을 보며 다시금 물었다.
“정말 이 모든 걸 해리 네쳐 선수가 의도한 건가요? 구단주님.”
“그렇습니다. 프로필 정보에도 나와 있듯이 괜히 피파울률이 높은 게 아니거든요. 해리 네쳐 선수의 특기가 트레쉬 토크라는 것이 적혀 있네요.”
트레쉬 토크
관중들은 모르는 축구 선수들의 또 하나의 무기였다.
손과 발, 몸 등을 사용한 여러 가지 몸싸움 등 눈에 보이는 싸움과 달리 트레쉬 토크는 다른 선수의 심리적인 부분을 건드려 파울을 유도하고 약간의 헐리우드 액션을 통해서 파울을 유도해내는 비열한 능력이었다.
이게 무슨 능력이냐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경기에 지금처럼 에이스 선수를 무너뜨려 단번에 경기의 흐름을 자신의 팀으로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은 그 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본 박지석은 다음 6라운드의 상대가 레스터 시티가 아닌 모어컴이 될 경우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는 전반 25분에 제임스 메디슨 선수가 퇴장 당한 후, 후반 35분에 유리 텔레만스 선수마저 해리 네쳐 선수에게 주먹질을 하며 퇴장을 당하게 되었다. 수적인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후반 막판 또다시 터진 해리 네쳐 선수의 프리킥 골로 레스터 시티가 패배하게 되었고, 모어컴이 창단 처음으로 FA컵 6라운드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후 박지석은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김하늘은 뭐가 좋은지 연신 웃는 표정으로 경기장 밖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선더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을 때 박지석은 김하늘이 생각지도 않은 인물과 함께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걸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지석 감독님. 저는 해리 네쳐라고 합니다.”
생각지 않은 만남에 박지석은 어리둥절했고, 김하늘은 해리 네쳐 옆에서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