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해리 네쳐[2]
“그래 반갑다. 오늘 경기 잘봤어.”
“아. 부끄럽네요. 오늘 경기를 보러 오신다고 들어서 열심히 뛰었는데..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나름 인상 깊게 봤어."
"그.. 그렇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싸인 하나 부탁 드려도 될까요?”
해리 네쳐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 그것도 13번 박지석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과 싸인하기 용이한 팬을 꺼내 건넸다.
생각지 않은 싸인 요청에 박지석은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싸인을 해주었다. 싸인을 받은 해리 네쳐는 기쁜 듯 말을 이어갔다.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
“그래? 고마워. 오늘 경기 열심히 뛰던데 힘들지 않아?”
“힘들기는요. 오늘 평소보다 좀 더 뛰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가뿐해요.”
그 말에 옆에 있던 김하늘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맨유 경기를 봤는데 거기서 작은 몸집으로도 주눅들지 않고 열심히 움직여서 좋은 경기를 보였던 감독님의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늘 인사 드리려고 이렇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도..”
상대팀 선수를 이렇게 데리고 왔다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다음 경기에서 만날 팀의 감독과의 만남은 여러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이에 김하늘이 박지석의 우려를 파악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아.. 단순히 에이전트인 제가 소속 선수의 요청으로 박지석 감독님의 싸인을 받게 한 것 밖에 다른 뜻이 없으니 구설수는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 말씀은? 해리 네쳐 선수가 구단주님의 에이전트 소속 선수라는 건가요?”
그 말에 옆에 있던 해리 네쳐가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김하늘씨는 제 에이전트예요. 제가 박지석 감독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특별히 요청 드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FA컵 준결승에 오르는 건 선더랜드가 아니라 모어컴이 될 거예요.”
당돌한 해리 네쳐의 말에 김하늘이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지금 눈 앞에 있는 분이 바로 선더랜드의 감독이고 내가 선더랜드의 구단주인 걸 알고 하는 말이야?”
“그럼요. 하늘씨. 하늘씨도 그랬잖아요. 오늘 에이전트의 입장으로 오신 거라고요. 그리고 저는 선더랜드를 이겨서 저의 가치를 선더랜드의 감독님인 박지석 감독님께 입증하고 싶다고요. 그러면 저를 영입하고 싶어하시지 않을까요?”
“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네. 잘못하면 영입 전 사전 접촉 문제로 붉어질 수 있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미 모어컴도 제가 이번 시즌 끝나고 팀 떠난다는 건 다 알고 있다고요. 제가 박지석 감독님 밑에서 뛰고 싶은 건 에이전트인 하늘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아. 그랬지.”
어린 나이에 해리 네쳐가 주눅 들지 않고 김하늘을 구단주가 아닌 에이전트로 대하는 당돌한 모습에 박지석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경기장에서 다른 선수들이 나와 해리 네쳐를 찾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해리 네쳐는 박지석과 김하늘에게 인사를 건넨 후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어떤가요? 박지석 감독님.”
“다음 라운드에 선수들 멘탈 훈련을 확실히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제임스 메디슨 선수처럼 퇴장 당하는 녀석이 없도록 말이죠.”
“그렇죠. 그거 말고 저 친구의 영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시너지를 낼 것 같은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이니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저런 유형의 선수가 같은 팀일 때는 그만큼 든든한 것도 없거든요. 여러 가지 변수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죠.”
“역시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라 시즌이 끝난 뒤에 나눠야 할 것 같군요. 지금은 저 골치 덩어리를 대처해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선더랜드로 날아가서 다음 경기 준비하도록 하시죠.”
그렇게 박지석은 해리 네쳐라는 선수를 머리에 넣고 FA컵 6라운드를 준비하게 되었다.
물론 FA컵 6라운드 전에 리그 일정이 있었지만, 리그에서는 이미 1위 굳히기에 들어간 선더랜드를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고, 박지석은 FA컵 6라운드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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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8일 라이트 오브 아카데미(선더랜드 1군 훈련장)
평소처럼 아침 훈련을 마친 가람과 권윤성, 김만재는 다른 선수들보다 일찍 훈련장에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어제 2위인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올리비에 지루와 가람의 멀티골로 3대0 승을 거두며 이제 남은 경기를 전부 패한다고 해도 최소 2위는 지킬 수 있어 다이렉트 승격을 확정한 상태였다.
경기가 끝난 후 조촐하게 승격 축하 파티가 마련되었지만, 박지석 감독은 리그 승격이 확실히 된 가운데 FA컵 우승이라는 목표를 선수들에게 상기시키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경기를 뛴 선수들의 오전 회복훈련이 끝난 뒤 박지석 감독은 모든 선수들을 전술 회의실로 불렀다.
“오늘 오후 전술 훈련을 멘탈 강화 훈련으로 대체한다. 앞에 있는 유인물과 태블릿PC를 가지고 가도록.”
박지석 감독의 말에 선수들은 수석코치인 제임스 플라워가 주는 태블릿PC와 유인물을 받아갔다. 가람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유인물을 들어봤고, 거기에는 입에 담기도 험한 인종차별 욕설과 가람 신상에 관련된 민감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뺑소니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를 빗대어 아버지도 없어서 예의가 없다는 식의 말이나 과부가 된 엄마인 캐서린을 두고 성적인 발언이 담겨 있는 욕설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유인물을 본 순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지 상당히 불만이 섞인 표정으로 박지석 감독을 봤고, 박지석 감독은 그런 눈빛을 받으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유인물에는 너희의 지인들을 통해 각자에게 민감한 부분을 알아보고 그런 부분에 대한 욕설이 적어 두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거로 생각하지만, FA컵 다음 라운드에 모어컴과의 경기에서 실제로 저런 욕설보다 더 심한 욕설을 하는 선수가 경기에 나올 거다. 그럼 영상 틀어주시죠.”
박지석 감독의 지시에 따라 제임스 플라워는 영상을 틀었고, 거기에는 해리 네쳐의 경기 장면이 나왔다.
지난번 김하늘과 같이 참관했던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 뿐만 아니라 다른 팀과의 경기 특히 리그1에서의 경기가 주로 나왔다. 해리 네쳐는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왔고, 그 다음에는 그 선수가 해리 네쳐에게 보복성 태클이나 파울을 해서 경고나 퇴장을 당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런 경기가 단순히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런 장면만 모아두고 영상을 만들었는데도 30분에 가까운 긴 영상이었다.
그렇게 영상이 끝나자, 모든 선수들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팀의 주장인 리 캐터몰이 손을 들었다.
“주장. 할 말 있나?”
“감독님. 지금 이 유인물과 태블릿 PC는 저 선수를 대비해서 준비하는 훈련인가요?”
“맞아. 모어컴의 에이스 해리 네쳐가 우리가 경계할 선수다. 17살 나이라고 믿기 힘든 노련한 경기 운영과 트레쉬 토크는 상대팀 에이스 혹은 중심이 되는 선수를 노리고 경기 내내 괴롭힌다고 들었다.”
“이런.. 저 얼굴이 17살이라고요? 그럼 우리 꼬맹이보다 더 어린 거 아닌가요?”
“그래 맞아. 나도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자신이 유도한 파울을 순순히 당하는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183cm의 큰 키와 근육질 몸으로 만약 상대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반칙도 할 선수다.”
박지석 감독의 말에 리 캐터몰은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모어컴이라면 잉글랜드 북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로 알고 있는데 거기도 여기 만큼 빡빡한 동네라고 하더니만 말도 안되는 괴물이 나타났군요.”
다른 팀에서 미친 개라고 부르며 터프한 경기를 하는 리 캐터몰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주변에 있는 선수들도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그 유인물과 태블릿PC를 준 거다. 지금 태블릿PC에는 알렉스 스미스씨가 직접 녹음한 음성 파일이 들어 있다. 경기 전에 미리 듣고 면역력을 키우도록 해. 실제로 듣는다면 더 화가 나겠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좋을 거다.”
박지석 감독의 말에 리 캐터몰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을 들었다.
“감독님 단순히 녹음 파일보다는 저랑 몇몇 베테랑 선수들이 실제로 트래쉬 토크를 사용해서 연습경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박지석 감독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실제로 욕설이 섞인 경기를 하다 보면 거칠어지고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은 마음에 걸리는군.”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이 분야의 베테랑과 새싹들을 뽑아서 제가 직접 가르치고 훈련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주장은 남아서 나랑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웬일인지 기뻐 보이는 리 캐터몰을 뒤로 하고 박지석 감독은 해리 네쳐의 경기 영상을 보여주며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해서 인지 시켜주었고, 3일 뒤에 있을 모어컴에 대한 전술 분석을 진행했다.
그렇게 오후 전술 훈련이 끝난 후 리 캐터몰은 박지석 감독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잠시 후 전술 훈련실에서 빠져나왔다.
나머지 선수들은 훈련이 끝나자, 개인 정비를 마치고 퇴근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
띠리링 띠리링~
복도에 있는 스피커에서 익숙한 방송 시작음이 울린 후 더 익숙한 리 캐터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까 말했듯이 FA컵 6라운드에 해리 네쳐라는 괴물 애송이를 대처하기 위한 빌런 팀을 발표할 테니 호명한 사람들은 즉시 알렉스 스미스 경비 총괄님 사무실로 오도록!
그 방송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선수들은 걸음을 멈추었고, 가람도 멈추었다.
- 그런트 리드비터, 맥스 파워, 기성룡, 글랜 로번스..
그렇게 리 캐터몰의 빌런 호명이 시작되고, 호명된 선수들은 모두 경험이 많은 베테랑 선수들이었다.
호명을 받은 선수들은 리 캐터몰의 호출에 퇴근이 미뤄진다는 것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나긴 했지만, 다 팀을 위한 일이라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룡 선배. 훈련 때는 살살 해주세요.”
가람은 기성룡에게 인사를 하며 김만재와 권윤성과 함께 퇴근하려고 할 때
-김가람. 이상 5명은 즉시 알렉스 스미스 경비 총괄님 사무실 앞으로 와라!
가람은 생각지 않은 리 캐터몰의 호명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권윤성이 가람의 어깨를 짚으며 웃었다.
“가람아. 훈련 때 살살 해줘~”
그 말과 함께 김만재와 권윤성은 퇴근을 서둘렀고, 가람은 기성룡과 함께 알렉스 스미스 경비 총괄 즉 외할아버지의 사무실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