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끈질긴 인연[1]
남은 경기는 선더랜드가 주도권을 갖고 진행했다.
이번 경기에 중앙 미드필더로 나온 가람은 자신이 마크해야 할 해리 네쳐가 퇴장으로 나가자, 거의 프리 롤을 부여 받은 선수처럼 자신의 높은 활동량으로 경기장 전 지역을 뛰어 다녔고,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고오오오올!!! 후반 35분 올리비에 지루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김가람 선수의 네 번째 도움입니다. 경기는 5 대 0, 모어컴의 돌풍은 여기까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전반 10분에 해리 네쳐 선수가 퇴장 당한 후 김가람 선수가 중원을 장악했더니 그때부터 경기는 사실 선더랜드로 기운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모어컴의 공격을 주도하던 해리 네쳐 선수가 빠진 이상 경기는 끝났다고 봐도 됩니다.”
“그렇군요. 오늘 경기 상당히 치열하게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이번 경기 키 플레이어였던 해리 네쳐 선수의 이른 퇴장으로 경기는 쉽게 마무리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해리 네쳐 선수의 플레이는 평소와 아주 달랐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직 경기 10분이 남은 상태였지만, 선더랜드에서 선수들을 대거 교체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나오자, 중계진은 경기 마무리 멘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해리 네쳐 선수가 자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더티 플레이에 당한 걸로 보입니다. 김가람 선수가 어떻게 그를 흥분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더티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멘탈은 상당히 강하거든요. 그런 해리 네쳐 선수를 흥분 시킨 김가람 선수의 비결은 저도 궁금하군요.”
“오늘 경기 선더랜드가 이기고 올라간다면 준결승에서 맨시티와 맨유의 경기 승자와 상대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선더랜드가 과연 두 팀 중에 어느 팀과 상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사실 프리미어 리그는 1위 리버풀부터 6위팀까지 모두 승점이 한 경기 차이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2위인 맨시티나 5위인 맨유도 마지막까지 리그에 집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FA컵에 아마 많은 여력을 쏟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바쁜 일정 때문에 로테이션을 돌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요. 그 점을 노려서 선더랜드가 공략을 한다면 어떤 팀을 만나도 좋은 경기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선더랜드가 상당히 승산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지금 선더랜드가 전력을 보강하지 않고 이대로 승격을 한다고 해도 중상위권 프리미어 리그팀들과 충분히 경쟁이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렇게 개리 리네커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강조하며 선더랜드의 앞날을 예상할 때 주심을 휘슬을 입에 물고 크게 불었다.
삐이익! 삑!
“경기가 종료됩니다. 라이트 오브 스타디움에서 진행한 FA컵 6라운드의 승자는 5대 0 대승을 거둔 선더랜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 선더랜드의 기세는 상당히 매서운데요. 이제 남은 건 두 경기입니다. 과연 선더랜드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저도 궁금하군요.”
“그럼 오늘의 경기 MOM에 뽑힌 김가람 선수와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화면에 김가람이 이어폰을 낀 채 나타났고, 그 모습을 본 마틴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가람 선수. 오늘 경기에 중앙 미드필더로 나와서 4개의 도움을 올리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선 응원 해주신 팬분들께 감사 말씀 드리고요. 제가 중앙 미드필더에서 처음 나왔지만, 팀원들이 도와줘서 4개의 도움을 올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개리 리네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나 한결 같은 겸손한 모습이시군요. 오늘 경기에 사실 해리 네쳐 선수가 전반 이른 시간에 빠지면서 선더랜드쪽으로 크게 기울었습니다. 해리 네쳐 선수가 평소와 다르게 김가람 선수와 경합을 하면서 상당히 흥분된 모습을 보였는데요. 두 선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단지 저는 경기를 준비하면서 해리 네쳐 선수가 자신이 하는 플레이를 스스로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거든요. 어린 선수라 그런지 상당히 흥분하는 것 같더라구요.”
“하하하. 그렇군요.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건 이번 경기에 대한 내용은 아닌데요. 김가람 선수가 지금 뛰어난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아직 한국 국가대표팀에는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가람 선수는 이전 인터뷰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부름이 있으면 언제든 나설 의향이 있다고 했는데요. 아직까지 이런 움직임 없는 것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지 않은 질문에 가람은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평정심을 찾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아니라 국가대표 감독님인 벤투 감독님의 판단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제가 더 뛰어난 경기력을 보이면 찾아주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만약 어머니의 국적인 잉글랜드의 국가대표팀에서 부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제안이 들어오지도 않았고, 현재까지는 저는 한국 국가대표만 생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아직 제가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언제나 겸손한 모습이시군요. 그렇다면..”
개리 리네커가 좀더 국가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담당 PD가 손을 엑스로 만들었고, 그걸 본 마틴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이제 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오늘 경기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가람의 인터뷰가 끝나고, 곧이어 중계진들도 마무리 인사를 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대본을 정리하는 마틴 테일러가 개리 리네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개리. 왜 갑자기 김가람 선수한테 국가대표를 물어본 거야?”
“당연히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뽑히면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직은 어리잖아. 저런 폼을 유지할지도 모르고.”
“아니요. 제 생각에는 분명 좋은 선수가 될 겁니다. 마이클 오언이나 웨인 루니 아니 지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해리 케인 선수보다 더 좋은 선수가 될 수도 있고요.”
“이거 이거.. 또 흥분하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축구협회에 유망주를 추천했다가 면박도 많이 당하고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싫어했던 거 기억 못하는 거야?”
“아니에요. 이번엔 진짜라고요. 아!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사우스게이트한테 전화해서 이야기 해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이번에는 잘 되었으면 좋겠네.”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개리 리네커는 마틴 테일러와 헤어졌고, 황급히 통화하기 시작했다.
-----------
인터뷰를 마친 가람은 씻은 후 라커룸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잉글랜드라..’
축구 종주국이라고 하지만 1966년에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둔 후 좋은 자원에 비해 모래알 같은 조직력으로 언제나 월드컵 우승과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지난 월드컵에서 4강에 들며 저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승 후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긴 이번 삶에는 한국을 월드컵 우승 시키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 잉글랜드 국적을 선택해도 괜찮지 않을까?’
지난 U20 월드컵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 많은 삶에서 한국을 이끌고 월드컵을 우승해야 했던 강승연이기 때문에 별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국 국적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인인 강승연이 아니고 혼혈의 김가람이다. 국가대표에서 부르지 않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잉글랜드 국적을 선택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샤아아아~~
마음 속 한켠에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는 듯 차가운 기분을 느꼈더니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뛴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왠지 가람도 그런 느낌에 수긍했다.
지금까지 이미 인터뷰에서도 계속 한국 국가대표로 뛴다고 했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잉글랜드 국가대표를 취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제는 한국으로 월드컵 우승을 시킬 필요도 없는데 한국 국가대표로 뽑힐 때 나서면 되겠지 .’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고객을 들었더니 김하늘이 들어오는 것을 보였다.
“다 씻었어?”
“네. 형. 기다리셨어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구단주로서요? 아니면 에이전트로서요?”
“아. 이건 좀 애매한데.. 둘 다라고 할까나?”
“둘 다요? 정말 애매한 말이네요. 그럼 이야기 하세요.”
“아.. 아니..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밖에서 해야 할 것 같아.”
“아 그래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가람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하늘이 입을 열었다.
“그거 신상품이네.”
“네. 항상 샤오루 구단주님이 보내주신 옷을 입어야 하니까요. 그게 계약 조건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가끔은 네가 원하는 옷을 입어도 돼.”
“아니요. 이게 편해요.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알려주셔서 그대로 입으면 편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굳이 옷을 살 필요도 없이 다 보내주시니 더 편하죠.”
“아.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럼 가실까요?”
“그래.”
그렇게 가람은 김하늘을 따라 김하늘의 차를 타고 선더랜드 1군 훈련장 뒤쪽 길에 있는 식당가로 갔다.
이전에는 허허벌판에 갈대숲만 울창한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길도 4차선으로 확장하고, 길가 옆에는 축구 펍 등 수많은 식당들이 있었다.
매번 가람이 1군 훈련장까지 걸어가는 코스의 반대편 길이라 멀리서 공사를 하는 모습만 봤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은 생소한 가람은 입을 열었다.
“여기 정말 많이 변했네요.”
“뭐야. 너 한번도 안 온 거야?”
“네. 저는 앞쪽만 다녀서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네가 조깅하는 곳은 주택가가 있어서 개발을 못했지만, 뒤쪽은 선더랜드 1군 훈련장의 관광객을 위한 식당가로 개발되었어.”
1군 훈련장에 패키지 여행을 온 사람들이 종종 있는 건 알고 있었기에 가람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몇몇 구단에서는 1군 훈련장을 개방하지 않고, 비밀리에 훈련을 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김하늘과 박지석은 오히려 팬들과 소통하는 걸 선호해 특정 시간에는 관광객들이 들어와 구경을 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경비 총괄인 알렉스의 일은 많아졌지만, 그래도 그런 관광객들의 발걸음 덕분에 선더랜드 지역 발전에 힘이 되었고 선더랜드 구단의 수익도 크게 늘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변한 거리를 보고 있을 때 익숙한 간판의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미스 패밀리 식당?”
가람이 의아한 듯 말하자, 김하늘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가람을 보며 말했다.
“너 설마 이것도 모르는 거야?”
김하늘의 말에 가람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김하늘은 설명 대신 어리둥절한 가람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람은 식당의 인테리어를 보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