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게이?[1]
2020년 12월 23일 선더랜드 어린이 병원
"오늘 이렇게 모여주신 선더랜드의 선수들과 관계자분들께 박수를 보내드리며, 이제 순서에 맞춰서 싸인과 기념 촬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행사 MC의 진행에 맞춰 수많은 어린이 환자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에 맞춰 원하는 선수에게 달려가 싸인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많은 인기를 얻는 건 당연 가람이었고, 다른 선수들의 배가 넘는 긴 줄이 이어졌다.
심지어 다른 선수들의 싸인을 받은 아이들이 또 다시 가람의 싸인을 받기 위해 준비를 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면 당황할 법도 했지만, 이미 작년에 비슷한 상황을 겪어봤기에 김하늘은 이미 가람에게 싸인 볼을 준비하게 했고, 가람은 거기에 아이의 이름만 추가한 후 사진을 찍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게 가람이 싸인 행사를 진행하자, 오히려 다른 선수들보다 더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오전에 진행된 싸인과 사진 찍는 행사를 마친 가람, 해리 네처, 권윤성, 기성룡은 주최측에서 선수들이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한 통제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앙. 손 아파!!"
"헤이~ 윤성! 너는 얼마 하지도 않았잖아."
"얼마 안 하기는 엄청했다고!"
그 말을 듣은 기성룡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 전부터 이 행사 때문에 싸인 볼에 싸인하고 심지어 오늘 아침까지 싸인한 가람이가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거야. 어제 돌았던 양로원에서도 가람이가 제일 많이 싸인 했잖아."
"주장. 저도 힘들었다고요."
"그래. 그래. 알겠다. 하지만 오늘 같은 행사에서는 감독님도 말했듯이 힘들어도 티내면 안되는거야 알겠어? 웃으면서 하는 거라고, 가람이 봐라. 얼마나 잘 웃나."
"피이.. 저 녀석은 축구 선수가 아니라 연예인을 해야 한다고요. 저는 차라리 이시간에 운동을 하는 게 더 편하겠어요."
"그럼 감독님께 말해서 빼달라고 할까? 체력단련 할래?"
"에이.. 주장은 농담도 못해요~ 농담도."
사실 싸인회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체력단련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혹시나 기성룡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권윤성은 서둘러 말을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가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가람은 씨익 웃었다.
김하늘이 구단주가 되면서 매년 연말마다 진행된 행사였다.
양로원, 어린이 병원, 고아원 등 사회적으로 약자들을 방문해서 응원하고 축구를 전파하는 행사였다.
이런 행사는 팬들의 사랑으로 운영되는 프로 구단들은 종종 하는 행사였다.
특히 잉글랜드에서 축구 선수는 연예인 이상의 대우를 받기 때문에 이런 응원 방문행사에 수많은 시설들이 반가워했고, 종종 이어지는 프로 선수들의 후원까지 있어서 선더랜드뿐 아니라 다른 EPL 대부분 구단에서도 진행되었다.
구단에서는 이런 행사를 통해 서포터즈들을 확보해, 안정적인 시즌권 확보와 클럽에 관련된 굿즈 판매 촉진이라는 마케팅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프로 구단의 자선 행사는 강승연의 삶에서 단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강승연은 유년 시절에 고아원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베푸는 자선 행사는 신물이 나도록 참석을 했었다.
자선 행사 당시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 후에 밀려오는 공허함은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지만 나는 왜 이런 고아원에 쳐박혀 있어야 하는 지 부당함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강승연의 삶에서는 자선 행사가 너무 싫었고,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람의 삶을 살면서 처음 자선 행사를 간다고 했을 때 느껴졌던 반항심은 자신을 진정시키는 그 특유의 기분과 함께 사라졌고, 이제는 자선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람과 해리 네쳐는 거둥이 불편한 환자들이 있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오후 스케줄을 진행했다.
병원 직원의 안내로 병실로 들어가 가람은 준비한 싸인 볼을 주었고, 이미 가람의 팬이였던 아이들이 유니폼을 꺼내면 싸인을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행사를 마친 후 병원 로비로 가자, 오늘따라 정장으로 멋을 낸 캐서린과 알렉스가 가람을 보며 손을 들었고, 가람은 그들을 향해 갔다.
"오셨어요?"
"그래. 매번 오는 거지만 이렇게 떨리네."
"우리가 혼나러 오는 것도 아니고 후원하러 오는 건데 긴장하지 마세요."
"그래."
가람이 프로 계약을 따고 상당한 금액의 계약금을 받은 후, 캐서린의 의견으로 가람 이름으로 자선재단을 만들었다.
말은 장학재단이지만, 캐서린과 알렉스 그리고 스미스 패밀리 식당과 스미스 패밀리 가든의 회계를 도와주었던 회계사까지 해서 작은 그룹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적지 않은 금액으로 후원을 진행했고, 가람이 후원한 돈으로 병원에서는 치료비가 부족한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양로원에서는 시설 확충, 고아원에는 급식비와 축구 장비등을 보급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더랜드의 연말 행사에 맞물려서 세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후원금을 전달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앞서 말했듯이 강승연의 삶에서는 자선 행사나 베푸는 것을 극히 싫어했지만, 이번 생에는 그런 반항심이 생길 때마다 진정시키는 감정에 의해 캐서린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 관계자가 오는 동안 셋은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지도 않은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 리사 뮐러씨?"
리사 뮐러는 평소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이나 펑퍼짐한 점퍼가 아니라 몸에 딱붙은 오피스룩으로 멋을 내었다.
"오늘은 평소 옷차림하고 좀 다르시네요?"
"현장도 아니고 나름 스포츠 기자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꿈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
"하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오늘 여기는 무슨 일로?"
"특집 기사로 선더랜드 구단과 선수들의 자선 행사에 대해서 쓰게 되었어."
하지만 리사 뮐러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는 캐서린과 알렉스를 보며 가람은 그전에 이들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의례적인 사진행사가 진행되었고, 그동안 리사 뮐러는 김하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선더랜드 구단이 다른 구단에 비해 지역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선 행사를 꾸준히 이어가는 정책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하늘의 인터뷰가 끝나자, 리사 뮐러는 다른 선수들과 가볍게 인터뷰를 진행했고, 인터뷰를 하며 선수들과 웃으며 대화를 하는 리사 뮐러에게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가끔 시선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권윤성이 스윽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죽이지?"
"네에?"
"아니. 리사 뮐러씨 말이야. 몸매도 그렇고 지적인 이미지까지 매번 저런 정장 입었으면 좋겠다."
권윤성의 노골적인 말에 가람은 말을 섞기 싫었다.
물론 자신이 알기로도 선더랜드 선수들 사이에서 리사 뮐러에게 대시를 하려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상당히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가짜이기는 하지만 리사 뮐러와는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더욱 이런 말을 섞기 싫었다. 가람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가람을 보며 권윤성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가람아.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뭐예요? 선배."
이미 방금전 리사 뮐러에 대한 말로 약간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람이었기에 신경질적으로 답하자, 권윤성이 살짝 놀라서 말했다.
"뭐냐? 왜 이리 신경질적이야."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궁금하세요?"
"너.. 혹시 게이는 아니지?"
"뭐예요?!"
가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쳐다봤고, 권윤성은 화들짝 놀라 가람을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야! 임마! 그렇게 소리 치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선배가 말도 안되는 말을 하니깐 그렇죠."
"그건 미안하다. 그런데 너 이제 곧 성인이잖아. 아니 이미 성인이지. 만 19세잖아. 그런데 너는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성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맨날 축구만 하니깐 팀에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저는 게이 아니에요. 그냥 축구가 좋을 뿐이라고요."
"그래. 그래. 오해 했다면 미안하다. 그래도 주변에서 보는 시선들도 있고 너를 살짝 게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너 요즘 키도 커지고 몸도 좋아지면서 선수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선배! 정말!"
헤딩 수치를 올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커야하는 키가 갑자기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 사이에 가람은 3cm 정도 더 키가 커져 185cm가 되었고, 그에 맞게 근육도 성장했다.
이렇게 점점 키도 몸도 커지자, 남자들이 위협을 느낄 만한 사이즈가 되어 말도 안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크크크 너 얼굴 빨갛게 변했다. 그리고 게이가 아니라면 이번에 내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에 와라."
"그 파티에 제가 왜 가요?"
"야! 그러니깐 네가 게이라는 소문이 도는 거야. 너가 오면 파티의 질이 올라가는 거잖아."
"그 시간에 쉬고, 훈련을 더하겠어요."
"이녀석!! 선배가 게이의 딱지를 뗄떼어주려고 했는데 안되겠네. 이번 파티에는 리사 뮐러씨도 온다고."
"네에? 정말요?"
권윤성이 확신에 찬 말에 가람은 의아해했다.
자신이 본 리사 뮐러는 축구 덕후이며 또래에 비해 꾸미거나 유흥을 즐기는 여성은 아니었다.
그런데 권윤성이 주최하는 파티에 간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아까 이야기 했는데 웃으면서 생각해본다고 했거든. 그럼 80프로 확실하다고, 내일 특별히 일도 없다고 했어."
권윤성의 말대로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리사 뮐러가 크리스마스를 독일로 가서 가족과 보내지 않다는 걸 이미 들은 가람이었기에 리사 뮐러가 어쩌면 권윤성의 초대에 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이 대화를 좀 더 나누려고 할때 캐서린이 다가왔고, 권윤성은 황급히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생각있으면 연락해."
그 말을 들은 캐서린은 가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파티 초대라도 받았니? 윤성이가 초대하는 것 같던데."
"뭐 비슷한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생각보다 먼저 끝나서 가려고 한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다른 선수들은 구단 버스로 돌아가지만 가족이 왔기에 가람은 가족의 차로 가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때 캐서린이 윙크를 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 뮐러씨랑 인터뷰하고 리사 뮐러씨 차타고 오렴.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우리는 이 길로 이모네댁에 갔다가 크리스마스에 올 거란다. 너도 알지? 해리 네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휴가로 독일에 가는 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람은 집에 자신과 리사 뮐러만 남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