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게이?[3]
"사실 저는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람의 폭탄 발언에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리사 뮐러가 사례에 걸린듯 켁켁거렸고, 그 모습을 본 루웬 밀러가 눈을 빛냈다.
"그래요? 그게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네. 손녀 따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푸우웃!!
이번에는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게르트 뮐러가 차를 뿜었다.
어느 정도 손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결실이 맺어질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차분한 루웬 뮐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축구 선수들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죠. 혹시 가람씨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 리사를 만나고 계신가요?"
"할머니~"
리사 뮐러는 급발진하는 할머니를 보며 그만하라는 듯 말을 했지만, 루웬 뮐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 아이 부모님이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저희에게는 손녀딸이 아니라 딸 아이라는 심정으로 키웠습니다. 그래서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말에 가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사람을 만날 때 책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사 뮐러씨를 가볍게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해준다니 정말 고마워요. 아직은 둘 다 어린 나이라 특히 가람씨의 나이가 많이 어리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압박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리사 뮐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노인네의 주책이죠. 둘이 앞으로도 좋은 만남 이어갔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가람이 루웬 뮐러와 대화를 마치자, 리사 뮐러의 얼굴은 붉어진 채 가람을 쳐다봤고, 가람은 살짝 윙크를 했다.
그렇게 차까지 마신 후 게르트 뮐러 부부는 서둘러 떠나려고 했고, 리사 뮐러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 여기까지 왔는데 더 있다가 가시지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으이고. 요녀석아! 그때 야마구치씨를 거절하더니 이제 보니 연상이 아니라 연하가 취향이었구나."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기는. 이야기 나눠보니 괜찮은 사람 같더라. 잘 잡아! 그래서 서둘러 가는 거니깐."
"으응? 뭐라고요? 할머니!"
그렇게 루웬 뮐러는 택시에 탔고, 게르트 뮐러는 창문을 내려 리사 뮐러를 보며 말했다.
"화이팅!"
"할아버지는 뭐가 파이팅인 거예요?!"
아침에 와서 폭풍같이 떠난 둘을 보며 리사 뮐러는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가람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에서 사귀고 있다고 말한 걸 보면 이건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았다.
그렇게 잠시 너무나 선물 같은 기분을 맞이하고 있을 때
"리사씨! 리사씨!"
"어머!"
순간 뒤에서 들리는 가람의 목소리에 리사 뮐러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놀라버린 표정을 지었고, 가람은 그 얼굴을 보며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놀라셨어요?"
"아.. 살짝.. 그런데 왜?"
"아까 한 이야기도 있고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그래. 점퍼만 가지고 올게."
리사 뮐러는 잠퍼를 가지고 온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가 머리를 허둥지둥 만지고, 향수를 뿌렸다.
"갑자기 화장을 하면 이상하겠지?"
화장을 하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리사 뮐러는 가볍게 B.B 크림만 바르고, 요근래에 너튜브 K 뷰티 영상에 배운 한듯 안한 듯한 여친 화장법으로 최대한 빠르게 치장을 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리사 뮐러는 집 밖으로 나왔고, 가람은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냥 가볍게 걸으려고 했는데 제가 부담을 드렸나요?"
"아니. 그건 아니야. 어서 가자."
그렇게 집 앞의 공원을 지나 해안 산책길로 가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길에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인파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가람을 알아보고 싸인 요청이나 사진을 요청했고, 가람은 그런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
리사 뮐러는 그런 가람을 보며 살짝 떨어지려고 했지만, 가람은 오히려 리사 뮐러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둘은 손은 잡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남이 아닌 친밀한 사이로 생각하는 간격으로 걸어갔고,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느낀 리사 뮐러가 가람에게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왜요? 문제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페이크 연인 하기로 했잖아요. 아까 스승님께도 관계를 말했으니 퍼지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요."
"그렇기는 하지."
"그렇다면 이렇게 같이 다니면서 사진도 찍히고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제가 그동안 생각을 잘못했어요. 할 거면 확실히 하는 게 좋은데 말이죠."
"확실히?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
"저는 괜찮아요."
가람이 페이크 연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리사 뮐러는 자신과 함께 연인행세를 해주는 가람이 고마웠다.
그리고 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해안가의 마켓에서 물건도 사고 가볍게 간식거리를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리사 뮐러는 이 시간이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고, 영원했으면 했다.
하지만 시간은 리사 뮐러의 바람과 다르게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덧 저녁이 찾아왔고, 둘은 근처 해안가 식당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람 많네."
"그러게요."
"아주머니는 이런 날에 장사를 하시면 돈 많이 버실 텐데 휴업이라니 놀라워."
크리스마스 이브에 식당에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모여 있었다. 이런 대목에 오늘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당일도 스미스 패밀리 식당은 사원 복지라는 명목으로 휴업을 했다.
돈을 바라는 식당에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휴업일이었지만, 사장인 캐서린의 크리스마스 기간은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어머니는 돈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시거든요. 저희 집도 매번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냈고요. 이번은 아니지만요."
"아. 그렇지. 괜히 내가 독일로 안 간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닌가 모르겠네."
캐서린은 떠날 때 가람에게 귀뜸을 주었던 것처럼 리사 뮐러에게도 귀뜸을 주었기에 리사 뮐러는 괜시리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오히려 잘 된 거죠."
"잘 된 거야?"
"그럼요. 아까도 말했듯이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페이크 연인."
"아. 그렇지."
오늘 가람은 마음이라도 먹은 듯 주변 사람에게 자신을 공개했다.
초반에 해안가에서 수근거리던 사람들의 소문이 퍼졌는지 오후에는 파파라치들이 자신들을 찍는 모습이 보였지만, 가람은 그런 그들을 내쫓지도 않고 오히려 찍혀주기라도 마음 먹은 듯 행동했다.
그런 가람의 행동을 보며 리사 뮐러의 마음은 조금 싱숭생숭해졌다.
사람이라는 게 하나를 얻게 되면 둘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듯이 처음에는 페이크 연인이라도 자신의 곁에 있는 가람이 좋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가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페이크 연인이라고 자신과의 관계를 확정하는 가람의 모습에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때 식사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가 나타났고, 가람을 보더니 팬이라며 싸인을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사람과 같이 있으니 식사가 끝나고 해드리죠"
"아. 그러시군요. 제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가람의 말을 듣는 순간 리사 뮐러는 저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리사 뮐러는 가람과의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고, 식사까지 마친 가람과 리사 뮐러의 뒤로 이제는 대놓고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따라붙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알고 있는 리사 뮐러가 입을 열었다.
"내일 편집장님한테 한소리 듣겠네."
"네에? 왜요?"
"왜기는~ 솔직히 이거 소식 대박이잖아. 가람 선수의 연인에 대한 정체!! 이런 제목을 달아서 기사 쓸 수 있는데 그게 자신의 회사 사원 그것도 기자이니 속 쓰리겠지. 우리 편집장님이 맨날 특종 특종이라고 말하거든."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오늘 저만 생각해서 이런 일을 꾸민 것 같아 죄송해요. 매번 제 입장에서 휘둘리시는 것 같아요."
"괜찮아. 하지만 지난번에 약속햇듯이 내가 원하는 거 꼭 하나 들어줘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그렇게 둘은 대화를 마치면서 집으로 향했고, 파파라치들은 둘이 같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최대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가람은 능숙하게 집 안에 있는 커튼들을 치면서 파파라치의 시선을 차단한 후 경찰에 신고해서 파파라치들을 도망가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파파라치들은 원하는 사진을 다 찍을 수 있었고, 사진들은 바로 수많은 스포츠 사이트에 팔리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잉글랜드뿐 아니라 대한민국까지 가람의 스캔들 기사가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리사 뮐러가 누구인지 파헤치는 언론들도 나타났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가람은 평소와 같이 일어나 뒷마당에서 훈련을 마친 후 집안으로 들어왔고, 그때 익숙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냄새에 따라 부엌으로 가니 캐서린이 식사를 준비하는 게 보였다.
"오셨으면 이야기라도 하시지, 뒷마당에 있었는데요."
"뭐. 큰 손님이 왔다고 인기척을 내니? 훈련 열심히 하고 있던데.. 오후에는 팀훈련에 참석하는 거지?
"네. 맞아요. 크리스마스 파티는 훈련 다녀와서 해요."
"그래 알겠다. 이모가 너 좋아하는 사과 파이도 주셨으니 같이 먹도록 하자. 그런데 너 괜찮겠어?"
"뭐가요?"
"신문에 크게 실렸단다. 너랑 리사양에 대한 기사 말이야."
"아. 그거요. 어차피 영원한 비밀은 없잖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김하늘씨에게는 네가 통화해보도록 해라.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와서 상당히 놀란 것 같은데 말이야."
"알겠어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제 게르트 뮐러 부부가 오셨을 때 말씀드렸니?"
어제 루웬 뮐러가 부엌을 쓰기 전에 캐서린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했기에 캐서린은 어제 게르트 뮐러 부부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네. 물론 말씀드렸어요."
"그래. 이렇게 기사가 났는데 미리 알고 계시지 않았다면 놀라셨을 거란다. 나는 아들을 믿는단다. 너무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남자로서 섣부른 행동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람은 방으로 향했고, 거기에 이미 부재중 통화가 엄청나게 와 있는 김하늘의 목록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가람은 바로 통화를 연결해 김하늘에게 전화를 했고, 자신도 모르게 파파라치에게 들킨 것에 대해 한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에 대해 김하늘은 살짝 서운한 듯 했고, 가람에게는 연인은 그렇다고 해도 결혼 상대라면 꼭 먼저 소개하라는 조언과 함께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이이잉~
누군가의 문자가 가람의 핸드폰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