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생각지 않은 상황[1]
띠이 띠이
가람이 의식을 차렸을 때 들려오는 소리는 기분 나쁜 기계 신호음이었다.
‘뭐지?’
자신은 분명 자신의 호텔 방에서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잃는 순간 침대로 쓰러졌는데 들려오는 낯선 기계음은 불길했다.
그리고 눈을 뜨려고 할 때
“으윽..”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그 이유가 눈에 상당히 많이 낀 눈곱 때문이라는 걸 느끼고 왼손을 들어 왼쪽 눈을 비비려고 했다.
그때
터억
왼손에서 무언가 붙어 있는 듯 팔이 쉽게 올려지지 않았다.
‘도대체 뭐야?’
가람은 그나마 아무런 제지가 되어 있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눈의 눈곱을 떼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병실?”
전생의 강승연의 삶과 지금 김가람의 삶을 통틀어 인연이 없었던 곳은 다름 아닌 병실이었다.
1인실인 듯 주변에 다른 병상은 없었고, 둘러보니 팬들이 보내준 걸로 보이는 수많은 응원의 메시지들이 보였다.
‘도대체 뭐야?’
가람이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리사 뮐러씨?”
가람의 말에 리사 뮐러는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 눈을 비비더니 가람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가람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흐으으윽!! 흐으윽! 일어났어?”
갑자기 자신을 보며 달려들어 우는 리사 뮐러에게 가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그리고 리사 뭘러의 울음소리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김하늘과 눈 밑이 괭한 캐서린 그리고 왠지 모르게 왜소해 보이는 알렉스가 들어왔다.
“가람아!”
셋은 들어오면서 가람의 이름을 불렀고, 가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셋을 보며 물었다.
“저기..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가람의 대답에 캐서린은 안도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알렉스는 그런 캐서린을 챙겼다.
그리고 김하늘은 대답 대신 주치의를 불러 가람의 상태를 파악하게 했다. 그동안 리사 뮐러도 진정하며 옆에서 가람의 진찰을 지켜봤다.
“제가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고요?”
“그래. 임마.. 만약 오늘도 깨어나지 못했다면 뇌사 판정을 받을 뻔했어.”
김하늘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하자, 가람은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람은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보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강승원의 삶에서 병원과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상을 안 당해본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의 몸 상태는 좀 이상했다.
'이 몸이 일주일 동안 운동하지 않은 몸이라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좋은데..'
정말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그때 눈치도 없는 듯 상태창이 메시지를 띄웠다.
[스킬 트리 동기화로 인해 일주일 동안 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컨디션 유지 프로그램이 시작합니다.]
그 말과 함께 몸 스트레칭 관련 프로그램이 눈앞에 나왔다.
가람은 그걸 바로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운동하는 걸 보여준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한소리 들을 걸 알고 있었기에 가람은 프로그램 창을 치웠다.
[오늘 안에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패널티가 부여됩니다.]
협박하듯 상태창은 몸의 컨디션을 올리라고 권유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럼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저 응원의 메시지는 팬들이 보내준 건가요?”
“그래. 임마.”
의사의 체크가 끝난 후 가람은 몸에 달고 있던 기계와 링거를 전부 뺄 수 있었고, 조치가 끝나자마자 캐서린이 다가와 물었다.
“어떤가요? 의사 선생님.”
“보시는 것처럼 건강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몸이니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마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의사가 나간 후 가람은 머쓱한 표정으로 캐서린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렇지 않으니 말이에요.”
그 말에 캐서린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지 못했고, 그 옆에 있던 알렉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가람아. 네가 김서방처럼 가는 줄 알고 너희 엄마는 많이 놀랐단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그 사실을 숨겼던 아버지가 잠을 자다가 다음날 일어나지 못하며 생각지 않게 죽음을 맞이했던 경험이 있는 캐서린과 알렉스였기에 가람이 의식을 잃고, 오늘 일어나지 않는다면 뇌사 판정이라는 말은 상당히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이에 가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말없이 캐서린과 알렉스를 한꺼번에 안아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아요.”
그 말을 들은 캐서린은 김하늘을 보며 살짝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하늘씨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그 말에 김하늘은 캐서린을 보며 캐서린이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는 듯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생각지 않은 분위기에 가람은 캐서린과 알렉스를 봤고, 캐서린은 가람을 다시 침대 쪽에 앉히게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람아.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우린 많은 걸 고민했단다.”
순간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는 말을 듣는 가람은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리고 캐서린은 병실 한쪽에 있는 리사 뮐러의 손을 잡고는 가람에게 다가왔고, 가람의 불길함은 점점 짙어졌다.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리사 뮐러씨가 아니 리사가 너를 너무 걱정했고, 엄마랑 같이 병수발을 했어. 물론 지금 밖에 있는 하늘씨도 같이 했단다.”
“그렇군요.”
“건강했던 네가 이렇게 쓰러진 걸 보고, 솔직히 우리는 네가 축구를 그만두고 리사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축구를 그만두라니요.”
그 말에 알렉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가람아. 솔직히 네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정신을 잃어버린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란다. 몸에 시한폭탄을 넣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육체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이미 벌어둔 돈으로도 남은 평생은 살아갈 수 있어.”
단호한 둘을 보며 가람은 이게 갑자기 왜 이렇게 돌아가나 싶을 정도로 빠른 전개에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리사 뮐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 할아버님.”
순간 리사 뮐러의 입에서 나온 어머님과 할아버님의 말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고, 왜 저런 호칭을 쓰는데 캐서린과 알렉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지 이해를 하지 못 했다.
그런 가람의 기분과 다르게 리사 뮐러는 말을 이어갔다.
“가람 씨가 정신을 차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함께 이 이야기는 진행해야 할 거로 생각해요.”
평소 스미스 패밀리라고 하며 가족 간의 대화에 외부인이 끼어드는 걸 지극히 싫어했던 알렉스였는데 리사 뮐러의 중재 의견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가람은 그게 리사 뮐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걸 뜻하기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그래. 너무 우리 입장만 이야기했구나. 나랑 캐서린은 집에 갔다올 테니 뒤를 부탁하마.”
그 말과 함께 알렉스는 캐서린과 함께 나갔고, 둘이 나가는 순간 김하늘이 들어왔다.
“형. 혹시 방금 어머니가 하신 이야기 미리 들으셨나요?”
아까 캐서린이 김하늘을 대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미리 이야기를 나눴을 거라고 예상한 가람의 말에 김하늘은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이야기는 했지만, 지금은 나도 캐서린 씨의 생각은 이해할 수 있어. 너희 아버지인 의산이 형도 갑자기 떠났는데 너도 그렇게 갑자기 떠난다고 하면 나라도 운동하는 걸 반대하겠지.”
“하지만..”
“그래. 너도 지금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겠지. 자세한 건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자. 원래 계획되어 있던 국가대표 착출은 거절했어.”
“아! 뭐라고요?”
“당연하지. 네가 쓰러져서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었고, 방금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착출은 거절해야지. 축구협회에서도 이미 월드컵 최종 예선은 우즈베키스탄과 경기 결과랑 상관 없이 월드컵 진출은 확정 지은 상황이고 일본과 친선전에 나오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선수의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답변을 들었으니, 너도 우선 지금은 건강 회복에 힘쓰도록 해라.”
“허억.”
사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가람이 선더랜드를 유럽 정상에 올리기 위해서 꼭 영입하고 싶었던 선수가 한국에 있기에 가람은 이번 국가대표 경기가 한국에서 열리고 착출이 될 거라는 소식에 그 선수를 그때 가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결정에 가람은 말을 잃었다. 그렇게 가람이 순간 말을 잇지 못할 때 김하늘은 리사 뮐러를 보며 말했다.
“그럼 리사씨 저도 이제 구단으로 복귀하고 가람이 의식을 차렸다는 기자회견을 해야 하니 뒤를 부탁할게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꼭 가람의 보호자라고 인정하듯이 김하늘도 리사 뮐러에게 말을 남기고 그렇게 떠났고, 가람은 리사 뮐러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순간 적막함이 흐르고, 가람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리사 뮐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너무 당황스럽지? 가족들이나 하늘씨가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니까.”
“솔직히 그렇네요.”
“그래. 지금은 우선 너 몸 회복부터 신경 쓰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중요한 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니깐.”
“그 말이 무슨 말이에요? 제가 리사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건.. 그럼 리사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가람의 말에 리사 뮐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여자가 마음에도 없는 남자의 가짜 애인 행사를 하겠어? 나는 너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걸 표현하기는 힘들었고.”
사실 가람도 리사 뮐러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다. 특히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데이트에서 보여주었던 리사 뮐러의 모습은 충분히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람에게는 연애보다는 선더랜드의 성적과 축구가 더 중요했다. 그렇기에 그런 리사 뮐러의 마음을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체 했다.
“그런데 네가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니깐 너무 가슴이 아팠어. 왜 네가 멀쩡했을 때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까? 너무 나 자신이 후회되고,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네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때는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에 리사 뮐러가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사랑해.”
생각지 않은 리사 뮐러의 말에 가람은 순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 누군가 진심을 담아서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지 머릿속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