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생각지 않은 상황[2]
순간 가람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병실에는 적막이 흘렀고, 리사 뮐러가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너무 갑자기라 당황스럽지.”
“...”
“물론 네가 바로 내 마음을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도 이기적인 내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후회할 일 하나는 없어졌어.”
자신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걸 보고 살짝 실망한 리사 뮐러를 보며 가람은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건 선더랜드를 유럽 정상에 올리는 일이고, 그 일에 연애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강승연의 삶을 통틀어서도 처음으로 이성이 진심이 담겨 따뜻하게 고백한 것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때 언제나 자신이 흥분하면 몸속에서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혔던 그 폭포수 같은 시원함이 이번에는 몸에 따뜻한 열기가 되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절하려고 했던 자신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고, 가람은 솔직하게 말하기를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 연애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사랑을 받기만 했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지금의 말은 가람이 아닌 강승연 시절의 솔직한 심정이었고, 진심이 느껴지는 가람의 말에 리사 뮐러는 귀를 기울여 가람을 봤다.
“이렇게 저를 좋게 생각해주시는 거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축구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건 서로가 서로를 볼 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렇지.”
거절에 가까운 가람의 말에 리사 뮐러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는건 괴로웠다.
그때
“지금 리사 뮐러 씨가 원하시는 대답을 해드리는 건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여태까지 살아가면서 어머니를 제외하고 제일 많이 생각하는 이성은 리사 씨라는 걸요.”
“으응?”
거절인 듯 거절 아닌 듯한 가람의 말에 리사 뮐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리사 뮐러의 모습을 보며 가람은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제 감정이 복잡하네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가 뒤엉키고 혼란스러워요. 그 어떤 인터뷰보다 힘드네요."
"하긴 그렇네. 어떤 난해한 질문에도 베테랑처럼 대답하던 네가 지금은 횡설수설하고 있어."
"그렇죠. 죄송해요. 우선 저한테 시간을 주세요. 물론 그 시간이 지난 후 리사 뮐러 씨가 원하는 대답을 무조건 드리는 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높을 거예요.”
“하하하. 뭐냐? 너 어장 관리 하는 거냐?”
“어장 관리요?”
가람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에 리사 뮐러는 가람이 그런 능숙한 연애기술을 사용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냥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한 것이었다.
실제 가람은 강승연 시절을 포함해서 이렇게 진심이 담긴 사랑 고백을 처음 받아봤기에 그 진심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했는데 저런 반응이 나오자, 당황했다.
그래도 살며시 웃는 리사 뮐러의 표정을 보며 그래도 자신의 진심이 전달된 것 같았다.
남은 시간에 가람은 병원에서 이어진 추가 검사를 받았고, 가람은 검사를 받은 후 가벼운 스트레칭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주어진 상태창의 컨디션 프로그램을 끝낼 수 있었다.
다행히 컨디션 프로그램도 처음부터는 강도 높은 훈련보다는 스트레칭과 요가처럼 몸을 풀 수 있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어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동작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가람은 리사 뮐러와 캐서린 그리고 알렉스의 번갈아 가는 간병을 받으며 누워있던 시간인 일주일 동안 혹시 모르는 질병에 대해 상세한 추가 검사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런던에서 유명한 병원인 세인스 토마스 병원에서도 가람의 질병을 밝혀낼 수 없었고, 결국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받은 후 이상이 없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퇴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퇴원하는 날이 다가왔고, 가람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기자가 가람의 퇴원 날짜에 맞춰 인터뷰하기 위해서 병원으로 찾아와 병원 입구는 사람이 나갈 수 없을 정도 붐비었다.
결국 병원에 동의를 구해 환자 수송전용 헬기를 이용해야 겨우 병원을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하늘은 핸드폰으로 누군가 연락을 취하더니 잘 해결되었는지 웃으며 대답을 했고, 그 모습을 본 가람은 김하늘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누구냐? 헬기 타고 가면 될 것 같아.”
그 말에 가람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지금까지 파파라치들의 행태나 잉글랜드의 극성 미디어들의 취재 행동을 봤을 때 애매한 입장 표명을 보인다면 끝까지 따라갈 것이었다.
이미 자신이 쓰러진 후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에 확실한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런 문제를 확산시킬 뿐이었다.
“형. 그리고 엄마, 외할아버지, 리사 뮐러 씨.”
가람은 자신의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세웠고,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은 캐서린과 알렉스 심지어 김하늘까지 반대했지만, 결국 가람의 말에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자들에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띠리링
- 30분 뒤 병원 앞 정원에서 김가람 선수가 직접 인터뷰를 할 예정입니다. 김가람 선수의 몸 상태를 고려해 짧은 시간 동안 인터뷰가 진행될 것임으로 몇 개의 질문에만 답변을 드릴 것입니다. 중복되지 않은 질문으로 미리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기자들은 화들짝 놀라 문자를 여러 번 확인했고, 심지어 그 문자가 자신뿐 아니라 여러 매체의 다른 기자들에게도 전달된 것을 확인해보고는 그게 거짓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병원의 정문이 열리고 기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어 각 매체에서 대표로 몇 명만 뽑아 병원의 정원으로 가서 취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각 매체의 기자들과 방송 스탭들은 힘을 모아 순식간에 그럴싸한 기자회견장을 만들었고, 정원에 있는 벤치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자, 가람과 김하늘이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플래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련된 벤치에 앉자, 한 기자가 마이크 다발을 건네주었고, 마이크들을 뭉쳐서 만든 흡사 마이너마이트처럼 생긴 마이크를 가람이 웃으며 받았다.
“우선 오랫동안 저를 기다려주신 기자분들에게 인사도 없이 가면 안 될 것 같고, 병원의 입구를 막고 계셔서 다른 환자분들에게 피해가 될 것 같아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럼 인터뷰를 진행해보도록 할까요?”
가람의 인터뷰는 생중계로 TV로 나가기 시작했고,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그런 가람의 인터뷰를 별실의 창문에서 보다가 실제로 나가서 보고 싶어 병원 정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기자회견이 아니라 팬미팅에 가까운 느낌으로 기자회견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와 김가람 선수야!
-가람이형 팬이에요!
-싸인해주세요!
생각지 않게 환자와 병원 사람들이 등장하자, 병원 측에서는 발빠르게 경비원들을 동원해서 라인을 만들어 가람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가람은 여유를 잊지 않고, 팬들을 보며 웃고 손을 들어 화답해주었다.
“우선 시간이 많지 않고, 갑자기 만들어진 기자회견이라 미리 질문지를 받아서 그에 따른 대답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제일 첫 번째 질문인데요. ‘몸상태는 어떤가요’라는 질문이네요. 사실 지금 제 몸상태는 100%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식을 잃은 부분에 대해서는 검사를 했지만,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재활을 통해서 몸 상태를 끌어올릴 예정입니다.”
가람의 대답이 진행되는 동안 시끄러웠던 팬들은 가람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조용해졌고, 들리는 건 기자들의 노트북 타자기 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가지 질문들이 나왔고, 이적설에 대한 질문과 가람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는 건 아니냐는 음모론에 대한 반박 등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에요. ‘혹시 지금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나요’라는 질문이네요. 사실대로 말하면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주변에 있는 팬들은 탄식을 터뜨렸고, 기자들은 그 탄식과 함께 일제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다음 시대의 축구 아이콘이 이제 꽃을 피기 시작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병에 의해 은퇴를 한다는 건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람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설마? 여기까지만 듣고 기사를 쓰시려는 건 아니죠?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보셔야 합니다. 염두에 뒀다는 건 사실이지만 은퇴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병실에 누워서 검사를 받는 동안 가족들이 저를 걱정하고 은퇴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도 그 생각에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제 병실을 가득 메운 팬들의 응원 메시지를 봤고, 저희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건 바로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이요.”
생각지 않은 한국말의 등장에 기자들은 술렁거렸고, 몇몇 한국어를 이해한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남아일언중천금. 남자는 약속한 한마디의 말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직 선더랜들의 팬들에게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선더랜드를 유럽 정상에 올리겠다는 말이죠. 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는 은퇴는 미뤄둘 생각입니다.”
그 말과 함께 팬들은 환호했고, 런던에 있는 병원이었지만, 몇몇 팬은 선더랜드의 팬이었는지 가람의 응원가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선더랜드의 용사! 김가람!! 그 누가 와도!! 이긴다! 김가람!!”
생각지 않은 자신의 응원가가 들려오자, 가람은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그렇게 가람의 기자회견은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이 가람을 순간 당황하게 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애인인 리사 뮐러 씨와 결혼하시나요’라는 질문이네요. 리사는 제가 힘든 병원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옆에서 저를 간호하며 더 긴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누군가 결혼을 한다면 리사가 제일 가까운 상대가 될 것 같네요.”
그 말과 함께 기자들의 플래시는 다시 한번 터져 나왔고,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뷰 동안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다가가서 싸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어준 후 차를 타고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