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필드의 사령관[4]
각성 상태
경기 중에 긴장감과 집중력이 극도로 올라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에 몰입하며 자신의 한계 이상의 경기력과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폭발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승연도 회귀하기 전에 각성 상태를 능숙히 다루며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수많은 회귀를 통해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면서 오히려 몰입해야 하는 각성 상태에 점차 빠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결국 회귀 생활의 마지막에는 각성 상태에 들어간 선수들을 상대로 각성 상태의 특성 및 단점을 노리는 대처법을 통해 경기를 이겨야 했다.
가람은 지난번 상태창의 미션을 통해 각성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여태까지 경기에서는 각성 상태에 들어갈 정도의 긴장감이나 몰입도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 박지석 감독이 없는 상황이라는 긴장감과 이겨야 한다는 몰입감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좋은 컨디션,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며 가람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각성 상태에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이 감각!’
가람은 세르히오 아게로와 해리 케인이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고 공을 잡아 세르히오 아게로 뒤쪽으로 방향을 틀며 여유 있게 빠져나갔다.
그렇게 되자, 세르히오 아게로와 해리 케인은 가람이 없는 공간을 향해 달려든 셈이 되었고, 말도 안 되는 민첩한 동작으로 둘을 단번에 제쳐 버린 가람은 스스로 각성 상태에서 빠져 나왔다.
‘각성 상태 오랜만에 들어왔다고 흥분하면 안 되지.’
각성 상태은 일종의 양날의 검과 같았다.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각성 상태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잠재력까지 폭발시킬 수 있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오는 피로감과 체력 저하에 있었다.
만약 가람이 오랜만에 각성 상태에 들어간 것에 흥분해서 오랫동안 각성 상태를 유지했다면 후반전까지 체력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스스로 각성 상태를 제어하며 빠져 나왔다.
수많은 세월 동안 축구를 하면서 각성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들은 종종 만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각성 상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태였다.
각성 상태라는 게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주 몰입하는 건 더 어렵기 때문이었다.
가람은 수많은 회귀 시간 동안 스스로 능력을 객관화하면서 점점 각성 상태에 몰입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쌓아온 각성 상태의 경험은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능숙하게 각성 상태를 다룰 수 있었다.
그렇게 가람은 해리 케인을 가볍게 제쳐낸 후 자신의 장기인 속도를 살려 바로 맨시티 진영으로 파고들었다.
“김가람 선수! 방금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요? 엄청난 개인기 아니 민첩한 동작으로 해리 케인 선수를 제치고 맨시티 진영으로 파고듭니다.”
마틴 테일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람은 속도를 올려 패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 모습을 본 오늘 경기의 해설인 개리 리네커가 입을 열었다.
“아. 김가람 선수 다소 흥분한 것 같습니다. 아직 선더랜드의 다른 선수들이 같이 공격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번 시즌에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기회를 만들어주는 김가람 선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대로 맨시티 선수들에게 둘러싸여서 자멸할 수도 있습니다.”
개리 리네커의 말은 예언이라도 된 듯 맨시티는 일부러 가람에게 공간을 내어줘서 안쪽으로 가람이 쉽게 파고들게 만들었다. 가람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케빈 데브라이너와 필 포든 그리고 파울로 디발라까지 가람을 호위하듯 감싸게 되었다.
그리고 가람이 더 패널티 에어리어 인근에 접근하자, 케빈 데브리이너와 필 포든이 앞에서 멈추며 가람을 제동 걸려고 했고, 파울로 디발라는 가람이 약간이라도 속도를 늦춘다면 뒤에서 협력 수비를 할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이것 보세요. 김가람 선수 너무 흥분했어요. 이렇게 세 명이 에워싸면 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평소의 가람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마크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달려든다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패스를 통해 이 위기를 벗어나는 선택을 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랐다.
가람은 아까 스스로 각성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다시 한번 각성 상태에 들어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걸 시험할 생각으로 이렇게 무모한 플레이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상태창의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각성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또다시 다른 선수들이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였다. 가람은 케빈 데브라이너와 필 포든이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자신의 앞 공간을 막으려고 할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아슬아슬하게 뛰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둘 사이의 작은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둘을 돌파하는 순간 가람은 바로 각성 상태에서 빠져 나왔다.
“어.. 이게 무슨..”
자신이 중계 중이라는 걸 잊어버린 듯 개리 리네커는 놀라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고, 그 옆에 있는 마틴 테일러는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
“김가람! 김가람 선수!! 이걸 돌파합니다. 거의 케빈 데브라이너 선수와 필 포든 선수의 수비에 완벽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틈을 파고듭니다. 엄청난 속도입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경기를 봤지만 오늘 김가람 선수의 속도는 미쳤습니다.”
오랫동안 중계를 해온 마틴 테일러도 가람의 슈퍼 플레이에 흥분한 듯 약간의 비속어를 섞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람의 슈퍼 플레이에 제일 당황한 건 맨시티의 수비 라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지금처럼 이렇게 쉽게 미드필더 라인이 뚫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오늘 경기를 앞두고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수많은 시뮬레이션 통해서 가람을 대비하여 준비했다.
가람의 빠른 발을 대비하기 위해 지역 내에 뛰어난 육상 선수까지 동원해서 드리블이 아닌 그 선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고 그를 방해할 수 있는 선수들로 미드필더을 구성했고, 수많은 훈련 속에서 속도와 수비 센스 게다가 공격적인 능력 등 모든 면을 고려해서 구성된 미드필더 진이 케빈 데브라이너와 필 포든이었다.
물론 둘은 다른 후보군을 비해서 수비 능력은 부족했지만, 둘이 호흡을 통해 가람이 드리블 칠 공간을 선점해 막아주기만 하면 뒤에 다가오는 파울로 디발라의 협력 수비로 시간을 끌고 그 후에는 해리 케인까지 가담하며 완벽하게 가람의 드리블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가람의 드리블을 저지한 후 공까지 뺏을 수 있다면 그 후에 케빈 데브라이너나 필 포든의 뛰어난 패스 능력으로 바로 역습을 나서서 골을 만들 계획도 준비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가람의 슈퍼 플레이로 인해 무산되어 버렸다.
게임 속에 나오는 스턴이라는 상태 이상에 걸린 듯 순간 맨시티 수비 라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렸고, 가람은 그사이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 번 해볼까?’
가람은 어정쩡한 수비 라인을 보고, 자신은 패널티 에어리어 라인 근처에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있기에 중거리 슈팅을 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중거리 슈팅이 아니라 슈팅을 차는 순간 각성 상태에 돌입했다.
강승연 시절에 점차 각성 상태에 들어가는 게 힘들어질 때 짧은 순간에 각성 상태에 돌입하면 그 순간을 어떻게든 이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기술이 있었다. 즉 원래 각성 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선수들이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가람을 볼 때 가람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람이 자신은 이 각성 상태에 빠지면 천천히 움직일 수 있게 되며, 자신의 몸 상태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고 몸의 방향이나 힘이 효과적으로 전달 될 수 있도록 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걸 가람은 각성 상태의 집중 모드라고 지칭했다.
아무리 가람이 슈팅을 잘 차고, 슈팅 능력이 100이라고 해도 언제나 완벽한 슈팅을 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각성 상태의 집중 모드에 들어가면 완벽하게 슈팅을 찰 수 있었다.
뻐어어어어엉!!!!
가람이 각성 상태의 집중 모드에서 오랜만에 모든 힘과 집중을 다 해서 찬 공은 흡사 공이 터진 건 아닐까 할 정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고, 공은 맨시티의 중앙 수비수 후벵 디아스와 존 스톤스 사이를 지나간 후 왼쪽 골대 상단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그리고 뒤쪽에서 멍때리고 있는 수비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질책하고 있는 에데르송 모라에스는 가람이 슈팅 찬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소리만 질렀다.
촤르르르르~~
철썩!!
가람은 골을 넣는 순간 평소 하던 만세 세레머니가 아니라 제 자리에서 양팔을 크게 펼치고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꼭 자신의 골에 완벽히 만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선더랜드의 서포터즈들은 그 모습에 환호성을 보냈고, 사진 기자들은 말도 안 되는 슈퍼 플레이의 마무리를 골로 보여준 가람의 모습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고오오오오올~ 오오오올!! 전반 2분 김가람 선수!! 골망을 찢어버릴 듯 엄청난 슈팅으로 골을 넣어버립니다. 맨시티 선수들은 골을 먹히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저런 골을 먹힌다면 사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합니다. 이건 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런 골을.. 저렇게 쉽게 넣는 거죠? 그리고 이런 플레이 지난 시즌에는 많이 보여주었지만, 이번 시즌에는 골을 직접 넣기보다는 플레이 메이킹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으로서 살짝 아쉬웠거든요. 지난 시즌의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는 김가람 선수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마틴 테일러의 말과 함께 골로 이어지는 장면이 리플레이로 나왔고, 워낙 짧은 시간에 골이 터진 상황이라 골 장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가람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공을 받은 순간부터 조금 빠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개리 리네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의 단 한 장면에 한 골이지만, 남은 90분의 경기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많은 감독이나 축구 관계자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이건 한 선수가 팀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저 또한 팀 스포츠인 축구에서 선수 한 명보다는 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김가람 선수의 오늘 저 컨디션이라면 마라도나나 펠레처럼 팀보다 위대했다고 평가 받은 선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건 엄청난 평가인 것 같은데요. 과연 개리 리네커 위원님의 말씀대로 될 것인지 기대하면서 경기를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중계진의 멘트가 끝나는 순간 펩 과르디 올라는 살짝 멍한 표정으로 가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