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유배지의 아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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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보다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은 잴 수도 없어 오히려 더 길게
느껴지고,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
어야 하기에 천년보다 더 길다. 감옥에 갇힌 후로 나날은 늘 이렇게
흘러갔다.
지겹고, 외롭고, 비참하다.
작은 발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자박 자박 자박--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간수가 아침 식사를 준 것 같다. 지독하게
허기짐에도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마로 환한 불빛이
닿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도 날카롭게 파고
들어왔다.
에드먼드는 결국에는 눈을 떠야 했다.
순간에, 엄청난 빛이 쏟아져 그는 다시 눈을 꽉 감아야 했다. 빛이
뒤로 물러나는 듯 했다. 다시 어둠이 닿고, 빛에도 눈이 익숙해지자
에드먼드는 눈을 깜빡였다.
앞에, 환한 촛불이 타고 있었다. 고인 듯 정지한 어둠 속에서 환하
게 타오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너머에 마른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소녀
라 생각한 것은 그저 긴 머리와 옷 때문이었을 뿐이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안가는, 각 성별의 영역에서 약간씩 어긋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옷은 분명 치마였고, 머리도 노끈 같은 것으로
질끈 묶어 감아올리고 있었다. 때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했
을 테지만, 동굴 속의 어둠은 그 아이에게서 그런 지저분한 얼룩들
을 모두 지워버렸다. 대신에 크고 선명한 눈동자와 눈썹, 콧날, 입
술이 조각처럼 딱딱하게 드러나 있었다. 예쁜 얼굴이기는 했다. 그
러나 아이의 얼굴은 보통사람과는 아주 미묘하게 다른 먼 나라의 내
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동굴 속의 도깨비나 요정처럼, 그렇게 이
아이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꿈이라
기에는 차갑고, 현실이라기에는 말이 안 된다.
“유릭.”
그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에드먼드는 이 아이가 전날 오후에 보았던
그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날에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 넘게 가리고 있어서 몰랐던 것이
다.
“유릭. 보통은 유리라고 불러요.”
그리고는 유릭은 창살 하나만을 사이에 둔 감방 바닥에 앉았다. 에드
먼드는 보답을 하기로 했다.
“에드먼드 란셀. 내 이름이지.”
유릭은 에드먼드의 이 빠진 밥그릇을 집어 창살까지 끌고 가더니, 그
위에 빵 부스러기 몇 개와 산딸기를 놓았다. 에드먼드는 그것이 통
성명에 대한, 이제 막 싹 트기 시작한 신뢰-아니, 차라리 호기심에
가깝지만-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먼드는 그 산딸기를 집에 입에 가져갔다. 햇살과, 바람과, 물의
향기가 그 안에 눈물겹도록 달콤하게 배어 있었다. 몇 년 만 일까?
하지만 행복했던 옛 기억이 그러하듯, 너무도 오랜만인 듯 했다.
천년은 지난 것 같다.
천년?
에드먼드는 쿡 웃었다.
아직 그 정도는 살지도 못했지. 이백년이라면 모를까. 아니, 그것도
조금 모자랄 것 같다.
유릭은 앞의 죄수를 보고 있었다. 웅크리고 숨을 흐릿하게 몰아쉬고
있는 그 죄수는, 어제 그러했듯 지금도 꿈쩍 하지 않고 있었다.
“네 아버지냐?”
방금 전에 맛본 달콤함을 아쉬워하며 에드먼드가 그리 물었다.
유릭이 불을 껐다. 달콤함이 혀끝을 떠나듯, 빛 역시 떠나고 다시 어
둠이 쏟아 붇듯이 다가왔다. 방금 전보다 더욱 깜깜해 진 듯 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어슴푸레하게 윤곽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희게
번득거리는 아이의 눈동자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저씨만큼이나 꼼짝도 못하죠. 아니, 아저씨는 조금 낫군요. 아저씨
는 적어도 말은 하니까.”
“어머니는?”
“엄마는 여기 오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를 맡아줄 사람도 없었
고, 그래야 하는 사람은 맡아 주려 하지도 않았죠. 고아원은 싫었
어요. 분명 동생과 헤어질 테니까. 그래서 동생이랑 같이 따라왔어요.”
“동생도 있니?”
“저보다 두 살 어려요. 남자애죠.”
전날 에드먼드는 이 꼬마에게 나쁜 아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 꼬마는
‘나쁜 아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지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고작 열
살 정도 되어 보였으나, 사춘기가 지나치게 일찍 온 아이처럼 미묘
해 보인다.
“예전부터 아팠는데, 이제는 거의 꼼짝도 못하게 되었죠. 아버지가 편
찮으시니 병을 치료할 때 까지만 밖에서 지내게 해 달라고 했는데,
안 된데요.”
“너희 아버지는 어쩌다 들어온 거냐?”
“마법사는 아니었어요. 어디서 무얼 가르쳤다고는 하는데, 그건 정확
하게 기억 안나요. 그런데 어느 날 가슴에 십자가를 그린 남자들이
찾아와 아버지를 끌고 갔어요.”
그리고 아이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려 보였다.
에드먼드 자신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 역시 약혼식날에 철십자 기사
단에게 체포되어 이 바닥에 처박혀 있는 것이다.
행여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게 될까 하여 에드먼드는 귀를 기울
였지만 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기대를
거두기로 했다. 5년 전이라면 이 아이는 고작 대 여섯 살 정도
되었을 테고, 그 정도 어린 아이가 갑작스레 벌어지는 일의 정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민하지만 철저하게 자기중
심적인 것이 아이다.
“아저씨는?”
“너랑 내가 언제 만났더라?”
“그렇다면 내일 말하지요. 오늘은 서로 알게 된지 하루가 된 사이지
만, 내일이면 이틀이 된 사이가 될 테고, 그 다음날이면 사흘이 된
사이가 될 테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러다 들키면 얼씬도 못
하게 될 걸.”
“아이는 뭘 하든 괜찮고, 무엇을 하든 안 되죠.”
에드먼드는 피식 웃었다. 참 오랜만에 웃는 다고 생각하며.
“역시 나쁜 아이군.”
역시, 이 꼬마 아이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제 이 아이와 비슷
한 나이가 되었을 밀드레드의 딸이 생각난다. 물론 그 계집아이는
진짜 못생겼지만, 그 영악하고 보기 싫은 계집애와 이 아이는 어딘
지 닮은 구석이 있다.
아이의 눈은 예민하고, 그런 만큼 놀랍도록 예리하게 어른들의 단면
을 바라본다. 당사자들은 낯붉히고 그 외의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말들을, 순진한 아이는 천진하고 무지하게 말하지만, 이런
아이들은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고 잔인하게 말한다. 자신이 상대의 무
엇을 말하는 지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이래서 아이들이 싫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싫고, 영악한 아이들은 더욱 싫다. 그들은
‘책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 해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자신이 남들에게 입히는 상처는 참으로 당연하
게 여기며,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남들이 자
신에게 입히는 상처는 세계 최고의 죄악이라도 되는 듯이 구는 것이
아이인 법이다.
유릭이 말했다.
“말 안 해도 되요. 한꺼번에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은 믿지 말
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그 중 대부분이 거짓말이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 억울하다고 말이야.”
“그러는 사람 대부분이 거짓말이에요. 아세요? 이 곳으로 오는 죄수
들은 모두 자기가 억울하다고 말하고,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건 대
부분 거짓말이죠. 특히 오늘 처음 만난 꼬마 아이에게 호소하는 사람
의 말은 더더욱 안 믿어요.”
“정말 나쁜 아이구나.”
유릭은 에드먼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으니, 매
정하고 교활한 검은 고양이 같아 보였다. 촛불이 다시 켜졌다. 그
금빛 환한 빛은, 여전히 눈부시게 튀어나온 부분들을 듬뿍 적시고
그 반대편의 어둠은 더욱 진하게 보이게 했다.
유릭은 감방의 철창문 옆에 늘어진 끈을 힘껏 당겼다. 멀리서 방울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에 육중한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릭을 데리고 가기 위해 간수가 오는 것이다. 그러나 유릭은 간수
가 열어주지 않아도 철문을 열었다. 에드먼드가 빤히 바라보자, 유
릭은 주머니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곳 열쇠는 다 가지고 있어요. 바보 간수는 모르지만.”
순간에 에드먼드는 자신의 눈에 갈망이 반짝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릭이 웃었다.
“그렇게 봐 봤자에요. 아저씨는 줘봤자 도망칠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힘줄이 끊긴 에드먼드의 다리를 가리켰다. 역시나, 나쁜 아이
다. 살의로 눈이 뜨끈해진다. 아이가 감방을 나가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다시 세상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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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열린우리당 160석 이상이면 4연참, 200석 이상이면 10연참.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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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2장 어둠이 고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