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어둠이 고인 곳#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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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간수가 열어놓은 문을 작은 쥐처럼 쪼르르 빠져나갔다.
한 시간가량 길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초는 비싸서 아껴야
하니 어슴푸레한 윤곽만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유릭은 오랫동안 기어올라 마침내 입구에 도착했다. 문을 여니 그 입
구에 서 있는 머리 없는 석상이 그를 반겼다. 스며든 먼지 낀 햇살이
모래 빛 상 위로 흐르고, 그 단단한 팔과 다리는 푸릇한 그늘 속
에 묻혀 있다. 유릭은 그 석상을 만지고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
누렇게 기울어져 가는 햇살이건만 퍼붓듯 얼굴 위로 쏟아진다. 가늘
게 뜬 눈으로도, 더러운 얼굴위로도, 남루한 옷으로도, 햇살은 공평
하게 쏟아졌다. 그리고 계단이 나른하게 향하는 끝에는 먼 옛날 이
섬에 살았던 마법사 여왕이 쌓은 신의 제단, 그러나 그 왕이 멸망
한 뒤에는 더럽혀 지고 깨어져 감옥이 되어 버린 사원이 있었다.
간혹 햇살이 그 왼편을 비추면, 거의 모든 부분이 긁히고 깨어져
나갔지만 가파른 벼랑 쪽으로 난 벽이기에 무사한 그림들이 나타나고는 한다.
유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친 벽에 등을 붙이고는 벽면을 보았다.
역시나, 그 위에 금빛 젖은 자주색 선으로 그려진 그림이 드러나
있었다. 처음 보는 글자들과 이교의 신들, 그들이 뒤엉켜서 서쪽으
로 솟구칠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며 저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간혹 저 그림 안에 담겨진 무언가가 있어, 그가 불러 낼 수 있기를
바라 본 적도 있다. 소망은 언제나 하나였으며,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허망한 망상밖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것은 위안이며 희망이었지만, 동시에 자조와 절망이기도 했다.
유릭은 터벅터벅 걸어가며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 버렸다. 저녁 바람
이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고는 사라졌다.
계단을 중간쯤 올라왔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버렸다. 긴 그림자마저
도 사라지고, 청회색 창백한 엷은 어둠이 스물 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얗던 하늘이 청남색 어둠에 젖어 들어가며 하얀 별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늦은 봄이라 밤은 그다지 차지는 않았다.
드디어 성 앞에 둘러쳐진 방책에 도착해, 그 틈으로 난 구멍으로 유
형지 안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오두막들이 즐비했고, 그 숲 같은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
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유릭의 친구들이
유릭이 지나가자 손을 흔들었다. 유릭은 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와 동생인 가토가 머무는 시제의 관저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사제는 사형수나 다름없는 죄수 옆에 붙어
있는 두 아이를 더 없이 가엾어 보였다.
그리어슨 사제는, 올해 쉰 살인 그는 이 죄수들과 삶에 내몰려 본국
을 떠나온 노동자들을 교화시키겠다는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다지
현실성은 없는 결심을 하고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두 아이를
거두는 것이야 말로 사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제의 관저라 해서 굉장한 것은 전혀 없었다. 사령관은 이 옛 이교
도의 성 옆에 붙어 있는 작은 2층 건물을 사제에게 주었다. 의사이
기도 한 그리어슨 사제인지라, 그는 1층은 병원으로 쓰고 2층을 사저
로 썼다. 그리고 유릭이 머무는 곳은 지붕 바로 아래인 다락방이었
다. 둘이서 손바닥만한 방을 쓰는 데는 별 불만이 없다. 아니, 그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일일 정도였다. 대부분의 아이들
은 좁은 오두막 안에서 가족도 아닌 사람들과 열명 넘게 같이 살고 있으니.
관저로 돌아 온 유릭은 2층으로 단숨에 달려가 사제의 서재로 갔다.
그리어슨 사제에게 돌아왔다 보고를 하고,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전집 중 세 번째 책을 빼었다.
그리어슨 사제가 자그마한 안경을 밀어 오리고는 물었다.
“아버지는 아직 편찮으시니?”
“전혀 나아지지 않으세요.”
“언젠가 내가 왕진을 갈 수 있도록 사령관에게 허락을 받아야겠구
나.”
“감사합니다.”
유릭은 그리 말하고는 책을 안고 다락방으로 향했다. 동생 가토가 자
그만 공책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유릭이 오자 벌떡 일어나 달려
왔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인 유릭과는 달리, 아버지를 더 닮아 옅
은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아니, 아예 닮지 않은 것에
더 가깝다. 그 누구도 이 두 아이를 형제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
로 다르다.
“아버지는 괜찮으셔?”
“응.”
“저녁은?”
“생각 없어.”
유릭은 시큰둥하게 답하고는 침대로 갔다.
가토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눈치를 살피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릭은 책을 펼쳤다. 역사전집으로 팔콘 대제와 와스테 윌린 그 다음
시대의 책이었다. 벌써 다섯 번째 읽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 정도 읽으니 대강 무슨 뜻 인지 알게 되었다.
“니나가, 아버지 옆방에 새로운 죄수가 왔다더라.”
“응.”
“아버지랑 같은 죄로 온 거야?”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년이면 나오실 테지만, 그 사람은 훨씬 더 오래 있어야
돼. 더 무거운 죄를 진 거야.”
거짓말이다. 아버지가 언제 나올 지도 모르고, 그 사람이 언제까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년이 되면 가토에게는 또 내년이라 말
해야지.
유릭은 그람노스 제위기간의 붉은 인간 사냥에 대해 읽어 내려갔다.
정령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정령사들이 불러낸 맹목적이며 난폭
하며 사악한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 내려갔다. 봉마석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다. 그런데 가토가 슬쩍 물었다.
“유리, 학교가 뭐야?”
“응?”
“니나가 그랬어. 섬을 나가면 귀족 소녀들과 함께 학교에 갈 거래.”
유릭은 웃었다. 어렸을 때 기숙학교라는 곳에 간 적이 있기는 했다.
그 보다 두 어 살 정도 많은 아이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단
하루 만에 도망 나와 버렸다. 기억나는 건 얼굴을 짓누르던 베게와,
거꾸로 매달렸을 때의 공포와, 옷이 벗겨진 채 방 밖으로 내 던져
졌을 질 때의 분노뿐이다. 사감 선생이 달려 왔을 때는 정말 죽고 싶
었고, 그녀가 ‘관례’라 말하며 무시했을 때는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들이 수업에 나간 사이에 짐을 챙겨
들고 도망 나와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유모는 기겁하고, 숙부는 걱
정하고, 아버지는 분노했지만,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가라고 해. 굉장히 무서운 곳이니까.”
“왜 무서워?”
“자기와 다르면 다 잡아먹어 버리거든.”
유릭은 퉁명스레 말하고는 다시 책의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때
가토가 이상하다는 듯 유릭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해. 목이 고장 난 것 같아.”
“감기야.”
그리고 유릭은 눈길을 내려 책을 보았다. 그림에는 매서운 눈매를 가
진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름은 루스카브라고 했었다.
와스테 윌린을 죽인 자이자, 팔콘 력 72년에 일어난 반란의 주동
자이며, 아직도 피 흐르는 상처인 양 역사에 남아 있는 매혹적이며
잔혹한 전설.
그는 잡히지 않고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체포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아는 것은 그 정도뿐이다.
아버지가 대체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어떤 일
을 해서 그러는 건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아버지의 서재에 천
정을 뚫을 듯 쌓여있는 책과 서류가 그날 모두 압수 되에 사라져 버
렸고, 아버지의 팔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유릭은 졸리기 시작했다. 잠이 들어가는데, 오늘 본 그 남자의 모습
이 스물 스물 기어올랐다. 그 남자도 아버지와 같은 죄일까? 그렇
다면 물어 볼까? 아니, 물어 본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정직하
게 말 해 줄까? 아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 먼
지 더미와 함께 정지한 유형지, 새벽에 광산과 농장으로 향하는
유형수들의 긴 행렬들 밖에 없는 저주스런 땅에서, 자신이 원해서 하
는 일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니까.
문득 바람 소리가 들렸다. 황야를 휩쓸고 지나가는 건조하고 메마른
바람 소리가. 그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처음 기숙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감 선생의 외면과 함께 알몸뚱이였
던 그가 쭈그리고 앉아 들었던 바람 소리 같은 그런 소리가. 그것은
숨소리 같기도 하고, 속삭임 소리 같기도 하고, 노호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잠 속으로 빠져들며 유릭은 꿈을 꾸었다.
검은 색의 교복을 다시 입고 있었고, 턱에는 빨간 넥타이가 매어져
있었다. 사방에서 검은 손아귀들이 달려들어 유릭의 목을 조이고
검은 머리를 당겼다. 다급하게 복도 끝의 문을 열자, 그곳에 그를
등지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의 주변에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두루마리와 서류더미가 장
작처럼 쌓여 있다. 그리고 회오리가 불어와 그것들을 모두 휩쓸어
하늘 높이 높이 아주 높이 치솟게 해 버렸다.
거칠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현란하고 현란한 책장
의 펄럭임 뿐.
유릭은 어느 새 커튼이 단단히 닫힌 방 안에 서 있었다. 방안은 컴컴
했고, 시트만이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가가고 싶지는 않
았다. 그 시트에 흥건하게 배어나온 핏물이 보인다. 훌쩍거리는 소리
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모였던가, 외할머니였던가. 시트 옆에는
자그마한 천 뭉치가 놓여 있었다. 둘둘 말아놓은 그것에도 피가 배
어 있었다.
그 순간 유릭은 잠에서 깼다.
머리맡에 검은 쥐 같은 것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유릭이 눈을 뜨자
후닥닥 도망쳐 버렸다. 옆에는 가토가 유릭의 손을 꼭 움켜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다시 바람소리가 우웅- 하고 들렸다. 천장으로 뚫린 검푸른 하늘에
는 하얗게 빛나는 별들이 있었고, 다시 바람소리가 들리며 창문이
덜커덕 흔들렸다.
유릭은 동생의 작고 따뜻한 몸을 꽉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이마와
목에 겁에 질린 아이가 의례히 그러하듯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고,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외로운 밤이었다. 지독히도.
-나쁜 아이구나.
그 죄수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유릭은 귀를 꽉 틀어막고는
이를 악물었다.
-나쁜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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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152석..... 나름대로 만족 중입니다.
하지만 전여오크가 국회의원이라니...............
이라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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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