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어둠 속의 거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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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죄수가 도착하고 잠시 뒤에 이민자들 까지 도착하며 순식간에
다섯 달이 지나갔다.
우기가 지나가며, 산과 들판은 온통 녹색으로 물들었지만 광부들도
농장 일꾼들도 그들을 감독하는 농장주들과 광산주들과 그들 덕에
살찌고 기름져 가는 콧수염 잘 기른 사령관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며칠 동안 새로 온 죄수들을 구경하러 다니다가 그들이 자
기네들의 아버지 어머니와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지겨워했다. 행여나 괴롭힐 만한 아이들이 있을까 했지만 이번에는
같이 놀만한 아이들조차 없었다. 새로 온 사람들은 모두들 젊고,
젊기에 희망을 가지고 이 먼 파난 섬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
고 너무도 당연하게도 파격적으로 달라진 환경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고, 그 중 절반이 기침과 고열을 동반하는 풍토병으로 앓
아누워 버렸다. 지역 유일의 의사인 그리어슨 사제는 바빠졌고, 유
일한 조수(간호사일지도 모르겠다)인 유릭 역시 바빠졌다. 유릭은
신전의 뜰까지 덮어 버린 병자들을 간호해야 했고, 그 친구들은 너
무나 당연하게도 유릭을 도와주지 않았다(조금도). 가토마저도 슬슬
눈치를 보다가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바빠져도 유릭은 매일 매일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죄수 에드
먼드는 꽤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죄수들이나 광부들, 농장
일꾼들이 허풍 섞어 하는 거짓말임에 뻔한 이야기들과는 완전히
틀렸다. 아이들이 열망어린 목소리로 풀어내는 한심한 이야기와도
틀렸다.
그가 속했던 세계는 온통 황토 빛인 유릭의 원래 세계와는 완전히 다
른 종류였다. 그곳에는 푸른 바다가 있고, 울창한 숲이 있고, 새빨간
열매를 단 과수원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릭이 종이의 지면
으로밖에 접하지 못했던 세계에서 온 사자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이국의 숲에서 잡혀온 낯선 짐승같은 그런 것인지
도 모른다.
“오늘도 아버지를 뵈러 가는 거냐.”
그리어슨 사제가 나갈 준비를 하는 유릭에게 말했다.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다그치듯 말했다.
“네- 하고 답해야지.”
“네.”
유릭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어슨 사제가
흰 눈썹을 찌푸렸다.
“감기라도 걸린 거냐? 목소리가 이상하구나.”
“아, 예.”
유릭을 보는 사제의 회색 눈동자 안에 안개 같은 것이 차올랐다. 유
릭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금방 알아챘다. 그는 거의 회색이
되어 버린 사제복 위에 손을 문지르고는 말했다.
“오늘 저녁에 돌아오면 이야기 하자꾸나. 아마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
가 될 것 같으니 진지하게 오려무나.”
유릭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키가 상당히 커져버렸고, 또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그리고 턱과 목의 모양 역시 차츰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길-
유릭은 가슴을 움켜 쥘 뻔한 것을 간신히 면하며 사제의 눈을 피하듯
관저를 나섰다. 그리고 역시나 성의 옆으로 난 길을 빠져나가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으로 향했다.
다시 길고 긴 통로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간수가 사라지는 소리를 문
너머로 확인한 후에 재빨리 감옥으로 가 아버지의 철창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누워 있었고 유릭이 오자 손끝을 툭툭 움직이고 눈
을 깜빡였을 뿐이다. 유릭은 늘 하는 일을 했다. 죽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바닥에 눕혔다.
아버지의 생명은 가느다란 실 끝 같은 줄을 붙들고 지겹도록 길게 이
어지고 있었다. 사제가 쥐어주는 약은 그를 완쾌시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루하루 생명이 이어지도록 하고는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먼드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언제나 그대로인 것 같구나.”
“악화되시지도 않으니 다행이죠.”
역시, 그 목소리는 지독하게 쉬어 있었다. 감기라도 걸린 듯 몇 갈래
로 갈라져 있었다. 고장 난 피리소리 같았다. 유릭은 슬쩍 에드먼
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너, 아버지가 나을 거라 믿니?”
“네. 아니, 반드시 나아야 해요. 여기서 나가야 하니까.”
그리고 유릭은 아버지의 가슴까지 담요를 끌어 올렸다.
그리 늙은 나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 살은 되어 보였다. 유
릭은 그 아버지를 보고 건너편의 에드먼드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을 나갔다. 그리고 세 개의 감방 문을 돌아, 뒤편으로
나 있는 에드먼드의 감방 문으로 갔다. 숫자를 잘 세어 잘못 온 것
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한 후에 유릭은 그 문을 열었다. 에드먼드가
몸을 뒤척였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일어날 수 없는 몸이다.
유릭은 다시 한번,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그 역시 예전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건강하고 긴 다리로 훌쩍
훌쩍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던 날들이 있을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는 운동을 좋아했다. 학자였지만, 그래도 아침 마다
달리는 것을 그 누구보다 좋아했다. 아침 햇살을 좋아하고 사과를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였다. 적어도 유릭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아
버지는 그랬다.
유릭은 에드먼드 옆에 풀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세요?”
“뭐지?”
“군인이 되지 말라, 라고 하셨어요.”
에드먼드가 유릭을 물끄러미 보았다. 유릭은 그 역시 사제가 발견한
것을 눈치 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편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이민자들이건 죄수의 아들들이건 간에, 일곱
살 넘은 아이가 3년 이상 섬에 지내게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죠. 1만 칼브란를 내지 못하면 그 군대 생활을 마치기 전까지는
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어요.”
“그렇다면.... 네 남동생이 문제겠구나.”
유릭은 피식 웃었다. 역시, 아직도 모르는 건가. 역시나 바보다, 이
아저씨는. 잘난 체 궁상은 혼자서 다 떨면서 정작 너무나 뻔한 사
실조차 모르다니.
“아저씨, 부자라고 했지요? 1만 칼브란 정도의 돈은 별거 아닐 만큼.”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시 부자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에드먼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렇다면, 나가게 해 줄 테니...... 돈 줘요.”
“응?”
유릭은 오랫동안 감추어 두었던 열쇠 꾸러미를 흔들었다. 그것들이
짤랑이며, 좁은 두개의 감방을 울렸다.
“나가게 해 주겠다고요. 나는 이 지하 감옥의 구석구석, 아무도 모르
는 곳 까지 모두 알아요. 그 돈을 모두 다 준다고 약속 해 준다면
나가게 해 줄 게요.”
에드먼드는 다리를 흔들었다.
“나갈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마음먹기 나름이죠.”
유릭은 재빨리 열쇠를 감추어 버렸다. 그것이 사라지자, 에드먼드는
굶주린 눈앞에서 잘 차려진 식탁이 한꺼번에 사라진 듯한 눈초리로
주머니 안에 꽂힌 유릭의 손을 바라보았다.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나가요. 내가 다시는 여기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버리기 전에, 그리고 슬픔 때문에 당신 따위는 잊어버리
기도 전에. 그리고 제가 아저씨를 불쌍하게 여기는 동안에.”
에드먼드는 쿡 웃었다.
“내가 불쌍하니?”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우리처럼,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보다
굉장하게 살다가 다 빼앗기고 바닥까지 내쳐진 사람이 몇 배는 더
비참하다고요.”
“웬 일이냐. 네가 그렇게 착한 생각도 다 하고.”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에드도 아버지나 가토
처럼 내가 보살피는 사람이잖아요. 또, 돌봐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고요. 저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나한테 먹이
를 받아먹는 새들도 다 좋아해요.”
에드먼드는 이번에는 크게 웃어젖혔다. 좁은 감방 안에 그 목소리는
굽이치고 깨어지고 흔들리며 울렸다. 감방이 무너질 듯 했다. 유릭은
그가 자신에 대해 모르듯, 자신 역시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그 역시 아버지가 그러하듯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갇혀 있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유일한
이유였을 뿐이다.
“고맙구나. 그래, 너는 내 은인이다. 진짜 은인이야.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나에게 다가왔으니! 좋아, 약속하지. 만약에
네가 정말 이곳에서 나를 나가게 해 준다면, 그 때는 내 모든 재산
을 네게 주겠다. 굉장하게 키워줄게. 그리고 브란 카스톨의 황녀조
차 한숨 쉴 정도의 숙녀로 키워주지. 약속하마.”
유릭은 순간에 그가 불쌍해 미칠 뻔 했다. 유릭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그제야 에드먼드는 자신이 아주 어마어마하게 웃기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는 도무지 모르
고 있었다.
“바보 아저씨, 아직도 상황 파악 못하고 있네요.”
그제야 에드먼드는 유릭의 목소리가 갈라진 것이 감기 때문이 아니라
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유릭은 이제 목소리를 조심조심 내지 않고
있었으니.
“설마, 너?”
유릭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에드먼드는 유릭
이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지도 깨달은 듯 했다. 어둠 속이라 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너, 너--!?”
“아버지 뜻대로 군인이 되지 않으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요. 얼
마 전 까지만 해도 그냥 얼굴 가리고 조심만 하면 괜찮았는데...
이제는 얼굴도 그렇고, 몸집도 그렇고, 목소리마저도 이렇게 되니
더 숨길 수 없게 되었죠. 그렇다고 1년 안에 가토와 제가 모두 이
섬에서 나갈 수 있게 될 리 없지요.”
이제 유릭은 목소리를 감추지도 않고 있었다. 완전히 남자 아이 목소
리였다.
“어쨌건 약속해 줘요. 돈 줘요. 돈 주면, 나도 아저씨를 빼 내 줄 테
니.”
에드먼드는 얼결에 답했다.
“야, 약속....하마.”
“물론 숙녀로 만들어준다 어쩌고 하는 약속은 안 지켜도 되요. 저도,
아무리 치마 입는 게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2년만 지나면 그 꼴이
범죄 수준이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잘 알거든요.”
“.....너, 말투도 변하는 것 같다.”
유릭은 이 남자가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심하다.
“여자애처럼 보이려고 꽤 노력했으니까요. 예전에 연극에서 본 대로
하는 건데....... 그리 나쁘지는 않았나 봐요. 아저씨 같은 어른 눈도
제법 속였으니까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애들한테는 다들 관심 없어요. 특히나 여자아이라면, 아무리 하는 짓
이 이상하다 할지라도 ‘확인하게 옷 벗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죠. 안
그래요?”
에드먼드는 슬슬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쨌건 덕택에 무지하게 재미있었어요. 여자 꼬실 때도 그러세요?
무진장 느끼했는데.”
“네가 남자라서 그런 거다....”
“아뇨, 제가 생각하기에는 당신 약혼녀가 당신을 동정했던 것 같아요.
맙소사, 다른 여자들이 피해입지 않게 하려면 내가 이 남자를 구제해
주어야겠구나, 하고 말이죠.”
“저기, 유릭.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너, 진짜 몇 살이니?”
“열한 살 맞아요.”
“그럼....그, 이름은...... 정말 유릭...인 거냐?”
“네, 제 이름이 유릭인 건 맞아요. 애칭은 유리고, 그냥 유리라 불러
도 되요. 완전한 이름은 안 가르쳐 주겠어요. 아버지가, 언제나 죄
수에게는 절대 원래 이름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하셨지요.”
“으흠, 우리가 친구 아니었나?”
그러자 유릭은 그를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키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지금 저를 친구로 인정하는 건가요? 열 살짜리 꼬마한테, 마흔 살짜
리 아저씨가?”
“그래. 그럼 여태까지 너하고 나하고 나누었던 그 긴긴 대화는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약간의 인간적 신뢰도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
각하니? 그리고 나는 마흔 살 아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우정의 시작이라기보다는 변태 아저씨가 꼬
마 계집아이 꼬시는 것 같았는데. 제가 남자 아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단번에 우정으로 변하네요. 그리고 아저씨, 그럼 쉰 살인 건가요?”
“아니다.”
“아, 네. 그런 셈 치죠. 어쨌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으니까. 쉰이든
어떻고 예순이면 또 어때요.”
그리고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죽 웃는 꼴을 보니, 남자 아이라고 확실히 알게 된 지금 에드먼드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다리가 그 꼴이 된 것이 참으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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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정형근 당선이라.............. ;;
그래도 영남권, 분명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군요. 다음 번에야 말로
눈에 뜨이는 변화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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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