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8화 (8/174)

제7편

어둠 속의 거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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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남자 아이였구나.”

그리어슨 사제의 말에 유릭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는 감출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절망적일 줄 알았는데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네.”

그리어슨 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위를 꺼내 오더니, 유릭의 머리

를 자르기 시작했다.

서툴게나마 머리를 다 깎자, 사제들이 입는 길고 검은 옷을 가지고

와 유릭에게 내밀었다.

“내일 까지는 이것을 입고 있어라.”

유릭은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목덜미가 드러나니 시원했지

만, 그만큼 내일부터 어떻게 될지 막막해지기 시작한다. 유릭이 옷을

다 갈아입고 바닥의 머리카락마저 다 치우자, 그리어슨 사제는 안

경 너머의 회색 눈을 그윽하게 내리깔며 말했다.

“그리 입으니 여태까지 아무 의심 없이 너를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던

게 우스울 지경이구나. 완전 사내아이로군. 키도 크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왜 계집아이 행세를 했는지 솔직하게 말해다오.”

“아버지가 군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고, 여기는 남자 아이라면 무조건

군인이 되어야 하니까요.”

“황제 폐하와 의회에 봉사하는 길이고, 군대에 다녀오면 아무리 죄수

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곧 들통 날 편법 보다는 차라리 군대에 다녀오는 것을 권

하겠다.”

“아버지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아버지는 죄인이다. 그러니, 꼭 아버지 말이 옳다고 따를 수만은

없다.”

유릭은 울컥 화가 났다.

“누명이에요.”

“너는 어려.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는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

지만, 잘못 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네게 화가 조금 나는 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거두고 너를

사랑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속이다니 말이야.”

이번에는 할 말이 없었다. 유릭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또, 아버지가 언제나 사제나 높은 마법사들을 보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 안 된다 늘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 말을 들었던 적은 거의 없는데, 아버지가 말하지 못하게

되자 예전에 했던 말을 하나하나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지키고 있

으니 말이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여태까지 봐 온 너는 영특하고, 어

른스럽고, 또 성실한 아이다. 네가 아버지와 동생에게 얼마나 극진한

지도 알고 있고, 또 그 때문에 나를 속였다는 것에 실망하지도 크

게 화내지도 않는다.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유릭은 어둠이 고인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 쥐구멍 속에서 생쥐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네가 사내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여태까지 너에 대해

생각해 두었던 것을 어느 정도 수정할 수밖에 없구나. 앞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해라. 조만간 네 생활이 변할 테니.... 이만 돌

아가거라.”

“네.”

유릭은 얌전히 답한 뒤에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소매가 긴 사제복은

그가 입고 있던 치마보다 오히려 더 길었다.

다락방으로 돌아가자 동생 가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리, 어떻게 된 거야?”

“다시 남자애로 돌아가야 돼. 너도 알지?”

유릭은 가토의 금발 더벅머리를 흐트러뜨려 버리고는 침대로 터벅터

벅 걸어갔다.

가토가 말했다.

“이제부터 유리가 형이라고 모두에게 말해도 되는 거야?”

“응.”

“잘 됐다! 그럼 말야, 쵸한테 한번만 더 때리면 우리 형이 흠씬 두들

겨 놓을 거라고 말해도 되는 거지?”

“하지 마. 나, 그 녀석 상대할 자신 없어.”

“하지만 유리는 싸움 잘하잖아. 그 배에서, 그러니까.........그 배에서

유리보다 큰 형들하고도 잘 싸웠잖아.”

이곳으로 올 때, 그 배의 선원들과 붙어 싸웠던 그 때 이야기다. 하

지만 유릭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덤볐으니까. 하지만 쵸같은 녀석에게는 죽을 각오로 덤

빌 필요가 없어. 아까워.”

유릭은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역시나,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리니 기

분이 이상했다. 유릭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다시 황야를 떠도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쿠웅- 쿠웅- 쿠웅-- 이번

에는 발자국 소리처럼 들렸다. 유릭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치 누군가가 오는 듯 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밤이 되면 그런

소리들이 들린다. 작렬하는 햇살이 부유하는 먼지 속으로 파고드는

낮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세상이 어둠에 까맣게 물들면

그 소리들이 들린다. 이상한 소리들, 말을 걸고 싶어 안달하는

듯한 기이한 소리들이.

유릭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늘어진 긴 그림자가 외풍이 스며들 때마다 흔들렸다. 구석에는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스며 나오듯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가 슬쩍 들여다 볼 때의 그림자 같은 모양새로 얼

룩져 있었고, 문득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오싹했다. 그것이 슬며시

움직이며 부를 것만 같았다. 머리를 깎고, 남자아이로 돌아가고, 유

릭 크로반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순간에, 그것 역시 오랫동안 놓쳤

던 유릭을 찾아내어 먼 곳에서 찾아온 것만 같았다.

유릭은 이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차갑고 거친 이불이 볼을 쓸

었다. 갑자기 두려워져서, 그는 몸을 웅크리고는 숨을 죽였다. 옆에서

가토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그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유릭의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그 이상한 것들이, 어깨까지 닿던 그 어둡고 차가운 것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가토가 말했다.

“아버지는 언제 나으시는 거야?”

“조금 지나면 돼.”

나도 몰라, 그런 건.

“.........이제 아버지 얼굴도 기억 안나. 나도 이제 튼튼해졌으니까, 그

러니까 다음에는 내가 가면 안 될까?”

“너 혼자서는 못 가.”

“그렇다고 우리 둘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갔다 올게.”

유릭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서글픔이다.

“......삼촌이 편지를 보냈잖아. 삼촌이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

니까..... 아버지도 감옥에서 풀려나실 거야.”

그럴 리 없어. 삼촌도 지금 잡혀갈지 모르는 걸. 삼촌은 아닌 척 하

지만 나는 알 수 있어. 봉투마다 뜯겨 나가있고, 그 위에 검사완료,

라는 도장들이 찍혀 있지. 어떤 것은 석 달이나 전 것이 뒤바뀌어

오기도 해. 어쩌면 삼촌도 감옥에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리, 꼭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밤에라도 당장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정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유릭은 베게에 얼굴을 푹 묻으며

그 느낌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별 소용없었다.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 부드러운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유릭은

참 빨리 배우는 구나.’ 하고 말하던 그 때의 아버지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다시는 그럴 수 있을까? 정말, 다시 아버지가 말을 찾고 이 감옥을

떠나, 이 섬을 떠나, 예전에 살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번

쩍거리는 금시계를 선물해 주던 삼촌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륵 밀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너는 나쁜 아이니까.

에드먼드는 기척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밤이고 낮인지 전혀 모르는 나날이 계속되다 보

니, 이제는 밤에 잠을 자는 건지 낮에 자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 박쥐처럼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에드먼드는 옆의 감방을

바라보았다.

창살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반쯤 일어나 있었다. 유릭의 아버지였다.

이 안에 들어온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지만, 정말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라 에드먼드는 흥미를 가지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뒤집

어 질 것 같은 기침이 터졌다. 그리고 끄윽- 끄윽- 거칠게 숨 들이

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먼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을 걸고는 싶었지만 그가 말

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냥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부스스한 윤곽뿐이었다. 에드먼

드는 그런 상태라도 눈여겨보았다. 나른하고 긴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제야 에드먼드는 그가 분명 ‘살아 있는 사람’ 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나 유릭이 그를 보살피

고는 있었지만, 에드먼드는 그를 장작 비슷한 존재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바람소리 비슷한 것이 났다. 귀를 기울인 에드먼드는 그 소리가 그가

힘껏 말을 하려 하기 위해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드

먼드는 더욱 바짝 창살로 다가가, 볼이 차가운 창살에 눌릴 정도로

들이댔다.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는 더욱 거세어 지더니, 드디어

말 비슷한 소리를 토해냈다.

“...봤소.”

그리고 그 말이 터지는 순간에 남자는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왔다.

“아들에게 잘 해주어서......고맙소.”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혀는..... 잘리지 않았소...... 그냥..... 그래, 사술을 못 쓰게 한다고 그

러며.....”

에드먼드는 대강 짐작했다. 에드먼드가 이 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팔

과 다리의 힘줄이 잘렸듯이 이 남자는 그 혀에 어떤 조치를 한 것

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그들이 말했지.... 마지막 말은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마지

막 말’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이 터졌다. 그 소리가 어딘지 웃음소리 같았다.

“마지막 말을 해야 할 때가 되면.....그러면 말을 하게 될 거라고....말

이오......”

그것은 무기한으로 형벌을 가할 때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다. 평생 말

을 못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으로 말을 남겨야 할 순간이 오면

그 형벌의 마법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

남자가 말했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소.....하지만..... 아무도 없

는 것 보다는 낫군.”

“하십시오.”

에드먼드는 유릭이 했던 말을 떠 올렸다. 학자인 그는 자신이 연구하

는 것이 금지된 선에 닿았기에 이곳으로 끌려온 듯 했다. 그 연구가

무엇일까. 유릭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꼬마 역

시 모르는 것이리라.

“유리에게.....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지 마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에게...... 당신 세계를 갈망하도록....하지는 말란 말이오.”

에드먼드는 힘없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사실은 힘껏 이마를 문질

러 보고 싶었지만, 그로써는 그것이 한계였다. 남자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을........당신의 등을 갈망하게 하지 마시오.......”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을 하시는 군요.”

후우-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쉽게 취하지. 쉽게.....원하지. 하지만..... 그 만큼, 무엇을 대

가로 치러야 하는지.....어른보다 더욱 몰라........그러니.....취하게 하지

마시오......부디.....”

“나는 모릅니다.”

“하지 마시오...... 그리 된다면, 당신은...... 훗날 진심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오....장담하지.”

남자가 더욱 힘주어 말했다.

“분명 후회할 거요.”

그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뚜렷했다. 에드먼드는 빙그레 웃으며 고

개를 저었다. 알아보았을까? 그러나 그저 나른한 한숨만이 들릴 뿐

이다.

“.....당신이 택할 바...... 그러나.....아들에게, 유리에게 전해 주시

오....... 힘껏, 힘껏-- 그 무엇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라고......사

랑한다고.”

“그 말만은 분명히 전해주겠소.”

“고맙....소........”

숨소리는 잦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차가운 돌 벽에 등을 기대어 그 소리를 들었다. 잠이라도 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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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등이라....................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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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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