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9화 (9/174)

제8편

어둠 속의 거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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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왔어요.”

유릭이 나타나자, 역시나 간수들은 당장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러나 유릭이 아주 예전에 받은 통행증을 들어 보이자 눈들을 휘둥

그레 떴다. 유릭이 말했다.

“저에요, 유릭.”

유릭과는 얼굴이 마르고 닳도록 보아온 간수가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된 거냐, 너?”

“남자였는데요.”

“정말?”

“몰랐던 게 바보죠.”

유릭은 그리 퉁명스레 말하고는 문 앞에 섰다. 간수는 전혀 믿지 못

하겠다는 눈치였지만 통행증도 진짜고 목소리도 어딘지 비슷하기에

막지는 않았다. 유릭은 인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

사제복을 입고 있었기에 빨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흐르

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 금방 지하 바닥에 도착했다. 역시나 비

슷하게 놀라는 간수에게 비슷하게 설명한 뒤에 지하 동굴로 들어갔

다. 차가운 냉기 흐르는 어둠을 더듬어 늘 들어가는 아버지의 감방

문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키고, 새로 가지고 온 담요를 펼친 후에 아버지가 원래 덮고 자

는 담요를 당겼다. 그러나 그는 손끝에 닿는 아버지의 느낌이 틀리

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도 나무토막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간

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 그대로 돌이 굴러 떨어

지는 듯 무겁고 차갑기만 했다.

유릭은 급히 아버지를 돌려 눕혔다. 불빛에 아버지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 목과 이마의 온기를 거듭 확인한 후에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유릭은 숨이 턱 막혔다. 이가 덜덜 떨리고, 분명 잘못 찾아온 것만

같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 여기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아닐 거라는 생각이 온 몸을 압박한다. 잘못 들

어왔다. 그래, 잘못 들어왔어.

“어제 돌아가셨다.”

유릭은 고개를 휙 돌렸다. 삼켜진 듯한 캄캄한 어둠 속에 에드먼드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유언도 남겼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힘껏.... 그 무엇도 포기하지 말

고 살아가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아버지는... 그 형리가 분명 말을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풀린다. 어젯밤에 풀렸고, 그 옆에는 나 밖에

없었어.”

순간 유릭은 이를 뿌득 물었다.

“말 도 안돼요...... 아니, 안 돼요! 아직 삼촌이 아무 것도 못 했단 말

이에요! 누명을 벗기 전 까지는.... 그 전까지는 돌아가시면 안 된

다고요! 지금 돌아가시면.....지금 돌아가시면.....나는 어쩌라고! 나는

어쩌라고.....여기서 어쩌라고!”

그러나 결국에는 유릭은 오열을 토해냈다.

눈물이 작은 볼을 타고 턱에 맺히다 뚝뚝 떨어져, 숨을 거둔 가엾은

죄수의 이마와 턱을 툭툭 적셨다. 에드먼드는 떨고 있는 유릭의 어

깨에 손을 얹었다. 유릭은 누군가의 품 안에서 울고 싶었지만 철창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떨며 겁먹은

새끼 짐승처럼 우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제는......너와 나도 마지막이 되겠구나.”

그리고 에드먼드는 힘없이 웃었다.

“그 동안 고마웠다. 또, 아버지 일은......... 안됐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지만, 그래도......그래, 나도 슬프구나. 정말 이것 밖에는 해 줄

수 없어.”

이거였나? 어제 그토록 잠 못 들게 그를 괴롭히던 어두운 그림자들이

말하는 것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그랬듯, 아버지가 잡혀가기 전

날에 그랬듯이.

다시 눈물이 솟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던 분노와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 아버지의 발

목을 묶은 강철 족쇄와, 더욱 단단한 문과, 겹겹이 된 철대문과 그

위로 길게 뻗은 계단이 증오스러워졌다. 아버지의 낡은 책상과,

그 위에 쌓여 있던 매혹적인 문서들과, 그것들을 휩쓸어 집어삼켜

버리고는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자들을 향한 증오 역시 뜨

겁게, 뜨겁게 치솟아 오른다.

“아버지는 아무 죄도 없어요.”

“믿는다.”

에드먼드는 빙그레 웃었다. 유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친구라고 했죠?”

“그래.”

유릭도 웃었다. 더 크게 웃고 싶었지만, 앞에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

의 시체를 앞에 두고서는 도저히 그리할 수 없었다. 슬프기 보다는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자꾸 자꾸 화가 났다.

“아버지가 언제나 친구를 도우라고 하셨어요.”

“말은 고맙구나.”

“내일이면 아버지 시신을 치울 거에요. 무덤도 없을 테죠. 그들은 지

하의 지하바닥으로 아버지를 끌고 가, 그곳에 내팽개쳐 두고는 올

라갈 거에요. 가 본 적 있어요. 검은 물이 고여 있고, 그 주변에 아버

지 같은 사람들의 해골들이 널브러져 있었어요. 추워요, 그곳은. 이

곳 보다 몇 배로 더 춥죠.....한 시간도 참기 어려울 거에요. 죽은 사

람조차 벌떡 일어날 정도니까.....”

목소리가 점점 뚜렷해진다. 방금 전에 억눌려 떨리고 젖어 있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차

가워진다. 머릿속도 갑자기 텅 비어 버린 것만 같다.

유릭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마른 손, 갈라지고 터

진 손, 예전에는 참 곱고 가늘기만 했던 손이 이제는 나무 정령의

손가락들 마냥 거칠기만 하다. 그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엎드린 그의 눈앞에, 목에 걸린 주머니가 보였다. 긴 끈에 묶인 그

주머니는 조약돌마냥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었다.

유릭은 두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요. 나만 알아요.”

“가르쳐 주어서 고맙구나.”

유릭은 에드먼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불빛 속에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떠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어두운 눈동자는 빛을 잃은 채 유릭을 보고 있다. 유릭은 철창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는 책이 아주 많았어요. 정말 많았죠. 그 중에 붉은 테가 쳐진

책이 잔뜩 있었는데, 왼쪽에 있는 것부터 차례차례 읽으면 오른 쪽에

있는 것은 조금 더 어렵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중에, 파난

섬의 풀 이야기도 있었죠.”

유릭은 목에 걸린 주머니를 끌러 에드먼드에게 건네주었다. 에드먼드

가 손을 내밀지 않자, 유릭은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꼭 다섯 알만 먹어야 해요. 그 이상 먹으면 죽고, 그 이하로 먹으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을 거에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즉각

효과가 없으면 한 알 더 먹어 봐요.”

에드먼드는 그것을 주워 열어보았다. 엄지손가락만한 주머니 안에는

자그마한 환 같은 것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 안나요.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죽은 듯 만들어

준댔어요. 맞는 지도 모르고 사람에게도 정말 그런 효과가 있는 지도

몰라요. 하지만 쥐에게 먹여 봤을 때는 효과가 있었어요. 오늘

저녁밥을 주러 간수가 문을 열면, 그 즉시 먹어요. 어차피 아저씨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테니, 그렇게 시간을 맞추는 편이

낫겠지요. 아저씨의 식사가 남아 있으면 그들은 아저씨를 들여다

보고는 아저씨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에요. 확인이 끝나면 아

저씨를 들어다가 그 바닥의 바닥에 처박아 버릴 거에요. 그곳에서

기다려요. 내가 내려갈게요.”

에드먼드는 손끝으로 환약을 굴려보았다. 고작 열 한살짜리 꼬마 아

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믿을 수도 없었다.

“왜 이런 걸 주는 거냐.”

“대신이에요. 아저씨라도 나가요. 당장! 당장 이 토굴에서 나가 버리

란 말이에요.”

성난 늑대 새끼 같은 울부짖음이다. 에드먼드는 차분한 눈길로 유릭

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믿으란 거냐.”

“어차피 믿든 안 믿든 매 한 가지에요. 하지만... 그나마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내일 단 하루뿐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간수가 알게 되면 저는 다시는 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 올 수 없게

되니까.”

“네 아버지에 대해 대체 언제 말할 생각이지?”

“내일 모레.”

에드먼드는 다시 손바닥 위의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지만 너를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 그러니까.......나는

걷지 못해.”

“걸을 필요 없어요. 기어가야 하니까.”

“그리고 그 뒤에는? 그냥 널브러져 자유롭게 죽으라는 말이냐?”

“그 다음은 알아서 해요. 저는 거기까지만 도와줄 수 있고, 그 다음은

아저씨가 할 바죠. 알아서 해요. 이 지하 감옥에서 계속 살던가, 아

니면 내가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감옥 밖으로 한번이라도 나가던가!”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캄캄한 감방을 둘러보다가, 촛불

의 불을 훅하고 불어 껐다. 어둠이 순식간에 들이 닥쳐왔다.

“니콜라스라고 했어요.”

유릭이 말했다.

“니콜라스 추기경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를 가둔 사람이. 형리가 말해

줬어요. 만약 아저씨가 나간다면,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 걸을 수도

있게 되고, 예전처럼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을 죽여줘요...... 어차

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가 아버지의 무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를 죽여줘요. 처음

부터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몇 달은 옆에 있었으니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거라 믿어요. 동정하라고도, 이해해

달라고도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그것 보다는 고통스럽게 죽여주면

되요. 내가 원하는 건 그것 뿐이에요.”

그리고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오래 생각한 거냐.”

“3년이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창살 가까이 볼을 들이댔다.

“유리, 가까이 와라.”

유릭이 다가갔다.

“앉아라. 지금은 내가 일어날 수 없는 몸이니까.”

유릭은 그렇게 했다. 에드먼드는 두 팔을 뻗어, 창살 너머의 그의 몸

을 안아 주었다. 유릭이 그렇듯, 그의 팔 역시 장작개비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누군가에게 감사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 누군가를 동정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밖에 나가면, 아마도 이런

짓을 한 내가 꽤나 창피할 거다. 나는 냉혹한 것을 장기로 알고

살아왔고, 그것을 꽤 자랑스러워했으니까...... 누군가가 이것을 알게

되거나 한다면 꽤 부끄러울 테지. 하지만 유릭, 지금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겠다.....지금은......”

유릭이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타는 듯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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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에드는 대략 올드보이 형상.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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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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