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지하의 보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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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유릭은 세심하기는 해서,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두터운 가죽으로 된 무릎 보호대로 에드먼드의
무릎을 감싼 후에 단단히 묶었다. 그 덕에 기어가는 데 무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손바닥은 아팠다. 너무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묶여 있던 그의 손은 개구리의 발바닥보다 무르고 얇아져 있
었다. 서너 번 정도 쉬었을까, 싶었다. 유릭은 호주머니에서 손바
닥만한 회중시계를 꺼내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시계만이 희미하게 빛난다.
“숙부님이 내가 다섯 살 때 주신 선물이에요. 금으로 된 거라고, 아마
도 내가 신사가 되어도 절대 몸에서 떼지 않을 거라고 하셨죠.”
“숙부하고 친했니?”
“네. 아버지하고 더 오래 있었어요. 숙부는....... 사고 이후에 저를 무
척이나 좋아해 주셨죠. 어차피 아버지는 바빠서 저하고 잘 있지도
않았거든요...... 유모는 싫어했죠. 아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밤낮 간섭한다고. 숙부가 저를 맡아 주려 했지만, 정부에서 금지했어
요. 숙부가 데리러 온 날에, 나는 도로 끌려가 고아원으로 가던가
아버지를 따라가던가 해야 했죠.”
유릭이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여태까지 듣던 알게 모르게
빈정대는 듯한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유릭이 아이 같아
보였다.
그리고 손바닥이 까지고 물집이 잡히고 물집마저 터져 쓰라릴 때 즈
음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몇 시간이나 온 거지?”
“세 시간. 저 혼자 오면 한 시간 이면 오는데.......늦었네요.”
그리 말하고는 유릭은 빨리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유릭의
기척이 사라졌다. 에드먼드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이 지독하게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급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어둠 저편에서 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먼드는 주춤했지만, 곧
힘껏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갑자기 손바닥 아래의
바닥이 푹 꺼진 듯 사라져 버렸다. 에드먼드는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꽤
깊어서,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세게 바닥에 부딪혔다.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유릭은 다시 촛불을 켰다.
어둠이 가시며, 방금 전의 무덤의 공기보다 훨씬 더 상쾌하고 따스한
공기가 가득 찬 공간을 비추었다. 그곳은 그리 넓지는 않은 곳이
었다. 둥글게 파낸 듯한 굴이었고, 그 중앙에는 유릭이 말한 ‘검은 물
이 고인 곳’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굉장하지는 않았다. 그저
썩은 물이 고인 듯 얕고 작았다. 유릭은 촛농이 덕지덕지 붙어
울퉁불퉁한 초를 그 바닥의 움푹 팬 곳에 꽂아 넣었다. 빛은 둥근
토굴 구석구석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그 안을 바라보던 에
드먼드는, 그제야 그곳이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곳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냐.”
“동굴의 끝. 3년 전에 발견했죠. 굉장하죠?”
둥근 천장은 매끄럽고 평평했고, 그 위에는 성좌 그림 같은 것이 같
은 것이 수많은 글자들과 함께 가득 쓰여 있었다. 둥근 원도 그려져
있었고, 동심원이 몇 개나 그 안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원
을 따라, 역시나 글자들이 쓰여 있다.
에드먼드는 검은 물이 고인 곳을 보았다. 그 검은 물 위로, 그 글자
들이 반사되며 미묘하게 반짝 거렸다. 그리고 검은 물 근처에 놓인
제단처럼 평평한 돌 위에는 하얀 돌로 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저건 뭐지?”
“나도 몰라요. 가루 같은 것이 들어 있던데........... 잘 모르겠어요. 희
고....잘고....뭐, 모래 같았어요.”
그리고 유릭은 쭈그려 앉았다.
에드먼드는 다리를 움직여 보고, 그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그러자
유릭이 칼을 내밀었다.
“머리랑 수염 좀 깎아요. 덤불이 자란 것 같네.”
그제야 에드먼드는 자신이 몇 년 간 머리도 수염도 깎지 못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에드먼드는 유릭이 건네준 칼로 머리를 자르려 했지만
손에 힘이 없어 칼마저도 미끄러졌다. 유릭은 한숨을 내 쉬고는,
에드먼드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염을 석둑 석둑 끊어냈다. 양털
깎는 듯 성의 없었지만, 머리도 턱도 금세 시원해졌다. 자르는 것
을 마치자, 유릭은 품 안에서 주먹만한 주머니를 꺼내어 던졌다.
“이거 아저씨가 가져요.”
에드먼드는 그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오래된 금화 열 몇 개와, 금목
걸이 같은 것이 서너 개 들어 있었다. 그리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이
유형지를 나가기 위해 배를 타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이건-”
“그 무덤에서 찾아낸 거, 전부에요. 가토랑 집에 돌아갈 때 쓰려고 했
는데..... 이제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걸로 떠나요.”
에드먼드는 피식 웃었다. 걷지도 못하는 남자가 돈이 있다고 해서 무
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에드먼드는 감사했다. 모든 것이
다 송두리째 사라진 지금, 이 한줌의 도움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돌아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간수에게 말해야겠지요. 그
리고....... 아버지의 시신도 그 추운 무덤에 묻힐 테고, 난...........
아마도 고아원일 걸요. 어차피 나는 식민 유형지 법에 묶여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마셀 항이나 시곤 시로 갔으면 좋겠어
요. 그곳은 그래도 큰 도시니까.”
“숙부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니?”
“연락해야죠. 어찌 하실 지는 모르지만- 아니 해도 소용없을 거에요.
어차피 숙부도 아버지와 비슷한 혐의를 받고 있으니 나랑 같이 살
수는 없어요......숙부는 내가 모르는 줄 아는데, 사실.....알아요. 숙부
도 출국 금지 당했어요. 아버지가 파난 형을 받은 그날에 말이죠.”
체념하는 것 같았다. 좋은 버릇은 아니다. 아이는 늘 어른이 무언가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꼬마의 경우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유릭이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다시는 저 곳으로 오지 못할 테지만, 그 반대
편으로는 오겠어요. 이틀이나 사흘 뒤면 올 수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먹을 것을 좀 가지고 올게요.”
“그리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걸을 수 없잖아.”
“모르죠. 다시 한번 서 봐요. 이곳이 기적이 샘솟는 곳이라서, 저 검
은 물을 먹으면 아저씨도 다시 걸을 수 있게 될지 누가 알아요.”
그리고 유리는 검은 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굴속을 흐르
는 광물이 녹아 그리 검게 변한 것 같았다. 유릭은 눈길을 거두고는
말했다.
“초는 두 개를 가지고 왔으니까, 그건 아저씨가 써요. 여기, 성냥이
있으니 빛을 아끼려면 아끼세요.... 그럼 나중에 봐요.”
“고맙다.”
유릭은 다시 에드먼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불빛이 일렁대는 가운데, 그 푸른 눈동자 안에서 붉은 빛 같은 것이
스며 나왔다가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 유릭을 바라보던 에드먼드는 순간 흠칫 놀랐다. 그러나 다시 바
라보았을 때는 그저 푸른 눈동자였을 뿐이다. 촛불의 불빛 때문에
잘못 본 것일까... 잘 모르겠다.
유릭이 말했다.
“갈게요. 먹을 건 두고 가는데, 아껴 먹어요. 제가 정말 이틀 뒤에 올
지 일주일 뒤에 올지 모르니까..... 돌아왔을 때 굶어 죽어 있는 걸
보면 되게 허탈할 것 같네요. 어쨌든 나중에 봐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은 잽싸게 방금 전 그들이 들어왔
던 작은 굴로 들어가더니 곧 사라졌다. 그의 기척 소리가 사라지자,
에드먼드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바닥에 몸을 눕혔다. 굴을 기
어 오는 내내 올라오기만 했으니, 이곳은 꽤 높은 곳일 것이다. 어
쩌면 지상에 가까울 지도 모르지.
에드먼드는 누운 채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빛이 번지는 그곳에, 이백
여년 전에 이 성에 살았던 마법사와 그 일족들이 그려 놓은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마법사라면 참 많이도 봤지. 너무나, 너무나 많이.
에드먼드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친 듯이 크게 크게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 어떤 마법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한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을 당장에 해 줄 수는 없다. 흑마법도, 백마법도, 그
어떤 마법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를 도운 것은, 그 토굴 감옥
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오던 더럽고 마른 꼬맹이였을 뿐이다. 마법
중에 가장 무서운 마법, 그 누구도 모르는 마법은 바로 이것이 아니
겠는가. 운명이 자아내는, 기가 막힌 우연이 만들어 내는 기적의 마법!
에드먼드는 검은 물을 보았다.
유릭이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알아요?
그래, 혹시 모르지. 에드먼드는 그 검은 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
게 이렇게 물이 고여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에드먼드는 손을 뻗어
검은 물 속에 담갔다. 그러나 물은 생각보다 깊어, 팔목을 넘어
섰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닿지 않았다. 팔을 빼는 것이 좋을 것 같
아서 에드먼드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저 바닥에서 무언가
가 손끝을 스쳐지나갔다. 수초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안에도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순간이었다. 저 바닥에서 무언가가 다가와, 에드먼드의 손을 움켜잡
았다.
지독하게 차가운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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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으음, 며칠 놀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쓰던지 올리던지
할 것 같군요. --;
p.s 하필 거기서 오타가;; (민망!)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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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