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지하의 보물#3
**************************************************************
에드먼드는 손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당길수록 그 손은 점점 더 강
하게 에드먼드를 끌어당겼다. 에드먼드는 당황하며 천장을 바라보
았다.
빛나는 별이 박힌 천장의 성좌들이 차가운 빛을 발하며 에드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이를 악물고 더욱 힘껏 팔을 당겼다.
그러나 팔을 자르지 않는 한 절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놔!”
그러자, 검은 물 속에서 희끄무레 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에드먼드는 눈을 크게 떴다. 숨이 덜컥 멈추는 기분이다. 검은 물 속
에서 붉은 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리고 마치 피가 번지듯이, 처
음에는 작다가 점점 더 크게 번져들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더욱
필사적으로 팔을 당겼다. 붉은 빛이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유릭을 원망했다. 빌어먹을 꼬마 녀석, 이런 곳에 옮겨다
놨으면 뭘 하지 말라고 경고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이잇.....!”
이를 거세게 물고 팔을 당기는 순간에, 드디어 붉은 눈동자가 수면까
지 가까이 왔다. 에드먼드는 더욱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리고 물
속에서 희고 가는 것이 휙 솟구쳐 올라 에드먼드의 목을 휘감았다.
그것은 검은 물을 뚝뚝 흘리는 희고 가는 팔이었다. 에드먼드는 기겁
했다. 그 팔은, 인간의 팔이라고는 절대 불가능한 길이였다. 고무로
늘인 듯이 무시무시하게 길었다.
“놔......악!”
그러나 그 팔은 단단한 사슬처럼 에드먼드의 목을 단단히 잡더니, 먹
이를 잡은 모래괴물처럼 에드먼드를 휙 잡아당겼다. 차가운 물이
머리로 쏟아졌다. 그의 몸은 그대로 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차가
운 물은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가 발끝까지 삼켜 버렸다. 숨을 참을
틈도 없었다. 검은 물이 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맙소사-
이렇게 순식간에, 이렇게 어이없는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 지하 감옥을 벗어난 바로 그 순간에 이런 꼴을 당하다니.
에드먼드의 크게 떠진 눈에, 바닥에서 출렁이는 붉은 물결이 보였다.
검은 물 속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신기했지만, 보고 있
다는 것만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 물결 속에 달빛처럼 반짝이는 것들
이 같이 출렁이고 있다가, 에드먼드를 바라보더니 미끄러지듯 빠
져나갔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그 팔에 끌려, 이 검은 늪 안으로 잠
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를 당겼던 흰 팔은 이제 가슴을 끌어안고 있었
다. 귀 너머로 흰 머리카락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가 돌아보니,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은 달빛으로 빚은 듯 흰 여
인이었다. 희게 벗은 몸으로, 긴 머리카락을 너울거리며 그녀는 긴
꼬리를 출렁이며 바닥으로, 바닥으로 그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아름
답지는 않았다. 코는 길고 납작했으며 눈은 잠자리만큼이나 커다랗다.
마령인가? 에드먼드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바닥을 바라보았다. 거대
한 붉은 물결은 여전히 출렁이고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것
들이 그 주변에서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방금 전에 부유하
는 그 빛 덩어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물밑 깊은 곳에 가라앉은 금화
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그 때 손등이 화끈거려왔다. 에드먼드는 손등을 앞으로 가져갔다. 그
의 손은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그 이상한 남
자가 손등위에 덕지 덕지 그려 놓은 그림들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피가 뿜어 오르는 듯. 그리고 지독한 통증. 그것을 보자, 그의 등
을 붙잡고 있던 여인이 갑자기 흠칫 놀란 듯 몸을 떨었다. 에드먼
드를 놓더니 바닥의 붉은 물결을 향해 물살이 미끄러지듯 빠르게 내
려갔다.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놓아준 에드먼드는 다시
가볍게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둥실 둥실 떠올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그 바닥에 누
워 있는 붉은 빛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생물이었다. 출렁이는 것은, 그것이
숨을 내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빛의 정체는, 그 주변을 떠도는 기
생생물 같은 것들 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그 생물을 보살피듯 그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몸은 더욱 더 둥실 둥실 떠오르
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형체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목은 길고, 몸은 컸다. 꼬리도 있고......
그리고 저 끝에서, 금빛 같은 것이 반짝였고.............
순간, 그의 뒷덜미를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움켜잡아 당겼다. 에드먼
드는 순식간에 끌어 당겨져,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쏟아지자 그는 기도를 틀어막았던 검은 물을 쏟아냈다.
“쿨럭 쿨럭!”
그를 잡아당긴 손은 에드먼드를 끌어 당겼다. 에드먼드는 주변을 더
듬다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그가 에드먼드가 나오는 것을 도와주
었다. 에드먼드는 필사적으로 기어 나와, 발끝까지 차갑고 이상한
물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비명 소리 듣고 왔어요. 바보 아저씨. 뭐 하는 거에요?”
유릭이었다. 유릭은 에드먼드의 몸을 흠뻑 적신 검은 물을 보고는 혀
를 찼다.
“주의해 주는 걸 잊었다. 그 바닥에 이상한 것이 자고 있어요. 나도
한번 당할 뻔 했는데.”
“쿨럭--! 그런데 왜 나를............쿨럭!”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죠....... 하지만 어쨌건 살았으니 된 거에요. 그리고 이것으
로 두 번이나 구해 드렸네요.”
그리 툭 쏘듯이 말하고는 유릭은 등을 돌렸다. 정말 황당한 일을 당
한 뒤라, 에드먼드는 눈을 끔뻑이며 유릭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었고, 그 손등에 그려진 저주의
문장이 문득 눈에 뜨였다. 방금 전에 붉게 빛나던 모습이 생각난다.
오싹한 공포가 몸을 휙 훑고는 지나간다.
이걸 없애야 해.
“저, 유리-”
“더 말 할 시간 없어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해가 뜰 테고, 그때까
지 제가 내보내 달라고 하지 않으면 간수가 이상하게 여긴단 말이
에요! 어서 가야 해요.”
“.....하지만 이건 정말 급한 일이다.”
유릭은 에드먼드를 흘끗 쳐다보고는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요?”
“칼 있니?”
유릭은 품안에서 짧은 칼을 꺼냈다. 가죽으로 휘감겨 있었다. 에드먼
드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더러운 손등에, 예전의 형리들이 새겨
넣었던 문장이 덕지덕지 그려져 있었다.
“손등을 없애 다오.”
유릭이 질렸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미쳤어요?”
“이게 없어져야 제대로 탈출할 수 있게 될 거다. 뜯어내 버려.”
유릭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북
북 찢어내, 그것을 칼에 감아 두툼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하려나
에드먼드는 가만히 기다렸다. 유릭은 검은 물에 그것을 적셨다 꺼
내더니, 촛불가까이 가져갔다.
“유리?”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불이 확 타올랐다.
“손 내밀어요.”
“뭐?”
“지워 달라고 했잖아요. 이 칼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무디고 저도 솜
씨가 별로 없으니까 아프기만 할 뿐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거에요.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에드먼드는 정말 이 꼬맹이에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나 못해요, 하면
직접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더 효율적이지요.’ 하고 뻔뻔하게
말 하는 꼴이라니!
그래도 에드먼드는 이를 악물고 손등을 내밀었다. 유릭은 잠깐 턱을
긁적이다가(망설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에드먼드의 무릎을 감싼
무릎 보호대를 풀어 내밀었다.
“이번엔 뭐야?”
“악 물고 버텨요. 얼마나 아플 지는 내가 안 데어 봐서 모르겠지만.”
“갈수록 경이롭구나, 너란 녀석은.”
“숙부랑 아버지도 늘 그러셨지요. 물론 학교에서는 매우 불순한 것으
로 받아 들여졌지만. 불 다 꺼지기 전에 얼른 내밀어요.”
“‘불순’이란 말뜻은 알고 있니?”
“보기 아니꼽다는 뜻이지요.... 에드, 손 안 내밀 거에요?”
에드먼드는 얼른 손을 내밀고는, 유릭이 건네주는 가죽을 입에 꽉 깨
물었다. 지독한 맛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끔찍한 고통이 손등을
불살랐다. 눈이 뒤집히고,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지옥
불덩어리 속에 맨 몸으로 던져진 듯 끔찍한 고통이었다. 유릭이 불
붙은 칼을 내던졌다. 구석진 곳으로 내던져진 불은 오랫동안 타 올랐다.
“크흡---!”
유릭은 에드먼드의 비명소리에도 망설이지 않고 술 주머니를 꺼내어
그 손등에 들어부었다. 독한 술이 쏟아지자 다시 불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몸을 갈가리 찢었다.
“아악--! 으.......! 으헉!”
유릭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손등을 한번 보더니, 자신의 옷을
찢어 화상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그 손등을 감았다.
에드먼드는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하아-”
정말 눈물이 스며 나올 정도로 지독했다. 톱으로 온 몸을 갈가리 찢
는 것만 같다.
“다 지워졌어요.”
그러나 유릭의 목소리만큼은 찬물 속의 자갈마냥 차분했다. 에드먼드
는 고통에 들뜬 눈으로 유릭을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다시 보니, 속눈썹이 길어 원래의 무관심하고 음침한 빛
이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보석마냥 더욱 어두워 보인다.
“이제는 정말 가야해요.”
“고맙다. 정말...... 고맙다.”
유릭은 싱긋 웃었다. 그 웃음만은 평범해 보여, 에드먼드 역시 씨익
웃었다. 무언가가 오고 간듯한, 미묘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곧 유릭은 동굴 쪽으로 생쥐처럼 잽싸게 사라졌다. 그의 작은 발소리
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에드먼드는 몸에 점점 열이 오르는 것을 느
끼며 자신의 온 몸을 적신 검은 물을 보았다. 불빛 속에 그 검은 색
은 더욱 검어 보였고, 간혹 윤기를 흘리며 몸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
으로 뚝뚝 떨어졌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물 속에 끌려 들어가는 순간에 보았
던 것과 똑같은 성좌의 그림이 지금도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에드먼드는 턱의 침과 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리를 모아 앉은 뒤에
다시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다. 고통은 지독했지만 오히려 개운했다.
천장의 성좌가 점점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 빛이 그를 몽롱하게 만
든다.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에, 그 검은 물밑에서 보았던 광경이
섬광의 잔상처럼 번쩍였다.
후우-
나중에 생각하자.
그리 자신에게 말하며 에드먼드는 눈을 감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등에 벽을 댄 채로, 오랜만에 그를 찾아온 안도의
한숨을 느꼈다. 코끝에 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에드먼드는 그 쪽
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 역시나 작은 굴이 뚫려 있었다. 에드
먼드는 그곳으로 기어가 손바닥을 대 보았다. 바람이 느껴진다. 차
갑고 신선한 바람이. 에드먼드는 그 구멍에 몸을 밀어 넣고, 그 바
람을 움켜잡으려는 듯 기어가기 시작했다. 몸을 내리 덮는 것 같은
그 무거운 강철 베일 같은 것이 그 바람이 가까워질수록 뒤에 남
겨 놓고 오듯 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에드먼드는 그럴수록 더욱 빨리 기어갔다. 손바닥이 쓰라리고 손등의
화상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고통도 잊었다.
그는 기어가고, 또 기어갔다.
천년의 흐름 같은 그 긴 굴을 기어가고 기어가, 마침내 굴의 끝에 다
다랐다.
커다란 공간이 그를 집어 삼킬 듯 나타난다. 파낸 듯 움푹 들어간 곳
이었고, 층진 바위벽으로 둘로 싸여 있었다. 근처에는 해초 조각들이
널려 있었으며, 흰 따개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에
드먼드는 마치 천년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방금 전의 기괴한 일과,
그 전에 있었던 겨울의 심장 같은 차가운 돌무덤과, 몇 달을 갇
혀 있었던 토굴 감옥과, 그 전의 끔찍한 감금 생활을 잊었다.
맙소사-!
하늘이 보였다.
검푸른 하늘, 이제 하얗게 빛나며 아침 해를 끌어 들이는 그런 여명
의 하늘이.
구름들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하늘은 어둠이 빠져나가
며 밝아온다. 아직 어둠에 스며들어있던 해안가의 바위들이 빛 속에
청회색 창백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에드먼드는 멍하니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날카로운 빛이 끄
트머리에 맺혔다. 에드먼드는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단하게 바닥을 딘 두개의 무릎에 차갑고 거친 바위가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온 몸이 활활 탈 것 같은데, 그리고 마시는 공기는
이다지도 차갑고도 달콤한데 그런 고통이 무슨 상관일까.
마침내 아침의 첫 햇살이 검처럼 날카로이 솟구쳐 올랐다.
그 빛의 칼날들이 휘돌아 치며 사방을 내리찍었다. 어둠은 휩쓸려
나가고, 구름 점점이 박힌 하늘은 환하게 불타올랐다.
그 찬란한 빛살과 함께 그를 내리 덮던 무거운 베일 같은 억압은 흔
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너무나도 몸이
가볍고 자유로운 남자였다.
에드먼드는 웃었다.
온 동굴이 울리도록 크게 웃었다. 하늘이 놀랄 정도로 크게, 크게
웃어 젖혔다.
그는 마침내 자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와 함께 몇 년 간 그의 마음 속 깊이 처박아 놓았던
분노와 증오 역시 해방되었다. 야수처럼 울부짖는 그 분노가 울부
짖으며 그 지독한 고통과 절망을 선사했던 자들을 향하여 쏟아지고
불타올랐다.
그래, 갈가리 파멸 시키마.
이제 너희들에게 새벽은 없다.
*******************************************************************
작가잡설: 한가로운 오후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