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회색 가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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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의 소년 소녀들은 모두 흥분해 재잘거리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건만, 그것 따위 상관 없을 정도로
그들은 들뜨고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열대여섯 쯤 되는 이 소년 소녀들은 모두 올해로 브란 카스톨의 음악
아카데미의 성악부 졸업반이 되는 학생들이었다.
내년 2월이면 이들 모두 졸업을 하게 되고, 그 뒤에는 무대에 정식
데뷔할 터였다(그 중 부잣집 여자 아이들은 ‘음악적 교양이 풍부한’
이라는 혼수를 챙겨 시집을 가거나).
사방에서 재능 넘친다, 천재라 칭송받으며 커온 꼬마 음악가들이기
에, 그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고 그런 만큼 서로에
대한 경쟁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우등생들이 늘 그러하듯, 경쟁자
들 앞에서는 한껏 과장하여 ‘나는 정말 못났지 뭐니. 누구누구에 비하
면’ 하며 조잘댔고,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믿기를 바라지도 않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상대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가장 주의
깊게 탐색하는 것은, 이번 5학년 공연에서 주연을 맡은 에닌이었다.
보통 에니, 또는 마델로 양이라 불리는 이 소녀는, 두 달 전까
지만 해도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공주님 같은 존재였다. 진한 갈색
머리에, 꿈꾸는 듯한 푸른 눈에, 인형처럼 작고 어여쁜 코와 입
술을 가진 소녀였다. 뿐만 아니라 굉장한 부잣집 딸이라, 입학 했을
때부터 기숙사의 특실에 지내며 하녀까지 두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
의 목소리, 천사의 음색이라는 칭찬을 자자하게 들을 정도의 미성
에다 재능 또한 뛰어났다. 그런 아이라면 의례히 거만할 텐데, 그녀
는 모두에게 상냥했으며 자신을 대 놓고 질투하는 아이들을 보아도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무시해 버릴 정도의 아량도 있었다.
그러나 두 달 전에, 질투하는 아이들이 미소 짓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느긋하게 몰락하는 상단을 되살려
보겠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큰 투자를 했고, 그 투자된 상품이 실
린 배 다섯 척은 때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중대해를 강
타한 폭풍에 그 배가 휩쓸러 갔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
였고, 결국 그녀의 아버지 살비에가 돌아오기도 전에 채무자들은
저택과 토지, 보석등 돈 될만한 모든 것들을 휩쓸어 가 버렸다. 그녀
는 특실은 물론이요, 그 특실의 물건까지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다.
아이들이 늘 감탄하던 화장대는 실려 나갔으며, 친구들과 재잘대던
푹신하고 호화로운 침대도 실려 나갔다. 간혹 파티라도 있을 때
걸고 나가 아이들의 질시를 한눈에 받았던 진짜 다이아몬드 목걸이
역시 빼앗겼으며, 옷장 가득 있던 드레스 역시 거친 얼굴의 사내들
의 손에 의해 들려 나갔다. 그녀가 주연을 맡기로 일치감치 내정
되어 있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던 리린 공주의 의상도 빼
앗겼다. 작은 수정들이 박혀, 조명 빛이 쏟아질 때마다 별처럼 반짝
이던 그 아름다운 의상이 낯선 남자의 손에 움켜쥐어져 다른 옷과
함께 빨래 더미마냥 상자에 처박히자, 에닌은 조용히 눈물을 닦아냈다.
살비에가 어느 날 갑자기 배 다섯 척을 모두 끌고 마그레노 항
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에닌의 처지는 누구나 예상하
는 대로 될 것이다.
지금도, 에닌은 아이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어두운 눈동자로
대기실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학교에서 장만해 준 것으로, 선배들이
사용하던 헌 의상이었다. 누구나 그것을 입었기에, 특별히 비참하다
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입고 있는 것이 에닌라는 것이
문제였다. 별처럼 빛나던 공주님, 언제나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은식
기에 식사를 하고는 비단 리본을 하늘거리며 수업에 나오던 그 에닌
이, 지금 남이 입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에닌은 단정한 머리를 더욱 단정하게 매만지고는 일어났다. 이 졸업
발표회가 끝나면 그녀는 학비부터 걱정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쇼에라도 나가 돈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
이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급히 눈길을 거두고는 각자 맡
은 파트를 부르며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에닌은 그리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아이들을 우울하게 둘러보다가 대기
실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곳의, 등받이 없는 자그만 의자에 붉은 의상을 입은 동갑내기 소녀
가 앉아 있었다. 노을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붉은 깃털로 장식하고
있었고, 금색 리본을 머리부터 허리까지 내리고 있었다. 귀에는
늘 하고 다니는 자수정 귀걸이가 달랑이고 있다. 늘씬한 편이라 목
은 길었고, 다리도 길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는 구슬처럼 크고,
속눈썹 역시 길다. 에닌에 비하면 엄청난 미모는 아니지만, 이곳에
왔을 때 그녀의 원숭이 같은 몰골을 생각한다면 기적처럼 아름다워진 것이다.
에닌이 다가오자, 그녀는 흘끔 돌아보고는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악
역인 불의 마녀, 크롤비타 역을 맡은 소녀였다. 리린 공주의 어머
니에게 저주를 걸고, 세피롤 왕자를 놓고 리린 공주와 경쟁하는
마녀로, 처음 등장부터 난해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선보이는 역이었다.
게다가 그 역은 이 황실 아카데미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역’으
로 통하는 배역이기도 했다. 다른 배역은 학생들이 노력만 잘 하면
훌륭하게 소화 해 낼 수 있어 ‘학예회 용’이라 일컬어 질 정도였건만,
유독 그 마녀의 파트만은 아이들이 하기에는 어려워 조금만 못
하거나 평범하게 불러도 정말 형편없게 들리는 기묘한 역할이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 공주와 마녀를 제일 먼저 정할 때, 학생들은
모두 그 마녀 역에 자신이 걸리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러
나 다들 지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에닌이 공주를, 준우승을 한
지롤리타가 그 역을 맡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임인 진지어 빅틴 선
생은 놀랍게도 이 소녀를 지적했다. 지난 콩쿠르에 특별상이나 받은,
크게 주목을 받지도 못한 그런 아이에게. 지롤리타는 3막의,
왕자가 공주에게 청혼하러 왔을 때 그녀와 경쟁하며 왕자를 유혹하는
아가씨 역을 맡았다. 공주의 경쟁자였다가 결국 그 공주가 마녀를
물리치도록 돕고, 또 매력적인 외국 왕자와 결혼하게 되는 그 역은
유명한 아리아가 들어 있기에 공주 다음으로 빛나는 역이다. 그
역을 받게 되자 지롤리타는 크게 안도했다.
에닌은 그 소녀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연습 많이 했니?”
“신경 쓸 거 없어. 너나 맨 마지막에 왕자님 품에 안길 때까지 잘 하
라고.”
“로웨나.”
로웨나 그린, 그것이 소녀의 이름이었다.
처음 이 소녀가 학교에 들어왔을 때 그 어마어마한 몰골의 소녀가 자
신의 이름을 밝히자, 다들 신나게 비웃어 댔던 것을 에닌은 잘 기
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연습 첫날에 이 소녀의 교복을 갈가리
찢어 놓는 심술을 부렸다. 어차피 아이들은 무책임하고, ‘약자’라
판단되면 더욱 무책임해 진다.
그러나 다음날, 아카데미는 역사에 전무후무한 신입생의 첫 수업을
치르게 되었다. 그날 아침, 모든 기숙사 학생들의 교복이 찢겨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것이 로웨나 짓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았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이만 북북 갈아야 했다. 용기 있는 아이 하나
가 일러 바쳤지만, 로웨나는 자신의 교복을 보이며 “저도 이렇게
당했단 말이에요. 아니, 제가 제일 심하잖아요.” 하고 빠져나가 버렸
다. 다음에 학생들은 그녀의 무용화를 숨겼다. 그러자 다음날,
학생들은 꼭꼭 숨겨 놓은 무용화들을 모두 간수했지만 연습실 바닥
에 뿌려진 어마어마한 수의 못과 자갈이 치워질 때까지 무용 연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기에 받힌 몇몇 아이들이 세 번째 복수를
하자고 했지만, 평범한 인내와 담을 가진 학생들은 기겁을 하며 포
기했다. 이번에는 대체 얼마나 근사한 보답이 올지 전혀 감을 잡
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웨나가 퉁명스레 답했다.
“어차피 나는 내기에서 지면 억울해 미쳐서 쓰러지며 울부짖고.........
죽는 거야. 내 역할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연습을 하든 말든 상관
없어.”
“하지만 마녀 역은 어려워.”
“너는 한번도 안 해봤잖아. 어려운 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안느 브리기테가 공연할 때 봤어.”
“보는 거랑 직접 부르는 거랑은 틀리지...... 하지만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질리처럼 이쁜 척하려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몸을 뒤틀어 대며 우엑 우엑 울부짖지는 않으니까.”
에닌은 살며시 웃었고, 그녀를 따라 다른 아이들도 웃었다. 지롤리타
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 둘을 보았고, 그녀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소녀들 역시 덩달아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1학년 시절만 해도 그녀가 선동하는 대로 로웨나 괴롭히
기에 동참했었지만, 단체로 수모를 당한 뒤에, 평범한 아이들은 무
더기로 포기하고 인내력 강한 아이들이 각개 격파 당하는 동안 결국
에는 그 누구도 로웨나를 괴롭히지 않게 되어버렸다(아니 무서워서
못했다). 그리고 이제 아이들은 로웨나를 보통 아이로 대접하고 있
었다. 그 엄청난 사태 후에 두 달 정도 지나자, 아이들은 이 로웨
나가 의외로 재미있고 재기발랄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에닌처럼 지나치게 완벽해서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거만하
기 그지없는 지롤리타도 말 그대로 아주 상쾌하게 혼 내준다.
화가 난 지롤리타가 턱을 처 들고는, 그 목과 어깨에 힘을 팍 주며
말했다.
“겨우 마녀 역이나 하는 주제에! 장담하건데, 너는 절대 후원자를 얻
지 못할 거야. 아마도 너는 식당 바닥이나 닦으며 돈을 벌어야 할
걸!”
로웨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초록색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
보자, 지롤리타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녀도 에닌은 질투하며
미워해도 로웨나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악역이지만, 너보다 더 많이 나와.”
“겨우 5분이잖아! 하지만 난 끝까지 살아 있다고. 넌 죽지만. 그리고
너, 너는 모르는 것 같은데 그 마녀 역은 저주 받은 역이야.”
“하긴, 진지어 빅틴 선생님도 엄청나게 잘 부르지 않는 한 형편없어
보인다고 그러더라.”
“흥, 그러니까 오늘 너는 정말 엉망진창에 형편없을 거야. 최악일 거
라고.”
“그리고 만약에 잘 하면, 나는 올해 졸업생 중 최고가 되는 거로구
나.”
그렇게 말하곤 로웨나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큰 눈
동자에 긴 속눈썹을 내리 깔고 있으니, 진짜 마녀처럼 도도해 보
였다. 지롤리타가 “너 따위가 무슨!” 하고 쏘아 붙이려는데 대기실로
5학년의 학년 주임 진지어 빅틴 여사가 들어왔다. 아이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녀는, 갈라진 턱에 푹 들어간
볼을 가지고 있어 ‘사마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학생들을 엄격하면서도 공평하게 다루
었다. 로웨나에게 마녀 역을 준 것 역시 그녀였다.
“자, 작은 종달새들. 여기서 병아리마냥 떠들어 대지 말고, 모두 일어
나 준비하세요. 곧 공연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귀한 분들이 많이 온
자리이고, 학생들의 첫 무대인 거에요. 모두들 최선을 다해 주고,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서 미끄러지거나 하지는 말도록 해요. 중간
에 조금 삐끗해도 괜찮으니까, 우물대며 멈추거나 하지 말고 용기
있게 힘껏 부르고.”
학생들은 모두 네--! 하고 크게 외쳤다.
빅틴 여사는 늘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휘두르고는 말했다.
“음악이 시작됩니다. 자, 처음 노래를 부를 학생들 준비하세요. 바로
뒤를 따라 나가는 에닌 양 역시 준비 하고. 자, 에닌은 주연이니
가장 단단히 마음먹도록 해요. 학생이 바로 우리 아카데미의 얼굴이
되는 거랍니다.”
에닌은 허리를 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
고, 눈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빅틴 여사는 흐뭇하게 보고는, 아직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붉
은 의상의 로웨나를 보았다. 그녀는 로웨나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로웨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하리라 믿는다, 그린.”
로웨나는 무관심한 척 눈을 깔며, ‘네’ 하고 작게 답했을 뿐이었다.
빅틴 여사가 말했다.
“이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루드반 남작은, 지금 우리가 공연하는 오페
라, 눈의 요정과 장미의 마녀를 작곡할 때 이렇게 말했단다. ‘모든
재능 있는 아이와, 단 하나의 특별한 아이를 위해‘ 라고. 누구나, 이
역 중 하나를 맡는 순간에 이미 재능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란다.
자신감을 가지고 잘 하려무나.”
“열심히 할게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마녀의 노래는 단순하면서도 까
다로우니까.”
“너는 연습도 열심히 했잖니.”
“못하니까 연습이라도 많이 해야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로웨나는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언제 들어도 부드럽고 근사한 서곡이었다. 이제 모두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연습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서도 아이들은 흘금 흘끔 에닌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천상에서 들리는 듯 너무나 깨끗하고 고운
음색이었다.
로웨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고는 자신의 붉은 의상을 바라보았다.
빅틴 여사가 말했다.
“공주는 너한테는 안 어울리는 역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너는 지나
치게 개성이 강렬하고, 그런 개성은 공주에게는 절대 안 어울려.
공주에게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워야 하고, 그렇기에 너 같은 개성
은 오히려 독이지. 그래서 지난 콩쿠르에서 심사의원들이 너에게
특별상을 준 거란다. ‘희고 고운 손’을 그렇게 부르는 아이는,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을 거야.”
로웨나의 볼이 빨개졌다.
드디어 서곡이 끝나가고 있었다. 로웨나는 양쪽 귀에 달린 자수정 귀
걸이 중 오른쪽에 손을 가져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빅틴
여사가 그런 로웨나를 귀엽다는 듯 보고는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귀여운 제자들에게 빅틴 여사가 말했다.
“자, 이제 그대들의 아침이 밝았으니 즐겁게 지저귀어 봐요. 작은 종달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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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드디어 나오셨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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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