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화 (16/174)

제15편

회색 가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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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아카데미의 졸업 발표회는 일종의 경매장 비슷한 분위기다.

이곳에 학부모들은 당연히 모두 참석하고, 이 학부모의 지인들 역시

많이 참석한다. 그리고 자식들의 출세에 무관심할 수 없는 학부모

들과 학교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기를 쓰는 교장과 선생들에 의해

오페라에 관심 높은 상류층 인사들과 관련자들이 초대된다. 게다

가 이곳은 꽤나 이름높은 명문 학교인지라, 오라고 사정하지 않아

도 초대장 한 장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 사람들 중에 평범한 학부모들은 물론이요 교장마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주의 깊게 지켜보는 사람은, 로얄석에 앉아 한 젊은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검은 머리에 단정한 콧수염을 기른 신사였다.

이 중년 신사의 이름은 트레비스 카트슨으로, 현재 카스틸로 대

오페라 극장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의 옆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는

남자는 알베르 랑케 자작이라 불리는 사람으로,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귀족 남자들이 늘 그러하듯 스스로의 얄팍한 지성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팜플렛을 다 읽은 트레비스가 말했다.

“자네가 눈여겨본다는 소녀는 이 공주님인가?”

그리고 그는 맨 위에 적힌 이름을 툭 쳤다. 알베르가 고개를 끄덕였

다.

“한번 보신다면 제 의견에 당장에 동의하실 겁니다. 천사처럼 아름답

고, 여신처럼 놀라운 재능을 가진 천재입니다.”

“알브, 공주 역을 하는 소녀라면 학년 수석을 하는 아이라고. 실력이

출중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그 모든 공주를 통틀어 최고의 공주님일 것입니다. 콩쿠르에

서 자그만치 두 번이나 우승한 소녀이니까.”

그리고 알베르는 무대를 보았다.

무대의 천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하얀 의상을 입고 조각상처럼 서

있는 소년 소녀들이 나타났다. 꽃의 시녀 시종들이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그 선율에 맞추어 소년 소녀들의 합창이 시

작되었다. 그러나 꽃의 요정들을 한 학생들의 수준은 꽤 평범했다(

물론 아카데미 기준으로). 그 합창이 천장을 맴돌며 아름답게 사라

질 무렵, 그 음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청아한 음색의 노래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 노래가 퍼지는 곳

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요정들이 양 옆으로 갈라지자, 그 속에서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났다.

“저 소녀입니다.”

트레비스는 그 소녀를 눈여겨보았다. 트레비스는 단 한번도 이 알베

르의 안목을 존중해 본 적도 없었고, 그가 떠들어 대며 누구누구야

말로 어느 면에 있어서 최고지요, 어쩌고 할 때마다 비웃어 왔으

니 그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일 생각은 없었다. 늘 채워져 있던 옆자

리가 비면, 이런 낭패가 있다. 이런 자리에 늘 끌고 오곤 하던 친

구는 현재 멀고 먼 서부전선으로 가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전공

목록에 착실히 한줄 씩 더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친구에게 오

페라 이야기를 해 봤자, ‘지금 전쟁터야! 바빠 미치겠는데 푹신한 의

자에 앉아 꾸벅 꾸벅 조는 그런 극장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겠냔 말이

야!’ 하고 윽박질러 댈 것이다.

트레비스는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일단 소녀의 노래를 듣게 되자, 자존심과 알베르에 대한 경멸을 잠시

접어 두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기초가 잘 다져진 정교한 재능

은 처음부터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법이다.

“저 소녀의 이름이 뭐요?”

“에닌 마델로.”

트레비스는 눈을 깜빡였다.

“가만, 마델로 가문이라면-”

“네. 그 남자의 딸이지요.”

“믿어지지 않는 군. 대체 누구 덕에 저런 아이가 태어난 거지? 살비

에도, 그 마누라도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천박한 말종인데.”

“그러니 사람들은 저 아이 더러 천사의 선물이라고 하지요.”

“흠.”

사랑스럽게 춤추듯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자태에, 트레비

스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든 것이, 정말 노래와 몸과 그 연기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진 듯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객석의 사람들은 속삭이기 시작했고, 점점 그녀의 모습에 빨려 들어

가 듯 지켜보았다. 희고 짧은 옷이, 작은 지느러미처럼 그녀의 몸을

휘돌아 감았다. 음악은 날개처럼 그녀를 춤추게 하고 있었고, 그녀

가 부르는 노래는 최고의 악기가 되어 사람의 심장을 울리고 있었다.

트레비스가 빙그레 웃었다.

“만약 저 소녀를 내가 후원하게 된다면, 나는 드라마틱하며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연이 될 지도 모르겠군. 갑작스레 닥친 고난을 겪는 소

녀를 구원하여 성공시키는 신사라, 참으로 낭만적이지.”

“남작님은 결코 그럴 분이 아니죠. 상품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당신이고, 그런 만큼 숭배하지도 숭배 받는 것도 거부하지 않

나요.”

저건 누구에게 들었을까. 트레비스는 여전히 웃었다. 저 알베르 머리

로 저런 걸 생각해 낼 리가 없는데 말이야.

“예술가 중에, 무대에 서는 자들은 모두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해. 헌신은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헌신은 숭배와 자기 연민의 시

작이고, 그건 누구에게든 독이지.”

음악의 선율이 부드러워졌다. 무대를 보기 위해 다시 트레비스과 알

베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 발아래의 관객들도 각자 부채를 펼쳐

들고, 고개를 숙이고는 속삭였다. 마침내 공주는 왕자와 사랑을 속

삭이고, 결혼을 약속한다. 시녀인 요정들이 사라지고 왕자마저 사라

진 자리에서, 그녀는 봄날 한가운데, 날개를 퍼덕이는 흰 나비처럼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다.

마침내 공주가 노래를 마치고 1막의 불이 꺼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황실 아카데미의 교장은 제일 앞에 앉아 그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흐뭇하게 들었다. 그는 오늘이 완전히 성공했으며,

잘 하면 후원금을 조금 더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트레비스는 이 발표회가 끝나고 축하 파티가 열릴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누구 누구야 말로 정말 재능 있는 아이지요.’

라거나, 누구누구와 꼭 만나라는 식으로 재잘 재잘 이야기 해 대

는 것을 어떻게 참고 들어야 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시 불이 켜졌다. 2막이 시작되며, 공주의 어머니인 여왕이 딸에 대

한 걱정을 노래로 부르며 나타났다. 아주 살집이 좋은, 우람한 소

녀였다.

무대는 이제 음침한 조명으로 변해 있었다. 비극을 예고하고 고난을

확신하는 그런 조명으로. 음악은 낮게 흐른다. 여왕은 불안한 듯

여기 저기 오고가며 어두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왕 역을 맡은

아이도 꽤 잘 한다.

“드디어 저주받은 역, 마녀 역이군요.”

알베르가 속삭였다. 그들도, 이 오페라의 마녀 역에 얽힌 ‘저주’를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역을 하고 후원자를 얻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잘 하는 학생이라도, 조금만 못 하면 최악으로

들리는 것이 바로 그 마녀 역인 것이다.

마침내 짝-- 하고 짧은- 심장의 철렁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리고 빠르지만 음침한 음악이 펼쳐지며, 마침내 무대 저편에서 마

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팜플렛을 흘끗 보고, 전혀 언질을 듣지 못했던 이름이자 아

끼는 인재를 저 역할로 내보내어 이미지를 망치지 않기 위해 평범한

아이를 고른 것 같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노래의 첫머리는 평범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살금살금 걷는 듯한

그 노랫소리는 역대의 마녀들이 늘 그러하듯 누구도 그녀가 마녀라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고 경쾌하다. 그리고 음악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녀의 금빛 리본이 춤을 추며, 그 노랫소리 역시 높아

져 간다. 소녀의 경쾌한 노랫소리에 음악이 빨려 들어가며 드디어

마녀의 아리아가 시작되었다.

소녀의 노래는 정말 경쾌했고, 가벼웠다. 그것은 정말 너무도 쉽고

당연한 노래를 하는 듯 무관심했다.

“미성은 아니군요.”

“그래, 방금 전의 에닌처럼 천사의 속삭임 같은 미성은 아니군.”

그리고 나는 천사의 속삭임은 관심 없지. 지겹거든. 트레비스는 그리

속으로 빈정대며 붉은 의상의 소녀를 주시했다. 드디어 소녀는 여

왕에게 다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소녀의 손길과 몸이 여왕의 목덜미를 스치고, 허리를 스치고, 그렇게

그녀의 주변을 돌며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딸의 가장

축복된 날에 그녀를 잔인하게 쫓아내도록 하도록. 조명이 그녀를

따라 다니며, 그 붉은 금발은 더욱 붉어 보이게 하고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조각처럼 딱딱해 보이게 한다. 트레비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가슴 속 깊은 곳이 뚫린 듯한 그런 기묘한 느낌을.

“저 소녀의 이름은 뭐요.”

“모릅니다. 알려지지 않은 소녀니까요.”

트레비스는 팸플릿을 흘끗 보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알베

르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떤가요. 탐색의 시간은 벌써 끝났을 거라 생각되는데.

제가 발견한 그 천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알베르가 그리 재촉하듯 묻자, 트레비스는 콧수염을 쓸었다. 알베르

는 별로 즐거워하지는 않는 눈빛으로, 아니- 오히려 조금은 초조해

하는 듯 트레비스 남작을 보고 있었다. 알베르는 젊은 만큼, 자신

이 고른 것이 언제나 굉장한 것이기 만을 바랬다. 그리고 사실, 그

런 허영심으로 이 트레비스과 동행한 것이었다(그래서 트레비스가

이 청년이 ‘어이, 트레비스 씨! 오늘 오페라나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제가 굉장한 인재를 발견했는데!’ 어쩌고 할 때마다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다... 차라리 군인인 그 친구 녀석이, 비록 이런 자리에서

꾸벅 꾸벅 졸다가 고꾸라지는 것이 일과라 할지라도 만 배는 낫다.

‘누가 잘 부른다고? 아아, 모자라. 나를 깨우지는 못했거든.’).

“루드반 남작의 말이 생각나는 군. ‘모든 출중한 아이, 단 하나의 특

별한 아이.’”

“즉?”

트레비스는 붉은 마녀의 노래를 그윽하게 듣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

는 소녀는, 마치 온 몸에 흩어지는 꽃잎들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붉고 붉은, 그런 꽃잎을. 짧으면서도 강렬하며, 경쾌하고 빠른 그

런 꽃잎의 윤무를. 그의 차가운 기억의 전당, 새기지 않는 한 흔적

이 남지 않는 그런 기억의 전당에 벼락보다 날카롭게 금을 그어 놓는

그런 음의 윤무를.

음으로, 그렇게 시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런 장렬한 음의 향연을.

분명 미성은 아니다. 비단을 풀어 놓고, 깃털로 덮어주는 듯한 그런

미성이 아니다. 이것은 보다 강렬하고, 보다 독특하며, 보다 기적

같은 무엇이다. 아직 다듬어 지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 누구도

잊지 못할 존재가 될 것이다. 가슴을 뚫을 듯한 감각과 목소리는

누구나 가지는 것이 아니니.

마침내 소녀의 목소리가 높이높이 올라갔다.

기적처럼 높은 음, 창칼이 되어 심장에 내리 박히는 듯한 그 마녀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혀 듣지도 않고 있던 알베르가 또

재촉했다.

“어서 말하시죠.”

“괴도에게 심장을 털린 기분인데.”

“네?”

“요즘 한참 유명하잖나. 예고장과 함께 날라 들어 가보들을 쓸어가는

박쥐 신사. 그놈이 내 심장을 털어 가면 딱 이런 기분일 것 같군.

맙소사.”

알베르는 알아서 착각해 주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에닌 마델로 양은 정말 노래의 천사에요.”

그러나 트레비스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아니, 에닌이라는 이름마

저 가물가물할 정도다. 아아, 나중에 헨리 카밀턴 녀석이 돌아오면

실컷 이야기 해 봐야 겠다.....물론 듣다 말고 졸거나 딴청피우고 있

을 테지만. 아니다. 어쩌면 저 목소리야 말로 그 구질구질한 이혼

남의 잠을 깨울 마성의 목소리일지도.

학생들의 공연이 왕자와 공주의 이중창으로 끝나자, 온 무대에 우레

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커튼이 내려지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박수 소리는 더

욱 커졌다.

성공적으로 공주 역을 마친 에닌은 잔뜩 상기 되어 있었다. 역시나

완벽하게 역할을 해 낸 지를리타 역시 들뜨고 우쭐해져 있었다. 행

여나 공주보다 자신이 더 눈에 뜨였을 거라 확신하고 있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모두 에닌과 지를로타, 그리고 왕자 역의 프란츠에게

찬사를 보냈다.

“정말 잘 했어!”

“최고였어, 정말!”

“부러워!”

그러나 마녀 역을 했던 로웨나는 벌써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땀 한 방울 없었고, 숨도 고르게 내 쉬고 있었다. 누가 본

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에닌은 상기된 볼로 로웨나에게 달려가 외쳤다.

“정말 잘하더라, 로이!”

로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잘 할 줄은 몰랐어, 로이.”

“맞아! 에닌 다음으로 제일 잘했어!”

그제야 로웨나가 웃었다. 그녀 역시 어린 소녀라, 내심 칭찬을 기대하

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었

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은근히 아이들이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이고

추켜 세워주기를 바랬다. 겉으로는 아주 무관심한 척 하면서도, 로웨

나는 속으로는 당장에라도 펄쩍 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장에

관심을 빼앗겨 버린 지를로타는 로웨나와 에닌을 모두 쏘아보며 고개

를 팩 돌렸다.

밖에서 사람들이 에닌과 프란츠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곧, 에닌의

이름이 더욱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로웨나는 내심 에닌이 부러웠지만,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했다. 에닌은 정말 새빨갛게 상기된 채로, 그리

고 첫 무대에서의 성공이 너무나 벅찬 듯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러자 빅틴 여사가 말했다.

“어서 달려가렴. 사람들이 너를 부르잖니. 네가 달려 나가야, 네 뒤

로 다른 아이들이 나갈 수 있어. 어서 가라.”

에닌은 상기된 채로 달려 나갔다.

곧 박수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거세어졌다. 정말 파도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로웨나는 마치 자신이 그 갈채를 받는 것만 같아,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겉으로는 당연히 ‘나는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

어.’ 라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 깔고 있었지만)

빅틴 여사가 말했다.

“자, 이제 모두 나가요! 어서.”

학생들은 상을 받는 아이들처럼 와르르 달려 나갔다. 조명은 햇살처럼

환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얼굴에는 기특한 아이들을 보는 듯

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그 눈빛에 희열을 느끼고, 모두 우쭐해 했다. 사회를 맡은

마리아 교수가 차례차례 그들을 소개했다. 에닌을 소개하자 박수 소리는

정말 어마어마해 졌다. 프란츠와 지를로타 까지, 역시나 엄청난 박수가

터졌다. 로웨나는 자신을 소개할 순서가 다가오자 긴장이 되었다. 얼마

나 박수를 쳐 줄까? 형편없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아무도 박수를

쳐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아니, 야유를 하면 어떻게 해. 그러면

정말 창피한데.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로웨나는 정면의 로얄석에 앉아 있는 두 신사를 보

게 되었다.

한 사람은 갈색 머리에 흰 정장을 입고 있었고, 아주 늘씬 했다. 가까

이에서 보면 어느 정도 미남일 테지만, 별로 흥미가 일지는 않았다.

그 옆의 사람은 검은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중년 신사였다. 기품 있는

자태를 보니, 그는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로웨나

는 그들에게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차피 저 사람들 모두 에닌에게

만 관심이 가득할 걸.

“로웨나 그린 양입니다--!”

이름이 불리자 로웨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큰 박수가 터졌지만, 로웨

나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장 작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때 로얄 석에 서 있던 갈색 머리 남자가 옆에 있던 시종 같은 소년

에게 뭐라 속삭였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얄 석 뒤의 커튼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검은 머리 신사가 일어나더니 그 소년을 따라 나갔다.

박수는 조연들을 소개할 때도 차례차례 터졌다. 모든 소개가 끝나고, 모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자 엄청난 박수 소리가 뒤따르며 막이 내려왔다.

눈앞의 관객들이 삭 사라지자 로웨나는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로웨나

는 에닌을 보았다. 아이들의 입맞춤을 받는 에닌을 보니, 다시 부러워졌다.

내가 공주님을 했으면 더 잘했을 지도 모르는데. 그 노래는 그렇게 부르면

왠지 재미가 없잖아........이렇게,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어느새

그녀는 조용히 공주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 때 빅틴 여사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모두 축하 파티가 있을 겁니다. 모두 돌아가 준비를 하고,

홀에 모이도록 해요.”

드디어 다른 모든 아이들이 기대하고, 로웨나는 제발 오지 말라 기도하던

시간이 온 것이다.

로웨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지, 그린 양.”

“오늘 가 볼 곳이 있어서 저는 못 갈 것 같아요.”

빅틴 여사의 눈에 연민이 떠올랐다. 로웨나는 차라리 그런 눈빛을 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갈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들 가지

고 있는 드레스가 로웨나에게는 단 한 벌도 없는 것이다. 드레스 한 벌이 있

기는 있었는데, 그것은 에닌이 자신이 입던 드레스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로웨나는 입어 보지도 않고 에닌에게 돌려주었다. 에닌이 물건을 모조리

빼앗긴 채 다락방으로 가게 된 날, 엎드려 흐느끼다 지쳐 잠든 그녀 옆에

그 드레스를 살며시 놓고 왔다. 다음날 에닌이 그 드레스를 다시 가지고

왔지만, 로웨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입던 드레스는 나한테는 너무 크다고. 그냥 네가 써. 안 입으면

안 입었지 큰 옷 입고 바보 같아 보이기는 싫어.

사실, 공연 축하 파티에 주연이 드레스가 없어서 나오지 못한다면 얼마

나 비참하겠는가. 에닌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런 아이가 준 드레스를

기어코 입고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돌려

준 것이었다.

그 때 대기실로 낯선 소년이 나타났다. 로웨나는 그 소년이 방금 전 그

신사의 명령을 받은 그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소년은 빅틴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공주 역을 하셨던 분께 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당장에 흥분하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질시와 부러

움이 가득 차 오른다. 소년의 손에는 붉은 장미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

에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소년은 주인이 명한 대로 에닌에게 꽃다발을 전해 주었다. 아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고, 에닌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볼을 살며시 붉혔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붉은 옷을 입은 로웨나를 찾아 달려왔다.

“로웨나 그린 양이시죠? 공연은 봤습니다.”

“네.”

소년은 카드를 건네주었다.

“이건 다른 분께서 보내신 겁니다. 그분께서 꼭 답장도 받아 오라고

하셨는데요.”

로웨나는 카드를 펼쳐 보았다.

-축하 파티 때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붉은 장미 아가씨.

꽃은 그 때 드리지요.

느끼함에, 카드에서 기름이라도 묻어나올 것 같았지만 로웨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둘 중 누구일까? 로웨나는 카드를 접어 가지고는, 대기실의 메모

지를 찾아 그 위에 ‘본의 아니게 휘갈긴’ 글씨로(로웨나는 글씨를

어마어마하게 못썼다) 답장을 썼다.

-죄송합니다. 저는 파티에 참석할 수 없어요. 입고갈 드레스도 없는

몸이라.

사실은 사실이니까. 괜히 다른 약속 있다고 하면 거만해 보이니까, 어차

피 부자이고 신분도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가련해 보이는 쪽이 나을 것이다.

로웨나는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소년은 나가려다 말고, 로웨나에게 슬쩍

말했다.

“오늘 정말 멋졌어요, 그린 양. 주인님 따라서 자주 와 봤는데, 그렇게

멋진 마녀는 정말 처음이었거든요. 마녀에게 반할 뻔 했어요.”

로웨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에닌이 조금은 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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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며칠 한가하다가, 무언가 하려고 보니 갑자기 약속들이

무더기로;;

이것도 법칙이련가.

p.s 오타 고쳤습니다. -_-;; 어제 술 마시는 바람에 못 고쳤다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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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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