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회색 가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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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이나 자려 했던 로웨나에게 선
물이 도착했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우아한 연분홍색 드레스가 한
벌이 들어 있었다. 로웨나는 정말 졸도 할 뻔 했다.
“내가 입어 본 것 중에 이렇게 천을 많이 쓴 옷은 처음이다.”
로웨나는 벌써 드레스를 다 갈아입은 친구들에게 그 드레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로웨나의 사정을 뻔히 알기에 드레스를 갈아입으면
서도 미안해하던 룸메이트 마그렛과 리리는 이 사건에 눈을 번쩍 번
쩍 빛내며 외쳤다.
“후원자가 생긴 거야, 로이!”
“오늘 너한테 반한 신사분일지도 몰라.”
“말도 안돼! 오늘 내가 제일 못했는걸.”
룰메이트 둘은 당장에 눈을 부라렸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자학이야!”
“맞아,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네가 제일 못했으면 난 뭐냐!”
“네가 얼마나 잘했는데! 나는 네가 죽을 때 정말 울었다고!”
리허설 할 때는 둘 다 ‘좀 더 비극적이고 낭만 적으로 죽어 봐. 하나
도 안 슬퍼’ 어쩌고 투덜댔던 주제에(그리고 로웨나는 ‘마녀가 죽을
때 누가 슬퍼하냐!’ 하고 쏘아붙였다) 잘도 떠든다.
“생각해 보면 네가 제일 잘 한 것 같아, 로이!”
이리 말하는 마그렛은 사실 마녀 역을 맡은 로웨나를 너무나 부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닌도 지를로타도 별로 좋아하지 않
았기에, 오히려 로웨나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웨나는 큰 눈을 깜빡이며 드레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레이스나 리
본 같은 것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로웨나
에게는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예쁜 옷이었다.
“부자 후원자가 생기면, 너는 다시는 무용화를 깁지 않아도 돼. 휴일
날 외출할 때도 정말 멋진 옷을 입고 나가게 될 테고!”
로웨나는 그 말을 하는 리리의 엉덩이를 걷어 차 주고 싶었다. 무용
화를 새로 살 돈이 없고(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월급도 잘
안 주고), 무용화는 다 떨어졌기에 별 수 없이 밤새도록 기웠는데
그 때 이 리리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끝없이 방해했었다(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길이었건만!). 그리고 로웨나가 선배들의 헌옷을
얻어다가 밤새도록 뜯어 고치고 있을 때는 아예 통곡을 했었다.
정작 로웨나 본인은 별로 슬프지도 않고, 제발 부탁이니 저기 처박
혀 잠이나 자! 하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행운을 냉큼 집기에는 지나치게 냉소적인 로웨나
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시 이거,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 잘못 온 거 아닐까? 나한테
이런 옷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다들 으르렁 거렸다. 그 중에 마그렛이 가장 흥분했다.
“말-- 도 안돼! 이건 네 거라고, 네 거! 그리고 너,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 너한테 잘못 왔다면 돌려 줄 거야?”
“아니.”
마그렛과 리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입는 거야.”
“분명 잘 어울릴 거야! 어서 입어, 어서!”
다들 호들갑을 떨어 대며 드레스를 펼치고, 각자 숨겨 놓았던 리본과
빗을 들고 와서는 로웨나를 뚝딱 뚝딱 고쳐 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멍하니 있던 로웨나는, 그들이 다진 고기 주무르듯 주물럭대자
기겁하며 외쳤다.
“으악, 아파! 찔렸어! 핀으로 내 머리를 후벼 팔 셈이야! 으악아아,
머리를 다듬는 거냐 아니면 잡아 뽑는 거냐! 끼아아아아아, 치마는
왜 벗겨어어!”
로웨나는 정확히 10분 뒤에, 완벽하게 ‘파티 용’으로 ‘개조’되어 있었
다. 그리고 로웨나가 거울 한번 볼 틈도 없이, 마그렛과 리리는 로
웨나를 끌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로웨나는 정말 자신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질
질 끌려가며 간신히 치마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티 장입구에 도착하자, 그제야 다들 헐레벌떡 달려오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 입구 옆의 거울에 우르르 섰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자 로웨나는 룸메이트들에게 아주 감사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우아한 드레스는 날씬한 로웨나에게 잘 어울렸다.
허리와 왼쪽 어깨에 늘어진 리본도 정말 운치 있어 보였다. 가슴과
치맛단에 은은하게 수놓인 은방울꽃 무늬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친구들이 틀어 올리고 리본으로 매 준 머리도 그 드레스에 잘 어울린다.
무대 이외의 장소에서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로웨나였지만,
꽤 예뻐 보이자 기분이 좋았다.
“자, 어서 들어가자.”
마그렛이 말하고는, 방금 전의 호들갑스런 모습을 쫘악 빨아 낸 듯이
지우고 사뭇 우아한 숙녀가 되어 연회장 안으로 사뿐 사뿐 들어갔다.
리리도 역시나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다.
로웨나는 속으로는 깔깔 웃으며 그들을 따랐다. 정식으로 초대되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도망가고 어머니가 요양원에 간
후로, 돈 될만한 것은 집과 함께 모두 팔아 치워 옷이라고는 교복과
거의 다 공짜로 얻은 옷들뿐이라, 드레스는커녕 제대로 된 나들이
복 한 벌 없었다.
연회장 안에는 한껏 꾸민 학생들이 볼을 상기시킨 채 돌아다니고 있
었다. 그리고 빅틴 여사는, 그들 모두를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소개
하고 있었다. 제일 형편없는 아이도 빅틴 여사의 입에서 한줌 같은
장점이 찾아내어져 추켜세워졌으며, 잘 하는 아이들은 당사자가 얼
굴을 붉힐 정도로 칭찬해 주었다.
로웨나는 두리번거리며 공연 때 보았던 검은 머리의 신사를 찾았다.
그러나 금방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검은 머리의 신사들은 지나치게
많은데다가, 로웨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그를 찾던 로웨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볼을 상
기시키고 있는 에닌을 발견했고, 동시에 놀랐다.
에닌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얼마 전에 로웨나가 돌려 준 그 드레스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어울리는 푸른 빛 감도는 비단 드
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장미꽃 무늬를 수놓고 얇게 너울대는 레이
스들을 팔랑이는 최고급 드레스였다. 당장에 저 옷을 입고 황실의 연
회에 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목과 귀에 반짝이
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는 분명 에닌이 아주 아끼던 보석들
로 지난번에 모두 빼앗겼던 것들이다.
로웨나는 대체 누가 저런 선물들을 안겨 주었나, 묻고 싶어졌다. 마
그렛이 로웨나에게 물었다.
“로이! 저거, 너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나도 몰라.”
“나, 저거 알아. 우리 언니가 의상실에서 일해서 알아! 저 옷을 만든
천, 브리카니아에서 수입한 거야. 저 색 분명히 기억해.”
리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마그렛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혹시, 저 애집이 다시 부자가 된 거 아닐까?”
“설마, 말이 되냐. 지난 번 태풍 때문에 그 집의 배란 배는 모조리 가
라앉았다고. 우리 삼촌이 저 애네 상선이 단 한척도 돌아오지 않았
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박쥐 도둑이 선물이라도 한 건가?”
“박쥐 도둑이 뭐니? 박쥐 신사라고!”
“신문이 붙이는 무진장 촌스러운 이름 따위 틀려도 상관없어.”
리리와 마그렛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로웨나는 에닌이 얼마 전부터 갑
자기 표정이 밝아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때는 강하게 마음을
다잡아서 그런가 했는데, 이제 보니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설마 정말 박쥐 총각인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빅틴 여사가 다가와 로웨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변 사람
들의 시선이 로웨나를 향했다. 그러나 로웨나는 에닌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어,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로웨나 그린 양이랍니다. 오늘 공연을 보신 본이라면 아실 테지만,
제가 가르친 아이 중에 가장 특별한 아이지요.”
에닌이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그 선량한 푸른 눈에는, 로웨나가 칭찬
을 받는 것에 대한 기쁨이 가득했다. 루웨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버렸고, 그제야 자신이 찾던 그 검은 머리의 신사를 발견했다.
그는 로웨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빅틴 여사가 그 신사가 로웨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로웨나를 데리고 그에게 갔다. 신사는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정중하게 말했다.
“트레비스 카트슨이라 합니다, 로웨나 그린 양.”
그리고 그는 로웨나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키스했다.
“감사합니다. 드레스도 정말 감사해요.”
트레비스는 로웨나의 몸을 아래위로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워낙에 급히 장만한 거라 사이즈가 안 맞는 군. 다음에 선물
할 때는 딱 맞는 것으로 해 주지.”
역시나 이 사람이다. 로웨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금방 클 테니까, 다음 달이면 드레스가 맞게 될 거에요. 그 때 보여
드릴게요.”
트레비스는 빙그레 웃었다.
로웨나는 그가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챘다. 한
번 본 여자의 사이즈를 정확하게 아는 남자라면, 충분히 주의해 둘
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 안에는 천진해
보이는 반짝임도 담겨 있어 긴장을 풀어 주었다. 빅틴 여사가 서로
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했다. 그러나 빅틴 여사가 트레비스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하자 트레비스는 슬쩍 눈치를 주었다. 빅틴 여사는 빙
그레 웃고는 트레비스를 그저 오페라에 관심이 높은 귀족이라고만
소개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를 뜨자, 트레비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주 인상적이었소, 그린 양.”
“로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린 아이들은 어른처럼 대해주면 좋아하던데.”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이 되기를 열망하고, 그러면서도 어른들이 돌
봐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요. 하지만 트레비스 씨, 저는 그냥
귀여움 받는 것이 더 좋아요.”
“아직은 아이 같아서 인가?”
“설마요. 가소로워 보이는 것 보다는 귀여워 보이는 것이 더 낫지 않
을까 해서요.”
트레비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와 이야기 하다 보면 밤새도록 즐거울 것 같군....... 그래, 로
웨나 그린 양. 오늘은 내 파트너가 되어 주면 좋겠는데.”
“저야 영광입니다. 하지만 사교춤은 정말 엉망인데, 오히려 낭패를 당
하시고 말거에요.”
그리고 로웨나는 치마를 살짝 들고는 활짝 웃었다. 그런 로웨나를 보
는 트레비스의 눈동자에, 천진한 빛이 몇 번인가 더 반짝였다. 마치
작은 보물을 발견한 아이 같은 매우 즐거운 눈빛이라, 로웨나는 그
가 좋아졌다. 저런 삼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하군요.”
“내가? 아니, 대체 왜.”
“‘대가 없는 행운은, 특히나 낯선 사람이 갑자기 안겨 주는 그런 대가
없는 행운은 행운이 아니라 덫이야. 내가 받은 선물이 네 목을, 네가
받은 술들은 네 피를, 네가 삼킨 음식은 네 살을 원할 거다.’”
“어디서 나오는 대사 인지는 알고 있나?”
“엘드모어 3세, 엘드모어 왕이 2막 중반에 의문의 기사와의 사랑에
빠진 딸에게 하는 충고지요. 물론 제 친구도 언제나 제게 그 충고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의심하시는 건가?”
“그냥 좋은 꿈을 꾸는 거라 생각할래요.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이 드
레스가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노래는 언제부터 시작했지?”
“열한 살 때부터요.”
트레비스가 의외라는 듯 가볍게 탄성을 냈다.
“그렇다면 입학하기 바로 직전에 시작한 건가? 꽤 늦게 시작했군.”
“네, 그 때 친구가 노래 공부를 했는데....... 너무 예뻐 보여서요. 하지
만 그 땐 정말 형편없었어요. 황실 아카데미에 어떻게 입학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라니깐요.... 그래도 아주 예전에 연극 배우이셨던
어머니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던 덕에 완전히 처음인 것만은 아
니었어요.”
“연극배우라....... 그 쪽 사람들과도 아주 약간 알지.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지?”
“말씀 드려도 모르실 거에요. 유명한 분은 아니시거든요.”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린 양의 어머니를 기억하게 될 거
요.”
그러나 그 말을, 로웨나는 듣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초청된 귀빈들과 학생들, 그리고 참석한 발레 아카데미의 모든 학
생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로웨나는 무슨 일이 났는가 싶어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린 곳을 돌아
보았다. 뒤따라 더 많은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있다.
파티장 입구에, 새로운 손님이 도착해 문전을 지키던 하인과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것은 그 새로운 손님이 유명
인사라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처음 만난다 할지라도 평생토록 기억할 만한 남자
였다.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그 망토 틈으로
는 흰 정장이 보였다. 키는 컸으며, 어깨나 팔은 상당히 단단해 보
인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회색이었고, 얼굴의 절반은 머리
카락에 나머지 절반은 망토 깃에 가려져 있었다. 하인이 그의 망토를
벗겨 주었다.
“성함에 어떻게 되십니까, 손님.”
하인이 묻자, 남자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알렉산더 란슬로요. 손님 명부에 분명 있을 거요.”
순간 로웨나는 멈칫 했다. 축하연장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머리카락
과 같은 색의 회색 가면에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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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이것 저것 한 것 같기는 한데, 언제나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만한 자신이 되기까지는 대체
얼마나 걸릴까요.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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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