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편
회색 가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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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손님의 등장으로, 주변 공기는 차가운 안개에라도 덮인 듯 달
라져버렸다. 모두 무언가 잘못 집어삼킨 듯한 표정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너무
도 당연한 자리에 온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잿빛 머리카
락은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지만, 단정치 못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면 아래의 턱 선은 아주 단아했다. 코를 덮고 볼을 덮어
턱으로 흐르는 가면은 입술만은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입술 선도
단정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연회장을 살폈고, 그의 시선이 닿자 모
두들 고개를 숙이고 돌리며 못 본 척,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척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웨나와도 마주쳤다. 로웨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고, 그랬기에 남자와 눈이 정면
으로 마주칠 수 있었다.
붉은 눈-
로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면 아래에서 번득인 그 눈은, 분명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린 양.”
트레비스가 책망하듯 불렀을 때에야 로웨나는 놀랐던 얼굴을 돌려 그
를 볼 수 있었다. 트레비스는 실망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로웨나를
보고 있었다.
“어머나, 정말 죄송해요.”
그러나 손님은 지나치게 특이했다. 아니, 기괴했다. 시선을 돌려도 그
남자의 모습은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린 양은 저 남자를 처음 보겠군.”
“저는 이제 열여섯 살짜리 학생인걸요.”
“하지만 상류층 학생을 친구로 두었다면 알 텐데.”
로웨나는 입술 한쪽을 살짝 말아 올리며 웃고 말았다. 나쁜 버릇 중
하나였는데, 상대의 말이 기가 막힐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만 놀아요.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에게
배워온 배운 브리칸 어로 소소한 잡담까지 나누고, 저 같은 중산층
출신 아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지요. 졸업할 때까지 이야기한 번
나누지도 못해요. 어쨌건......무례한 질문이 아니라면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로웨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트레비스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고는
말했다.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 불리는 사람이오. 신분은 물론 정확하지 않소.
귀족 연감에 그의 이름은 없으니까, 그저 어디선가 작위를 샀을 거
라고만 추측할 뿐이지. 뿐만 아니라 나이도, 출신지도, 심지어 얼굴조
차 알려지지 않았어. 그저, 니콜라스 추기경의 소개로 브란 카스톨
의 사교계에 나타났고, 그 후로 계속 화제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는 것 뿐. 그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부와, 아무도 모르는
과거 때문에.”
그리고 트레비스는 눈을 찡긋 했다.
“뿐만 아니라 홀라그로 성의 새로운 주인이지.”
로웨나는 정말 놀랐다. 임금님이 돌아오는 옛 동화라도 듣는 듯한 기
분이다.
“세계 각지에 흩어졌다가 간혹 보이곤 하는 사람들 중에 간혹 그를
만났다는 사람이 있지. 맙소사,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저 사람이 어느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왕이라도 되는 듯 해. 궁전을 통째로 가진
듯한 막대한 부, 지질학자나 역사학자도 놀라게 하는 지식, 황족
처럼 나긋나긋하고 교양 있는 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
분하고 상상력을 부추기는 대는 넘칠 정도지.”
로웨나는 다시 그 남자, 알렉산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로웨나를
등진 채 빅틴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빅틴 여사인지라 그 기괴한 손님에게도 축하연의 주최자로서의
품위를 가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웨나는 다시 트레비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둘 다 결
말을 모르는 소설 이야기를 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웨나가 먼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정말 소설 같군요.”
“소설 같지. 아주 음산한 과거를 숨긴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그런
소설.”
“저는 조연이라 슬프네요. 아니, 조연도 아니에요. 소설 문장에 이런
게 하나 추가 되겠지요. ‘파티장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 되었다.’ 제 역할은 그 사람들 중 하나고요.”
그렇게 말하니, 트레비스의 미소가 다시 방금 전에 문득 스치고 지나
가곤 하던 그 아이 같은 천진함을 띠었다.
로웨나는 다시 한번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꽤나
계산 적인 남자로 비추어질 테지만, 어린 소녀인 로웨나를 상대하는
지금은 오히려 천진해 보인다. 어쩌면 그것 역시 계산된 것이고
로웨나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서인 지도 모르나, 그래도 지금만큼
은 마음에 든다.
로웨나는 그에게 웃어 주고는, 다시 알렉산더를 보았다. 그 남자는
아직도 빅틴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제는 옆얼굴이 보
였다. 남해의 조각상을 보는 듯한 옆얼굴 선이었다. 그의 존재가 소
설 같듯, 그의 모습마저도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그의
모든 것은 ‘허구’로 시작되어 ‘허구’로 완성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런 종류의 사람이 늘 그러하듯, 그는 현실 속에서 간혹 떠 올렸다가
웃어 버리고 마는 그런 기대감마저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 때 트레비스에게 오늘 로얄 석에서 그와 같이 있던 청년이 다가왔
다. 그는 정말 흥분한 듯 볼까지 붉히고 있었다.
“가면 신사가 왔어요. 보셨지요? 정말이에요! 지난 니콜라스 추기경
의 파티 때 뵙기는 했는데, 이런 자리에 나올 줄은 몰랐어요. 아,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지요?”
트레비스는 로웨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잠깐 실례 하겠다는 뜻
이며, 그 실례 하는 동안 이 귀찮은 남자는 잘 치워놓고 다시는 오지
않도록 조처하겠다는 뜻이다. 로웨나는 눈치가 좋은 편이었다.
“제 친구에게 가 볼게요. 이야기 나누세요.”
로웨나는 그리 말하고는 나왔다. 그리고 마그렛을 찾을까, 리리를 찾
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로웨나에게 달려온 것은
에닌이었다. 에닌이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을 거라
생각했던 로웨나는 그녀가 갑작스레 팔을 잡아당기자 당황했다. 에
닌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그 분이야!”
“응?”
“저 분이야. 저 분이....분명 저 분이 나한테 이 선물을 보내신 거야.”
그제야 로웨나는 에닌이 터무니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기억
해 냈다. 트레비스와 이야기 하느라고 마그렛과 리리와 함께 추리
하던 것을 아예 잊어 버렸던 것이다.
로웨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
었다. 로웨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지만, 에
닌은 그 하얀 볼을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흥분해 있어서 무어라 말
을 건넬 수도 없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
로웨나는 에닌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쏠려 있었고, 로웨나가 턱을 들고 사람들을 둘러보자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렇게 겉으로나마 둘 만 있게
되자, 에닌은 그 천진한 미소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제 이 선물이 도착했어. 특별 우편으로 도착한 거라서 학교 우체
국이 전해주지 않았던 거지! 상자 안에, 세상에나 이 드레스와 내가
빼앗겼던 목걸이가 들어 있었어!”
“보낸 사람이름이 적혀 있었니?”
“아니. 이니셜로만 A. L 이라고 적혀 있었어. 그리고 오늘 찾아오겠
다고, 검고 흰 옷에 회색 얼굴을 하고 찾아오겠다고 했지..... 저 분
이야.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에닌은 물기 맺힌 눈으로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로웨나도
그를 보았지만, 그는 에닌 쪽은 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닌이 두 손을 모으고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어. 정말 그분이라면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이런 동화 같은 일이 정말 일어난다니. 울어 버릴 것만 같아.”
“너니까 가능하겠지.”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너니까, 너희 집은 지금은 몰락 직전이지만, 어
쨌건 굉장한 집이었고, 그런 집이 몰락했으니 너를 도와주려는 사
람이 생기겠지. 나는 우리 아버지 놈 도망갔을 때 아무도 안 도와
주더라.
로웨나는 자신의 입술 끝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자신을 더욱 비웃어 버리며, 에닌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이?”
“가자. 너 혼자 놔두면 아마도 파티가 다 끝날 때 까지 한마디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로이-! 나,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 로웨나와 에닌은 어렸을 때-즉, 에닌의 아버
지인 살비에 마델로 씨가 마그레노 항구의 시장이었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당시에, 당연하게도 로웨나의 집은 별 볼일 없었다.
로웨나의 아버지가 몰락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리 멀지 않은 친
척 사이인 가문이 황실의 한 줄기였기에 어머니 밀드레드는 반드시
그 정도 되는 신분의 아이와 사귀어야 한다고 우기다 보니 로웨나
가 그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정말 반기지 않는 손님이었다), 착한
에닌은 로웨나를 가엾게 여겨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에도,
부잣집 딸인 에닌은 언제나 로웨나에게 자신이 쓰던 귀한 물건들을
선물로 안겨주었고, 거절하면 자신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버릇
이 여전해서, 드레스마저도 준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물들을 받을 때마다 로웨나는 언제나 치를 떨었다. 에
닌은 정말 어린아이였다. 자신이 주고 싶어 준다. 너무나 천진하게.
그러나 그렇기에, 그녀는 그것을 받는 상대방의 기분이 어떠한 지
전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 뿐이었으니까. 동화
속에서 살고, 그래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보호해 주고, 그런 자신
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에닌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로웨나는
에닌에게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았다. 해도 소용없으니까.
곧 로웨나는 알렉산더라는 괴이한 신사 앞에 서게 되었다. 소녀들이
다가오자, 그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
다렸다. 로웨나가 말했다.
“로웨나 그린이라고 합니다, 신사님.”
“알렉산더 란슬로요, 그린 양.”
멀리서 들었을 때보다, 더욱 이상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분명 깔리
는 듯 하면서도 부드러이 파고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로웨나
에게는 정말 오싹할 정도로 이상하게 들렸다.
로웨나는 에닌의 손을 놓았다.
“제 친구가 란슬로 님께서 자신이 찾는 분이 맞는 지 확인하고 싶다
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답니다.”
알렉산더의 입술이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그의 눈동자에, 로웨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담색이었다. 방금 전의
그 붉은 빛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눈색은 그렇
게 평범한 빛으로 로웨나를 향하고 에닌을 향했다. 그는 아무 답도
없었지만, 에닌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그에게 달려가 그 목을 끌어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로웨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 희망을 주셨어요. 오늘의 공연은
당신을 위한 것이에요.”
로웨나는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로웨나는 모여드는 사람들 틈으로 숨었다. 그러나 곧
트레비스에게 붙들렸다.
“트레비스 씨.”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주겠어, 그린 양?”
“에닌은 제 친구에요. 그리고..... 에닌의 집안은 마델로 상회지요.”
“알고 있어. 그런데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과는 어떤 관계지?”
로웨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신사 분이 선물을 보냈고, 그것을 에닌이 받았다는 것 정도 밖에
는 몰라요. 아마도..... 에닌의 아버지와는 친구사이인 것 같은데요.”
트레비스는 로웨나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로웨나는 덧붙여 말했
다.
“어쩌면 외국에서 만났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돈이 남아도니, 잠깐
알았던 사람의 딸의 신세가 매우 처량해 진 것을 알고 도와주려는
수도 있고요.”
트레비스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 낭만적인 가설을, 자신은 믿고 있는 건가?”
“지금 상황은 그래 보이는 데요.”
“빈정대기 좋아하는 내 친구 놈에게 의견을 묻고 싶군.”
“친구요?”
“아, 이름 이야기 하면 알 테지만, 그 친구 명예를 생각해서 그만두
지. 어쨌건 밤낮 빈정대고 투덜대는 것이 고독한 삶을 채우는 한
방편인 군인 친구 녀석이 하나 있지. 지금은 서부 최전선에 있으니
고독할 틈도 없을 테지만.”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희곡을 쓰고 있는데, 그 빈정거림 가득한 대사를 읽다 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로웨나는 다시 에닌이 무얼 하고 있나 살펴보았다. 에닌은 그와 이야
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로웨나를 발견하자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오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챈 로웨나는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로이!”
로웨나가 오자마자 에닌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눈에 눈물이 글썽이
고 있었고, 그 기쁨의 눈물은 방금 전의 그것과는 너무도 틀렸다.
로웨나는 에닌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은, 지난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아니, 이 기쁨은 그 때와는 비할 바가 못
될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아버지의 마지막 배가 항구에 왔대! 아버지와 함께!
이제 된 거야! 이 드레스는 아버지가 보내신 거야--! 맙소사, 로이!”
“정말? 그럼 이분은........”
로웨나는 방금 전의 경계를 잊고 알렉산더가 마치 예전부터 아는
사람인 듯이 묻고 말았다.
에닌이 말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시래! 아버지가 마그레노 항에 계시느라 이번
발표회에 못 오시니까, 이분께 대신 부탁한 거래! 맙소사, 너무 행
복해!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야! 로이, 그리고 너야 말로....나는
정말 이제 너야 말로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 정말
어려워 졌을 때 내게 친절했던 사람은 너 뿐이니까.”
그러나 로웨나는 에닌의 키스를 받으며 생각했다. 미안, 나는 그렇게
착한 아이는 아닌 걸. 너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너에게 별로 기대하
는 게 없으니까 그랬던 것뿐이라고.
로웨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다시 알렉산더를 보았다. 가면 속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번쩍였고, 그 순간에 로웨나는 아주 먼 예전에 그를 본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아주 먼 예전에.
순간 로웨나의 머릿속에 흰 장미 가득한 정원과, 흰 정장을 차려 입고
서 있던 신사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엉뚱해, 로이. 그 사람은 식민지의 먼 유형지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잖아. 벌써 십년도 전의 일인걸.
그래, 십년도 전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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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네, 서장의 그 꼬맹이 입니다. -_-;; 맞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 부터는 유릭 군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실 겁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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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6장 푸른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