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편
푸른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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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을 가장 먼저 알게 되는 사람은, 오랫동안 떠나 있던 사
람이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변하기에 모른다. 변하
며 같이 변하기에 무엇이 변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며 홀로 늙어간 이들은 돌아와 ‘너
무 많이 변했구나!’ 하고 푸념하며 남아 있던 사람을 서글프게 한다.
남아있던 이들 역시 자신들이 너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남아
있던 사람을 통해 확인하고(대부분의 경우 남아 있던 사람보다 떠나
있던 사람이 더욱 많이 변하기 마련이다) 더욱 서글퍼 한다.
이 여왕 메이드라 호에 탄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러한 처지였다. 아
니, 파난 섬과 본국을 오고가는 모든 배들에 그런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들 모두 식민지 파난 섬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본국을 떠나는 사람
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본국에서의 처지가 어렵기에 식민지로 온 것
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청년이 중년
이 되거나 중년이 늙은이가 되도록 식민지에 있다가 드디어 한몫
잡고 돈이 모이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선택된
행운아들이다. 식민지로 건너온 사람 중 대부분이 그 섬에 평생
동안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어 버리거나, 도처에 산재한 끔찍한 위
험에 잡아먹히거나, 나오지 않는 금광을 파며 머리에 먼지와 흰머리
만 늘리다가 그대로 그 섬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배가 시곤 항을 출항하고 파난 섬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승
객들은 갑판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의 주름을 매
만지며, 그들이 등졌던 본국으로 돌아가는 감격을 나누었다. 본국
이 얼마나 변했을까와, 자신들이 무엇으로 돈을 벌었나를 조금은
과장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그 중에 버티다 못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즉, 바닥
의 3등실 손님들). 그런 사람들은 차림새로 금방 알아볼 수 있었
지만, 모두 애써 감추고 있었다. 본국과 식민지를 오고 가며 사람들
을 실어 나르는 여객선 중 가장 크다 할 수 있는 여왕 메이드라 호
의 승무원들은, 그런 이들을 비록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눈빛이 틀리기 때문이다. 기대감은커녕 죽
은 생선마냥 잔뜩 풀이 죽어서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평선이 앞뒤와 옆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흰 구름
만이 적막하게 바다 위를 오고가게 되었다. 뜨거운 햇살에 호들갑
떨어대는 사람들이 차츰 차츰 사라지고, 창고 같은 선실로 들어가기
보다는 해가 저물 때까지 위에서 뒹굴 거리기로 한 3등실 승객들
은 오히려 늘어갔다. 승무원들은 그들이 행여나 그들 간의 다툼이나
1등실이나 특등실의 손님들이 언짢아 할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
록 지켜보았다. 온갖 손님들이 각자 층에 나누어 다양하게 머무는데
다가 배가 마그레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할 일도 없으니 싸움은
‘심심해서’ 일어난다.
오늘 갑판을 담당하게 된 승무원은, 지루해서 녹아내릴 듯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는 신참이었고, 신참이었기에 이런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상류층의 아리따운 숙녀들이나 팁을 두둑
이 주는 신사들을 안내하는 것은 고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그는, 상류층 사람들이 주로 거니는 뱃머리 근방을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갑판의 벤치에 느긋하게 앉아 등을 기대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간편한 셔츠에 검은 바지뿐이었으며, 그
나마도 항구에서 흔히 살 수 있는 하등품이었다.
시선을 느끼자,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열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얼굴 생김새가 묘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딱히 이상한 구석은 없는데, 먼 곳에서 온 듯 낯선
풍모가 어슴푸레 어려 있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답지 않게 꽤나 무관
심한 눈빛이었고,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승무원과 눈이 마주쳐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제야 승무원은
소년의 옆에 놓인 책을 발견했다. 꽤나 두툼한 책으로, 표지에는
‘탈브레 전투, 전후 10년’이라 적혀 있었다. 책에 관한한 전무한
지식과 무관심을 별로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승무원인지라, 그냥
역사책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책 자체에 집중
하여, 자신이 자랑스레 여기는 추리력으로 소년의 정체에 대해 생
각해 보았다. 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중산층 소년인가? 어쩌면 학비
에 돈을 다 써서, 배는 3등 실로 잡았는지 모른다. 문득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승무원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행은 즐거우십니까.”
“네.”
소년은 역시나 무관심한 얼굴로, 그 얼굴만큼이나 무관심한 어조로
답했다. 혈기 왕성한 사내아이답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였다. 승무
원이 물었다.
“혹시..... 학생입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아, 그럼.... 본국으로 유학 가시는 건가요?”
“다른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공부는 아닙니다.”
어른스럽고 예의바르긴 했지만 어딘지 물어 보는 사람 민망하게 하는
무관심한 답변이었다. 젊은 승무원은 네가 내 동생이었으면 한방
감이다,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메이드라 호에 탄 것으
로도 충분히 편안하실 테지만 말입니다.”
“아, 있습니다. 여쭤 볼 것이 있는데요.”
“아, 네.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소년은 다시 뱃머리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해군 장교 제복을 입은
키 큰 청년 한명과, 꽤나 엉망으로 차려 입은 갈색 머리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이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장소가 멀어 꽥꽥대
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배의 특등실 손님 중에, 혹시 헨리 카밀턴 경이라는 분이 계십니
까?”
순간 승무원은 뭘 잘못 들었나 했다. 그래서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
으려 노력하며(그러나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의 표정은 정말, 누가
본다면 ‘뭐야, 당신! 내 꼴이 그렇게 우스워!’ 하고 주먹이라도 날
릴 법 했다) 되물었다.
“저기, 혹시 헨리 카밀턴 각하 말씀인가요?”
“아, 네. 전 서부 전선 사령관이셨던 헨리 카밀턴 경 말입니다. 행여
동명이인은 아니겠.... 아, 죄송합니다. 그런 것까지 아실 수는 없겠
군요.”
승무원은 이제 참으로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보고 있었다. 소
년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듯 무관심하게 승무원을 보고 있
었으며, 그랬기에 승무원은 더욱 애처롭게 소년을 바라보아야 했다.
소년이 말했다.
“계시다는 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마, 맞습.......니다만. 저기, 손님. 행여나 엉뚱한 생각을 품고 계신다
면, 저희들이 손님께 정중하게 주의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카밀턴
님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합니다. 행여나 그렇게 묻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선장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명령까지 들었답니다.”
소년이 빙긋 웃었다.
“엉뚱한 생각이 뭐죠?”
“네? 아, 음-”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어쩌고 하면서 높은 분들에게 치근덕대지
말라는 말이었지만, 그 무구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어쨌건 다시는 헨리 카밀턴 님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이건 손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있다는 건 확인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물
어 볼 일은 없습니다.”
승무원은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턴 장군이라면, 그 제멋대로이고 엉망진창이며 덜렁대는 성격 덕
에 어느 날의 어느 배에 탈지를 미루고 당기고 잊어먹고 하다가 드
디어 이 배에 탄 것이었다. 그 덕에 승무원은 주의를 듣고 오늘 그
런 일이 없다 하고, 다시 주의를 듣고 오늘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대 여섯 번 거듭한 끝에 ‘한번만 더 그 장군인지 뭔지 때문에 불
러다 놓으면 영웅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다에 던져 버리겠어!’ 하
고 모든 승무원들이 울부짖는 순간에 이 배에 탄 것이다.
-카밀턴 경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에 내게 데리고 오도
록! 어떤 사람이 묻든 상관 말고 데리고 와!
승무원은 지금이 선장이 그렇게 으름장을 놓던 대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 소년은 무관심한 얼굴 덕에
위험해 보이기는커녕 위험에서 지켜줘야 마땅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분에 대해서는 왜 여쭙는 거지요?”
그러자 소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
다.
승무원을 그것을 보는 순간에 소년이 왜 그에 대해 물었는지 알게 되
었고, 또 선장이 말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것은 국방부에서 발행하는 군인 신분증으로, 유효 기간은 석 달
뒤 까지였다. 카밀턴 경은 서부 전선의 영웅 중 하나였으니, 이런
젊은 군인들이 그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본국으로 가신다 하시기에, 행여나 이 배에 타셨을까 해서
요.....아, 이런 가야 할 시간인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소년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럼 수고 하십시오.”
승무원은 모자를 들었다 놓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소년은 그를 등지고 뱃머리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따가운 남부의 햇살이 어깨에 직사로 내리쬐어 점점 뜨거워진다. 소
년은 모자를 약간 기울여 그 햇살을 가리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워지지 않는 수평선은 저 멀리 똑바로 펼쳐져 있고, 그 위로 구
름만이 떠올라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소년은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정오 직전이었다.
소년은 뱃머리 근방의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
제 고즈넉한 식곤증에 시달리는 듯 적막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
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열었을 때, 두개의 바늘은 정확하게 정오
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년은 시계를 닫고는 품 안에 집어넣었다. 뱃머리 쪽에는, 방금 전
까지 그가 있던 곳과는 달리 깨끗하게 잘 차려 입은 상류층의 신사와
숙녀들이 거닐고 있었다. 소년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뽑아
펼쳤다. 가죽장정 끄트머리의 금테가 번쩍인다. 누군가가 다가오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탈브레 전투에 관한 책인가?”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무심하게 답했다.
“에이드리안 캅의 책이지요.”
내리 깐 눈에, 그의 발 옆에 서 있는 지팡이가 보였다. 그 지팡이는,
그것을 쥔 신사의 하얀 바지를 툭툭 치더니 다시 바닥을 짚었다.
“어디까지 보았지?”
“다 읽었습니다. 한 2년 전에요. 그리고 이 책을 받은 후 일주일 동
안 다시 읽었습니다.”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소년이 기대고 있는 난간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고는
수평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년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다 읽으셨습니까?”
“아, 나야 물론 다 봤지. 그의 빈정대는 어투와 정확한 고증에 입각한
서술은 언제나 나를 유쾌하게 하거든.....”
소년이 말했다.
“유릭 크로반.”
“헨리 카밀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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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쑤욱 큰 유릭 군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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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