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푸른 수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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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고개를 들어 신사를 보았다.
진한 갈색 머리에, 그윽한 초록색 눈을 가진 신사였다. 생각보다 젊
어 보여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인다. 눈썹과 콧날을 잘 뻗어 꽤나
단정한 인상이었으며, 이마는 조금 넓은 편이었다. 체격은 유릭보
다 조금 크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친절한 삼촌처럼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이 정도 되는 역사 학자의 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을 정
도로 멍청하지는 못합니다. 말씀하셨듯이, 그는 누구나 인정할 정
도로 정확한 고증을 하는 학자이며, 그 때문에 그의 말을 아주 신
뢰합니다. 다르게 서술된 것이 있다면..... 예를 든다면 랑코어와 비
교한다면, 당연하게 캅의 말을 믿지요.”
“랑코어 역시 탁월한 독서가이며 장서가인 동시에, 놀라운 지식을 자
랑하는 학자인데도.”
“그의 말은 세련된 동시에 진부합니다. 그가 으쓱대며 내놓는 결론은,
말은 매끈하지만 본질은 착한 교장 선생님의 조회연설에서 두어 번은
들었을 법한 상식이지요. 모든 것을 알지만 새로운 것은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랑코어이며, 그렇기에 저는 캅의 책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적어도 얄미운 사람에게 잘난 체 할만한 말 한마디
정도는 가르쳐 주거든요.”
그리고 유릭은 그 책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덕택에 아주 잘 봤습니다, 헨리 카밀턴 각하.”
헨리 카밀턴 경은 손을 저었다.
“아니, 자네가 가지게. 그걸 가지고 정오가 되는 시간에 정확하게 난
간에 기대어 서 있어 달라 자네에게 전했을 때부터, 그것은 이미
내가 자네에게 선사한 선물이 된 셈이야. 그리고 그냥 카밀턴 경,
내지는 씨라고 부르게. 각하 어쩌고 하니, 다시 전함에 탄 기분이군.
난 공식적으로는 휴가 중이라고.”
“이건 초판본입니다. 이렇게 처음 보는 소년에게 선물하는 것을 서적
상들이 본다면 기겁할 걸요.”
“아, 부담되면 빌려 주지. 대여기간은 자네 정하기 나름이야.”
“맙소사,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직접 자네를 골랐으니 당연한 선물이라 생각하게. 게다가 그
책을 프리델라에게 주었을 때만 해도, 그걸 정말 읽고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카밀턴 경은 외알 안경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유릭은 그것이 아무래
도 조금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의 버릇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턴이 말했다.
“어디가 편하겠나.”
“이곳이 좋습니다.”
카밀턴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 다 알고는 있을 테지만 그래도 제대로 소개하지. 전 서부
군 사령관이자, 은십자 기사단원인, 헨리 카밀턴일세.”
“현재 특무부 소속이자, 프리델라 각하의 명으로 경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유릭 크로반 하사입니다.”
“프리델라와 내 관계에 대해서는 들었나?”
“5년 전에 이혼한 사이라고는 들었습니다.”
카밀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거창하게 하고는 말했다.
“프리델라에게 자네에 대한 것은 다 들었네. 물론 그 모든 것이 ‘프리
델라가 중요하다’라고 판단한 것들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말이야.”
“난처한 말들이 많았겠군요.”
“프리델라가 늘 그렇듯, 정확하게 절반은 칭찬이고 절반은 험담이었
어.”
“그분은 언제나 정확하고 공평한 것을 좋아하시지요.”
카밀턴이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렇게 언제나, 늘, 항상 사람 질리게 하지.”
“그게 이혼 사유입니까?”
카밀턴의 눈썹이 치솟아 올랐다.
“상관의 사생활을 묻는 게 아니야.”
“하지만 장군님은 제 사소한 것까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건 공평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야. 그리고 문서는 문서일 뿐이
지, 자네의 전부는 아니네. 나는 그런 문서는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자칫 잘못하다가는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
게 되거든- 그래, 자네 경력은 모두 훌륭했네만 난처한 흠집이 하
나 있었어.”
“제 아버지 말씀이십니까?”
카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도 믿어 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과하게 노력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프리델라 님은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게 건네 준 그 즐비한 경호원 후보 명단에 자네를 포함시
킨 것이겠지. 프리델라의 선택이라면 믿을 만 해. 그녀는 불확실한
것이라면 언제나 ‘아닌 것’으로 분류해 버리니까.”
그리고 카밀턴은 품 안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크로반 하사, 자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프리델라 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좋아, 말 해보게. 물론, 자네에게 프리델라가 자네에게 한 말을 그대
로 해 보라는 말이야. 당연히 처음부터.”
“저는 징집병이고, 석 달 뒤에 제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제 마지막 임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또, 이 임무 덕에 자네가 식민지 밖으로 의무 복무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나갈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제대가 넉 달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러 갔을 때, 프리델라 님
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푸른 진주 섬에서 석 달간의 요양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헨리 카밀턴 경을 경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리고?”
“프리델라 님께서는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현재 카밀턴 경께서는, 지난
부상을 비롯하여 생명의 위협이라 할만한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
런 만큼 믿을 만 하며 믿을 수밖에 없을 때 조금은 더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을 파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프리델라가 그리 해야 한다고 했지. 그리고
내게 대략 쉰 명가량 되는 명단을 들이 밀며, 그 중에 경호에 적임
자라 생각되는 사람을 직접 고르라고 했어. 맙소사, 한번 읽어 보는
데만 밤샜다고.”
“그것 역시 프리델라 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그 때문에 당황했습니다.
그 명단에는 분명 더 믿을만한 집안 출신의 특무부 군인들도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죄수의 아들인 저를 고르셨다는 것에.”
“자네의 근무 성적을 보면, 매우 훌륭했네. 아주. 강등 당한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봐 줌세. 자네 잘못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유였으니. 그러니 나는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인정이며,
자네의 이력서의 어두운 부분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는 확실한
공훈인 동시에, 나정도 되는 인사와의 친분이라 생각했네. 만약에
자네가 아버지 닮아 반골이었다면 그런 성과를 낼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자네라면 분명히 최선을 다 할 거라 생각했네.”
“하지만 제가 프리델라 님께 청한 보상은 그런 것이 아닌데요.”
“그래서 더 놀랐지. 식민지 금화로 1만 크롤린과 본국에서의 정착금
약간. 그리고 브란 카스톨 사범 전문대에 입학 할 때의 소개서 한
장. 솔직히 프리델라가 그렇게 전했을 때 좀 황당했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않으셨지요?”
“프리델라가 은밀히 말한, 자네의 원래 이력서에 포함되지 않은 단
한 줄이 내 흥미를 당겼거든.”
유릭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뿐만 아니라 특무부에 적절하다 못해 화사한 경력을 가지고도 군을
떠나려 하고 심지어 ‘선생님’이 되겠다고 한다는 점도 역시나 내
흥미를 끌었네. 대체 뭔가?”
“아버지가 군인은 되지 말라 하셨지요.”
“응?”
“의무 복무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상 군인으로 복무할 생각은 없
습니다. 교사가 되겠다는 건, 군 입대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군인으로 남아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네가 꽤 자질이 있다 할지라도?”
“네.”
“자네 지위의 특성상 군에서 나간다 할지라도 군에서 열심히 쫓아다
닐 거라는 걸 알아도?”
“네.”
참으로 깔끔한 대답에 카밀턴 경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많이 모르는 군, 자네. 제법 영리해 보이기는 하는
데, 가끔은 아버지가 해 준 선택을 바꾸는 게 더 좋은 경우가 있다는
건 모르는 것 같아- 좋아, 그렇다면 어쨌건 내가 자네에게 그것
을 약속하면 자네는 내 경호원이 되는 거로군. 그게 언제까지지?”
“석 달 간입니다.”
“그 뒤로도 위험해 진다면?”
“경께서 새 수행원을 찾으셔야지요.”
“좋아. 그 동안이라도 잘 해보자고. 그리고 자네, 우선 방부터 내 방
으로 옮겨오게. 짐 챙겨서 와.”
그렇게 말하고는 카밀턴은 우아하게 돌아섰고,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온 갑판에 걸려 넘어졌다. 유릭이 당황할 틈도 없었다. 카밀
턴은 잽싸게 일어나 그런 일 따위 없었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다가 돛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유릭은 애써 모르는 척 해 주었다.
유릭이 카밀턴의 선실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카밀턴의 선
실은 3등실에서 그에게 할당된 공간의(네 사람이 한 방에서 자므로
1/4로 나누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정확히 5.75배라는 것이었다.
꽃봉오리 모양의 조명등에, 벽은 깨끗한 미색 벽지로 화사하게 덮여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유릭 자신이 덮고 자던 이불보다 부드
러워 보였으며, 금빛 술 달린 테이블보는 여태까지 유릭이 입은 모
든 옷값을 다 합친 것보다 비싸 보였다.
유릭은 들고 온 옷가방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이 호화로운 방 안에서, 그 낡은 가방은 대리석 위에 얹힌 돌덩이처
럼 어울리지 않아 보였으니. 선실로 오면서 계단을 헛디뎌 미끄러
졌던 카밀턴은 파이프를 벅벅 피워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순--전히 선주 취향이야. 내가 탄다고 하니, 당장에 이 방을 주더
군. 본국에 도착하면 대체 얼마나 청구할지 가슴이 떨려올 지경이야.”
“아, 네. 그럼 저도 여기서 자게 되는 겁니까?”
“수행원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유릭이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가 하나 뿐인 데도요?”
“......아차.”
그제야 카밀턴은 아주 난처한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
을 둘러보았으나, 그 방 자체가 유람 나온 귀족 부부를 위한 방이
었으므로 침대만 허허로울 정도로 넓을 뿐이었다.
“문 앞에서 잘까요?”
“나는 하인도 그렇게 안 재워.”
카밀턴은 눈썹을 찌푸려 불쾌함을 표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침대는 승무원에게 하나 가져다 달라고 하겠네. 바닥에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내 수행원이라면, 옷도 정갈하게 입으면
좋겠어. 잠깐 기다려 봐.”
카밀턴은 트렁크를 끌어내 열더니, 정장 한 벌을 꺼내어 유릭에게 건
네주었다. 그러나 펼쳐 보니 키가 큰 유릭에게는 상당히 작아 보
였다. 카밀턴은 턱을 두 어 번 툭툭 치더니, 결국 옷걸이에 걸려 있
는 옷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내 옷이네. 조금 클 테지만, 별 수 없지. 미안하네만, 그런 옷을 입
고 나와 함께 다녔다가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자네에게 무례한
관심을 표할 거야. 나는 차림새에 신경 쓰지 않네만, 다른 사람들
이 귀찮게 하는 건 싫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옷, 조금 고쳐도 되는 겁니까? 확실히 커 보
이는 데요.”
“자네에게 준 것이니, 마음대로 하게나.”
“혹시 오후에 가실 곳이 있습니까?”
“저녁 식사 하러 가기 전 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 옷을 고칠 수 있겠군요.”
“응?”
유릭은 어깨와 바지 길이를 대강 손으로 재더니, 우선 바지부터 석둑
잘랐다.
“안 입어 봐도 되는 건가?”
“제 옷 길이는 잘 압니다. 바지, 소매, 허리둘레, 가슴둘레 모두 잘
알고 있어야 맞는 제복을 입을 수 있거든요.”
“그런 거 챙겨 주는 사람 없나.”
“식민 특무부는 열악합니다.”
잠시 뒤 카밀턴은 경이와 약간의 존경심까지 담아 유릭을 바라보아야
했다.
유릭은 능숙하게 바지를 자르고, 허리를 줄이더니, 그 다음 정장 윗
도리의 소매를 뜯어내 그 어깨를 줄이고 허리를 줄인 후에 수선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군인인 이상 실 바늘은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지만, 유릭은 정말 제비가 나는 듯이 빠르게 수선을 하고 있었다.
“입어보고 오겠습니다.”
유릭은 바지와 윗옷을 들고 칸막이 너머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나
타났다. 카밀턴은 다시 한번 파이프를 위 아래로 올렸다 내려야
했다. 어깨도 허리도, 바지 길이도 처음부터 그를 위해 맞춘 듯 완
벽하게 맞았다.
유릭은 단추를 채우며 물었다.
“고친 티 납니까?”
“아니, 정말 완벽하군. 식민지 특무부에는 재봉부도 있는 건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들은 아주 열악합니다. 게다가 그나
마 있는 제복 담당마저 심하게 엉망이라, 제복을 받으면 언제나 다
시 만들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옷 고치기 귀찮아하는 상관들
옷까지 같이 고쳐야 했지요.”
“.......”
카밀턴은 프리델라가 ‘경호’를 붙여 준 건지, 아니면 하녀 비슷한
것을 붙여 준 것인지 조금 당황하며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슬슬, 단
추가 떨어진 겉옷 세 벌과 바짓단이 헤어진 바지 두 벌, 지난 번에
맞추었는데 너무 커서 입지도 못하고 있는 조끼 등등- 입지도 못하면
서 버리기도 귀찮거나 그나마도 잊어버려 늘 싸들고 다니던 옷의 목
록을 떠 올려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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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싸구려 판타지 써서 대여점 밀어 넣고 배 두들기고 산다....;;
헛헛헛.....
제가 카피레프트 정신에 입각하여 폭탑을 게시판에 올리고 있는 게 아
니랍니다. 아시죠?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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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