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푸른 수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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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턴이 가기로 예정된 나실레 섬은 본국과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사파이어 빛 바다와 눈처럼 흰 모래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산과 언덕은 사시사철 푸르며, 영롱한 빛의 꽃은 피고 지
는 것을 쉽게도 반복하여 고운 색깔이 지워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 상류층 귀족들의 발길 역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여왕 메이드라 호가 그 섬에 도착한 것은 피처럼 붉은 석양빛이 온
바다와 섬을 적시고 있는 시간이었다.
때는 봄이었으며, 사방은 가슴 울렁거리는 푸근함에 흠뻑 젖어 있었
다. 붉게 상기된 돛을 살며시 접은 귀족들의 요트가 잔잔한 바다에
흔들리고, 커다란 여객선들 역시 푸짐한 곰이 웅크리듯 항구에
정박해 있다.
파난 섬을 떠나 온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으며, 유릭이 카밀턴 경의
양말 숫자와 정장 숫자, 그에 맞는 넥타이와 장갑, 손수건, 가슴에
꽂는 꽃까지 정확하게 챙겨주기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으며,
이제 카밀턴이 “유리 군, 옷 좀 가져다주게.”라는 말을 너무도 자
연스럽게 하게 된 지 이틀 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그리고 카밀턴이
유릭의 침대 옆에 옷 무더기를 슬쩍 밀어 두고, 유릭이 수선된 무
더기를 카밀턴의 침대 위에 잘 개어 놓아준 뒤로 사흘이 지나기도 했다).
“무섭도록 자네에게 익숙해지는 군.”
“편한 것에는 누구나 쉽게 익숙해지지요.”
유릭이 입혀주는 대로 겉옷을 입으며 카밀턴 경은 그의 짐이 벌써 챙
겨져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릭의 재능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떠 올렸다. 사범학교가
아니라 어디 집사 학교 같은 곳으로 가느 추천장이라면 백장이라도 써
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집으로 오게나' 하고 단단히
이르고)
“나실레 섬의 호텔에 머물 예정이네. 그곳에 늘 준비되어 있는 특실
이 있고, 오늘은 그곳에 머물 예정이지. 그리고......... 하나 더 말해
두자면, 그 호텔도 지난번에 말한 살비에의 것이야. 짜증나게도 그
는 이 좋은 곳의 호텔들마저도 장악해 버렸지. 안타까운 일이야.”
“조심하십시오.”
“아, 내 목숨은 자네가 지켜줄 것 아닌가.”
“아뇨, 거기.......아닙니다.”
카밀턴은 벌써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고는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
다.
배에서 내리니, 벌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한대 있었다. 카
밀턴은 누구 것이냐 묻지도, 누가 보냈느냐 묻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마차에 탔다. 일주일 간 봐 왔던 카밀턴 경이란 인간에 대
한 믿음으로(응? 나도 모르는데? 아, 맞다. 거기다 이렇게 말했다네! .
...가만있자, 내가 그러기로 했던가? 생각이 안 나는 군.), 유릭
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마
부는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도 가냐고 묻는 말을 하지도 않고는
마차를 몰았다.
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석양에 젖은 바다위에 발그레하게 물든 메이
드라 호가 느긋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유릭은 볼에 닿아오는 느긋
하고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끝없이 파고 거두어 가는
광산과 농장만이 즐비한 식민지의 황야와는 전혀 다른 촉촉한
느낌이다.
“어떤가 지금?”
“많은 것이 파도처럼 변했군요. 이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사
라졌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햇
살은.........식민지보다 더 깨끗하군요.”
“기후가 틀리거든.”
수평선 너머로 끌려들어가는 저녁 해가 붉고 긴 햇살을 절규하듯 쏟
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창문으로도 회색빛 거대한 성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밀턴이
가볍게 휘파람을 부르고는 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흡혈귀 성이라 불리던 곳이지. 이곳은 아름답지만, 잔인한 쾌락에 미
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이 섬을 차지해 왔다네. 하지만 지금 주인은
여태까지의 주인보다 덜 잔인하지만, 그만큼 천박하지.”
유릭은 성을 바라보았다.
그 성은 불 지른 듯 타오르는 석양 속에서도 검어보였다.
“잔인한 쾌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앞에
금지된 선이 어디까지인 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저 성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가져 왔네.......”
카밀턴의 얼굴이 추억을 더듬는 듯 푸근하게 변했다. 그것은 전설을
말하는 음유시인 같은 표정이었으며, 카밀턴의 그 무섭고도 화려한
전력을 가진 귀족이 아닌 어느 평범한 교수나 학자 같아 보이게
했다.
“저 성은 한 이백년 전에, 와스테 윌린에게 대항했고 그녀가 죽은 뒤
에도 제국의 적이었던 루스카브의 성이었네. 그는 이곳에서, 그가
봉사하던 왕국의 몰락을 보았고 끝까지 저항했지. 그리고 마침내 파
난 섬으로 도망쳐 그곳의 여마법사였던 아그리피나에게도 도움을
청했네만 그녀는 부하의 배신으로 파난에게 죽었지....... 루스카브는
또 도망쳐야 했고, 그리고 사라졌지.”
“그리고 그람노스에 의한 항마전쟁이 있었지요.”
“와스테 윌린이 죽음으로 크리올의 마법사들은 그 힘이 봉인되었고,
그 마법에서 해방된 마령들은 자유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 흉포한
기질들을 해방시켜버렸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유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밀턴은 그런 유릭을 바라
보고는 눈길을 돌렸다.
그 때 마차가 멈추었다. 카밀턴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차에서 내렸
다(유릭은 긴장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멀쩡하게 내렸다).
호텔의 직원들이 마중 나와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이 찍어 내는 듯
정확하고 똑같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유릭은 성을 올려다보
았다.
어둠이 내리깔리며, 그 성은 훨씬 더 검어 보이는 듯 했다. 카밀턴이
유릭의 어깨를 툭 쳤다. 유릭은 고개를 내리고는 성의 현관을 들
어가, 로비로 쓰는 홀에 도착했다.
홀은 지독히도 크고, 또 차가워 보였다. 굵은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
고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데스크에 제복 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가
카밀턴 경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작지만 충분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카밀턴 경은 데
스크의 직원과 이야기 하느라 듣지 못했지만, 유릭은 무관심한 척
하며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쩔쩔 매는 직원이 있었고, 그 앞에 날씬한 소녀 하나가 그런 직원을
노려보며 쏘아 붙이고 있었다.
열일곱은 되었을까- 몸은 버들잎처럼 날씬했고, 뒤로 땋아 내린 머
리카락은 아침노을에 젖은 듯 붉은 빛 감돈다. 그러나 말투는 화살을
쏘듯 신랄하기 그지없다.
한참 싸우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바라보던 유릭과 눈이
마주쳤다. 큰 초록색 눈이었다. 아주 고집 세 보이고 자존심 강해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 까지 파낼 듯 강렬한 눈동자였다.
불길로 그린 그림인 듯. 그러나 유릭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소
녀는 이내 흥- 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뒤로 땋은 긴 머리카
락이 찰랑거리며 소녀의 가는 허리에 휘감겼다.
그 때, 막 서명을 마친 카밀턴에게 이곳 직원들과 전혀 다른 복장을
한 남자가 달려왔다. 예순 정도 되어 보이는 굉장히 늙은 남자로,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카밀턴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헤리 님!”
카밀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반대로).
“헤리 님 맞으시지요! 드디어 귀국 하신 겁니까?”
“아하, 웨번스? 자네가 어떻게....”
웨번스는 당장에 달려와 카밀턴의 가방을 잡아 채고는(카밀턴은 막
반대편으로 도망치려는 중이었다) 말했다.
“헨리에타 아씨께서 보냈답니다. 쥴리안 님께서도 이곳으로 여름 휴
가차 놀러 와 계시는데, 돌봐 드리는 중이지요.”
카밀턴이 얼굴을 확 구겼다.
“빌어먹을, 쥴리안 녀석이 여기 와 있는 건가! 뭐 하러--!”
“헨리에타 님께서 오랜만에 훌륭하신 외숙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하셨으니까요. 헨리에타 님은 가스코 공작님과 여행을 떠나셨
기에 이곳으로 오지 못하셨지만, 쥴리안이 대신 맞이하니 용서해
달라고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맙소사, 미쳤어! 그냥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분명 말했건만! 마중 같
은 건 필요 없다고. 특히나 쥴리안 녀석의 마중은!”
카밀턴은 펄펄 뛰어대며 나가려 했지만 웨번스가 그의 옷깃을 잡았
다.
“우선 호텔의 살롱으로 가시죠.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헤
리 도련님.”
카밀턴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저 웨번스가 카밀턴이 코찔찔이 시절
부터 그를 키워온 사람이라는 건 유릭에게 절대 비밀이다. (그리고
‘도련님 찾는 것은 참 쉬워요. 어디선가 콰당! 소리가 날 때 돌아
보기만 하면 되거든요.’ 하고 말하곤 하던 것 역시 비밀이다.)
“그런데 이 분은?”
웨번스가 유릭을 가리켜 보였다. 유릭이 빙그레 웃으며 막 뭐라 말하
려는 찰나 카밀턴이 외쳤다.
“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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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마비노기가 마비되니 글을 일찍 올리는 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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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7장 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