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마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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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살롱은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다. 반쯤 타다 만 벽난로 위에는
남자와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그 사이에 풍성한 꽃들이 놓여
있었다.
웨번스와 함께 헨리 카밀턴 경이 들어오자, 그 소파와 의자에 앉아
체스를 두거나 책을 보고 있던 소년들이 모두 일어났다. 이 호텔에
묵고 있는 손님들의 아들들인 듯 했다. 인원이 생각보다 훨씬 많으
니 카밀턴의 얼굴이 더욱 해쓱해졌다.
유릭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네 명으로,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었
으나 그 눈빛이라든가 표정이라든가 하는 것이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딘지 단조로운 유사함이었다. 그렇
게 그 학생들을 살피다가, 유릭은 유독 눈에 뜨이는 소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토보다도 어려 보이는 소년으로, 둥근 얼굴에 아주
옅은 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체스말을 굴리며,
내가 왜 구태여 당신들 들어오는 데 일어나겠냐고 말하는 듯
매우 시건방진 눈빛으로 유릭과 카밀턴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유릭
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강렬하다.
카밀턴은 그 소년을 그윽하게 보고는 말했다.
“나 왔으니 발딱 일어나라, 쥴리안.”
유릭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소년의 눈매와 카밀턴의 눈매는 흐릿하
게나마 닮아 있었다. 역시, 이 소년이 방금 말한 조카인 것이다.
“소개하지, 유릭 군. 쥴리안 시저, 내 조카놈이네. 이 쪽은 유릭 크로
반 군, 식민지 파난에서 온 소년인데, 잠시 나와 함께 지내기로
했어.”
“이 쪽은 내 친구들. 성 팔콘 학원 동급생들이에요, 외삼촌.”
쥴리안이라는 소년은 주변의 소년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소개했다.
분명 동갑이거나 유릭과 크게 나이차도 나지 않아 보이는 소년들이
었지만, 유릭보다 ‘분위기가’ 훨씬 어려 보였다. 게다가 카밀턴의
조카라는 쥴리안은, 아예 얼굴까지 어려 보였다. 누구나 열 두어 살
정도 되어 보인다 말할 것이다.
“모두 동급생이십니까?”
유릭이 묻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쥴리안이 처음으로 유릭에게 말
했다.
“나는 일찍 들어 간데다가 월반했으니까 열네 살이야, 유릭 크로반.”
“-씨, 라고 불러라.”
카밀턴이 주의를 주었지만 쥴리안은 무시하고는 대뜸 물었다.
“너, 식민지 파난에서 있었다고?”
“네.”
유릭은 얼결에 존댓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쥴리안이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로 왜 온 거지?”
“공부 하러 왔습니다.”
카밀턴이 켈룩 기침을 했다. 쥴리안은 눈을 번쩍 빛냈다. 심술이 자
글자글 흐르고 있었고, 조카의 성격을 지나치게 잘 알다 못해 질려
있는 카밀턴은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예상되기에 아득해졌다.
쥴리안의 입술이 슬쩍 치솟는 것을 유릭 역시 알아챘다.
“무슨 공부를 할 예정인데?”
“역사.”
“그렇다면, 지금 황제폐하의 식민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역
사 공부를 한다면, 적어도 그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유릭은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꽤나 도전적으로 빛내는 그 눈동자
안에는, 단 한번도 승부에서 져 본 적이 없는 ‘꼬마’가 가질법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유릭은 일단 승부는 피하기로 했다.
뒤에서 카밀턴이 쿡쿡 찔러대고 있었으니, 그의 입장을 헤아려 매우
상냥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응?”
갑자기 꼬마가 당황한다.
“구체적으로, 세제인지 행정문제인지 군제인지, 그것부터 말씀하셔서
어디가 어떻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계신지 정확하게 밝혀 주신 후에,
제 의견을 물어 주십시오. 그렇게 대뜸 물어 보시면 답하기 매우
난처하군요.”
쿡쿡 찔러대던 카밀턴의 손가락이 내려갔다. 상대방이 당황하거나 기
대했던 답을 놓지 않자, 꼬맹이 쥴리안은 입을 비죽였다.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이 정당하다고 생각 하냐, 이 말이야.”
“차별은 부당하기에 차별이라고 하는 겁니다. 앞뒤가 안 맞는 질문은,
원하는 답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정해 놓는 분이나 하는 거죠.”
다시 당했다. 카밀턴이 뒤에서 후우- 하고 기쁨의 한숨을 내쉬었다.
쥴리안의 눈이 다시 번쩍였다.
“그렇다면 너는 식민지인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지금
본국 정부의 정책에 항의할 생각은 없고 철저하게 복종하겠다는 뜻
이야?”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 차별정책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응?”
“어떤 것을 차별이라 생각하시는 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는 것입
니다. 만약 그 중에 제가 아직 당하지 않은 차별이 포함되어 있다면,
죄송하지만 모르겠다는 답변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경험하
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 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못해서.”
카밀턴의 손이 다시 등을 쿡쿡 쳤다.
유릭이 보니, 쥴리안의 눈동자는 위 아래로 심난하게 굴러다니고 있
었다. 뭘 어떻게 말해야 이 유릭을 꺾어 놓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식민지에도 특무부가 있나?”
유릭은 그 느닷없는 질문을 한 눈치 없는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년으로, 그 눈 안에 기대치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유릭이 분명 ‘모른다’라고 답할 거라 생각하고,
또 그럴 경우 잔뜩 으스댈 준비를 하고 있어 보였다. 카밀턴이
다시 등을 쿡 찔렀다. 역시나 적당히 봐 주라는 말이다. 유릭이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내 손가락이 너희들보다 길어, 라는 것도 자랑해야 속 시원한 사춘
기 소년들이야. 자네가 두 살이라도 많으니까 봐줘.’
‘......몇살 차이 나지도 않잖습니...’
카밀턴이 등을 푹 찔렀다. 유릭은 네, 네, 어쩌고 답하며 그 소년에게
도 정중하게 답했다.
“모르는데요.”
카밀턴은 얼른 말했다.
“크로반 군은 아주 평범하고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네. 앞으로 어
렵고도 훌륭한 일을 하게 될 자네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 사람이라,
이 말이야. 너무 난처하게 하지 말게. 그러니 자, 우리-”
“역사학자가 될 사람이라면, 특무부에 대해서는 몰라도 흑마법사 루
스카브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네.”
쥴리안이 드디어 반격을 시작했다.
“파난 섬은 루스카브의 마지막 피난처 중 하나이지. 또, 그의 연인이
었던 아그리피나가 죽은 곳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루스카브가 퍼
부은 흑수의 저주에 걸려, 그 섬에서는 그 어떤 마법사도 마법을 쓸
수 없게 된다고 들었어.”
“어쩌면 흑마법사들에 한정되어 그 힘이 증폭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 전에 질문을 던졌던 검은 머리 학생이었다. 방금 전까지 무기력
하던 소년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유릭은 쥴리안의 눈동자가 카밀턴을 향하는 것을 보고, 쥴리안이 일
부러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라 짐작했다. 숙부에게 무언가 보이고
싶은 것이다. 카밀턴 경이 나른히 한숨을 내 쉬더니 소파에 앉았다.
보내는 눈빛을 보니, ‘가소롭더라도 그냥 참고 들어.’ 하고 간절
하게 말하고 있었다. 유릭은 고개를 돌려 소년들을 보았다. 흥분한
눈빛들을 보니 고작 열 두어 살 정도로 보인다. 쥴리안이 대뜸 물었다.
“유릭, 너 흑마법이 뭔지는 알아? 마령을 부르는 마법 말이야.”
유릭은 카밀턴은 흘끔 보았다. 카밀턴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절--대
아는 척 하지 말게, 였다.
“물론 모릅니다. 하지만.........대화 주제로서 좋지는 않군요. 오늘은-”
“너도 다른 멍청이들처럼 그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불경하다 생각하는
거야? 겁쟁이 샌님이네. 하지만 그건 마법이지, 나쁘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고. 힘이 생기는 게 뭐가 나빠. 어차피 마법이란 힘을 얻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 무엇이든 써도 되는 거잖아.”
카밀턴이 손을 위 아래로 저었다. 그건 답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힘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닙니다.”
“답답한 소리 하네. 쓸 수 있으면 쓰는 게 힘이야. 그리고 보통 사람
이라면 몰라도, 마법사로서의 자격을 부여 받았고 자연의 의지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면 무엇이든 할 권리가 주어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연과 도덕을 배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원
하고 할 수 있다면 해도 되는 거야.”
“예를 들면, 아그리피나가 부리던 홍염의 용 우르간이라든가 지금 북
부 전선의 마법사, 버겐이 부리는 검은 용 이릭시어스라든가, 하는
것 말인가요.”
뒤에서 카밀턴이 피식 웃었다. 유릭이 일부러 순진한 척 하는 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했다. 그러나 냉큼 걸려든 쥴리안의 눈이 빛
났다.
“흥,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야.”
“단순해서 좋군요. 하지만 그건 상당히 어렵고도 힘들며, 많은 대가를
요하는 일입니다.”
“강하다면, 대가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유릭은 약간 화가 났다. 이 말을 전임 상관 칼 뷰겐트가 들었다면 뭐
라 할까. 그 강철 같은 주먹으로 매우 예뻐해 주었을 테지.
“본인이 대가없이 주어진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천재라도 된다고 생
각하는 겁니까. 그래서 그 어떤 마법사도 이루지 못한, 심지어 제국
특무부 최고자인 니콜라스 추기경과 레반투스 대공마저도 못한 것을,
당신은 쉽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짜 재능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통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것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본인이 천재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물론 그 나이에
두 학년이나 월반할 정도라면, 꽤 우수하다는 건저도 인정해 드리
겠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흔히 정의될 수 있는 천재중 하나라고 생
각하시고 계신 거라면-”
그리고 유릭은 주변의 소년들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
속으로 은근하게 통쾌해 하고 있었고, 유릭은 이 꼬마가 꽤 미움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쥴리안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천재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는 아무것도 정의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단호하게 정의
하는 자는, 정의할 수 있는 정도밖에 모르는 바보니까요. 특히나
제가 한번도 보지 못한 걸 가지고 정의한다면 말이에요.”
쥴리안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 타는 눈 안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격파 당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 진짜 정체가 뭐야.”
“샌님입니다.”
“........”
모두가 일시에 침묵한 가운데, 카밀턴이 손끝으로 볼을 툭툭 치는 것
으로 박수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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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는......앙큼해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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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