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마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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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했어.”
“그 덕에 일찍 끝났잖습니까.”
“그래도 심했어.”
“원한이라도 진 겁니까?”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나. 아마도 그 녀석, 자기가 이길 때까지 자네
에게 들러붙을 걸.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놈은 현재 브란 카스톨
에서 공부하고 있고, 내 집에는 도토리 숨겨 놓은 다람쥐처럼 열심
히 드나드는데.”
들고 온 책을 들추어 보던 유릭은 ‘뭐 밟았군.’ 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재능이 많은 아이인 건 사실이야. 아니, 정말 뛰어났다네. 리
타가 얼마나 천재라고 떠받들었는지, 녀석은 자기가 코를 풀어도
인류사의 위대한 코풀기 방식이라고 우쭐해 할 정도라고. 애들은
칭찬에는 절대 냉정해 질 수 없는 법 아닌가. 뭐, 아는 게 없으니
그런 거지.”
“하지만 열정은 아주 풍부한 것 같군요.”
“특출한 아이들은 늘 그렇지. 다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열정을 타
고 나서, 그 열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아이들이 하지도 않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일에 엄청나게 집중하여 몰두하네. 그것이
아이의 감수성과 맞물리면,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는 거야. 쥴리안은
그런 아이이고, 지금도 그래. 단, 지나치게 건방져서 다른 사람 생
각을 전혀 안한다는 게 문제이고,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줄 착각한다는 게 문제이고, 자기만큼 잘난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일 것이라 착각하는 것 역시 문제라는 것이지.”
“그래서 저, 그런 문제 많은 분에게 찍힌 겁니까?”
“단단히 찍힌 거지. 원래 철없는 아이는 자기가 납득하지 못하는 상
황과 만난다면 그냥 잊어버리거나 그래도 내가 이겼다고 우기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거든. 후자의 경우는 아주 귀찮아.”
“하지만 난처하고 예민한 주제였습니다.”
카밀턴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아이들이 늘 그렇지. 루스카브는, 당대의 팔콘과 와스테 윌린에
게는 진절머리 나는 적수였지만,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
이야. 강한 자란, 더군다나 제약 받지 않으며 그 강함을 과시하다가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한 자란, 어린애들에게는 참으로 달콤하게
다가오지. 물론 나이 먹고 결혼해서 드디어 자신의 최악의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까지 말이야.”
“최악의 적수요?”
“자식 놈.”
유릭은 피식 웃고는 검은 어둠에 덮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마저도
삼켜진 컴컴한 하늘이었으며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듯 거센
바람이 불어와 섬의 숲이 술렁이고 있었다. 유릭은 보고 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저 읽고 덮었다. 그러자 카밀턴이 말했다.
“이곳 2층에 서재가 있네. 전대 주인이자, 루스카브에게 심취했지만
역시나 파난으로 끌려가 생을 마친 마법사, 게오르드가 만든 서재
이지. 나는 일찍 잘 테니, 자네는 그곳에서 책이나 좀 보게나.....내
가 말 잘 하면 두어 권 들고 올 수도 있고. 자네가 그 책만 다섯
번째 보는 걸 보는 것도 꽤 괴롭다고.”
“경을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오늘 저녁은 휴가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내 책임이지 자네
책임은 아니야.”
“애 취급이시군요.”
“나는 올해로 서른다섯이고, 열여덟은 충분히 애야. 어쨌건 오늘 저녁
은 푹 쉬게나. 오는 내내 고생 했고, 특히 오늘은 매우 고생했으니....
이거 명령이야.”
“감사합니다.”
유릭은 카밀턴의 의도를 대강 알아채고는 방을 나섰다. 유릭이 문을
닫을 때, 카밀턴은 여행 내내 무언가를 표기해 나가던 수첩을 펼치고
있었다. 유릭은 역시 저것을 쓸 시간을 얻기 위해 자신을 내 보낸
것이라 판단했고, 정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문틈이 실오라기만큼
남았을 때 카밀턴이 수첩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더니 후우- 하고
한숨을 내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보...” 어쩌고 하는 말이
문틈으로 들린다.
카밀턴이 말한 서재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다
보니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
무도 없었다. 저녁 시간이 지난 지도 한참이나 된데다가, 도서관은
놀러온 호텔의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는 아니다(해변과 밀회
장소라면 모를까).
유릭은 책꽂이에 가득 꽂힌 양장본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 올리며,
그가 원하는 책들이 꽂힌 장소를 찾아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
에서 흰 빛이 번쩍이고, 그 빛이 서재 안을 하얗게 밝히고는 휙 사
라졌다.
마침내 유릭은 찾는 책들이 가득한 책장 앞에 서게 되었다. 똑같이
생긴 열 두 권의 두툼한 책들이 눈앞에 열 지어 서 있었고, 그것은
에이드리안 캅과 도레 아슨이 공저한 역사 전서였다.
유릭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그 책들을 손끝으로 찬찬히 쓸어보았다.
그리고 막, 그 중에 첫 권을 빼어 들기 위해 손을 얹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릭은 손을 내리고는 돌아섰다. 역시나, 그
곳에는 셔츠에 바지만 가볍게 차려입은 쥴리안이 서 있었다.
유릭은 그를 보면 볼수록 가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발 머리
도 그렇고, 동그란 얼굴도 그렇고, 데일 듯 뜨거운 눈동자 역시 그
러하다. 그 녀석도 언제나 그렇다. 조용하게(대부분은 멍하게) 있는
형에게, 언제나 뜨겁게 연설을 해 대며 눈을 반짝 거렸다.
쥴리안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이, 삼촌이랑 어떤 사이야?”
“약혼한 사이는 아닙니다.”
“어린애 취급하며 놀리지 마. 정말 어떤 사이야? 비서야, 아니면 부관
이야.”
유릭은 방금 전에 카밀턴이 말한 게 생각났다. 서른 다섯과 열 여덟
이라면 충분히 까마득한 나이차이지만, 열여덟과 열넷은 그리 차
이가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저는 그저-”
“평범한 샌님이라, 이 말이냐.”
쥴리안의 손가락이 딱- 소리를 냈다.
“큿-!”
유릭은 불침에 쏘인 듯 뜨겁고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
신음을 삼키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책장에 등을 부딪쳤다. 그리고
바닥에 총이 철그럭 떨어지고, 단검역시 칼집 째 떨어졌다.
유릭이 당장에 집으려 했지만, 그 위로 푸른 섬광이 츠캉 일어나며
유릭의 손을 퉁겨냈다. 유릭은 얼얼한 손목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너무하시는데요.”
“아항, 평범한 샌님에게 좀 심했지? 하지만 오늘 너도 너무 심했다고.
내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다니.”
애다, 역시. 유릭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쥴리안이 어떤 ‘장난’을
치든 참아 보기로 했다. 쥴리안은 유릭의 총과 단검을 집어 들었다.
유릭은 뺨이라도 맞은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쥴리안은 우선 단검
을 뽑아 보았다. 단검의 날에는 드래곤과 십자가가 붉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쥴리안의 눈이 커졌다. 유릭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알
아 볼 리는 없지만 알아본다면 곤란하다.
“주십시오.”
“역시나 군인이었나.”
“석 달 뒤면 전역입니다.”
“에헤, 징집병이야?”
“네. 일반 징집병입니다.”
“쳇, 시시해.”
쥴리안은 총을 들어 벽을 겨누었다. 일단 단검을 받아 든 유릭은 품
안으로 집어넣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쥴리안은 그를 흘끔 보
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철컥- 마른기침 같은 소리만이 민
망하게 났을 뿐이다. 쥴리안은 총을 세게 흔들어 보고는 다시 방아
쇠를 당겼지만, 역시나 철컥 소리만 났다.
“어라?”
“비었습니다. 단 한발도 없어요.”
“야, 빈총은 왜 들고 다니는 거냐?”
“제 총은 거의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바보 아냐, 너? 아니면 무기 매니아냐?”
쥴리안은 총을 돌려주었다. 유릭이 총을 집어넣자, 쥴리안은 고개를
휘휘 저어 주변을 살피고는 살그머니 다가왔다.
“그런데 유릭 크로반, 이 따분한 곳 말고 정말 근사한 곳을 보여 줄
까?“
“샌님한테 과한 호의를 베푸시네요.”
쥴리안이 입술을 비죽였다.
“되게 비꼬네. 하지만 오늘 내가 한 말은 절대 헛소리가 아니라고. 나
는 정말 강해질 거야. 제대로 보여 줄게.”
다시 천둥소리가 우르릉 들려왔다. 유릭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가 쥴
리안를 돌아보았다. 쥴리안의 손끝에서 푸른 도깨비불 같은 것이
감돌며 주변을 푸르게 적시고 있었다.
“이 성은 원래 우리 외할아버지의 성이었어. 게오르그 카밀턴, 그러니
까 우리 어머니인 헨리에타 카밀턴과 외삼촌인 헨리 카밀턴의 아버
지지. 하지만....... 결국 누명을 쓰시고 파난 섬으로 끌려가셨어. 이
성은 그 이상한 장사꾼 녀석이 가져가서는, 이렇게 끔찍한 호텔로
바꾸어 놓았고. 우엑-”
다시 쥴리안의 눈 위로 분노가 번뜩였다.
“하지만 내가 되찾고 말 거야. 그 빌어먹을 니콜라스 추기경을 파난
섬에 처박아 버릴 거라고.”
“그렇다면 일단 입 조심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요.”
“응?”
“저희 아버지도 파난 섬의 지하 감옥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또 쥴리안 당신이 조금이
라도 더 나이가 많았다면, 당장에 당신을 고발했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오늘처럼 그렇게 사람 눈이 많은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
내면 언젠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될 걸요.”
“나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 우습게보지 마.”
유릭은 헨리 카밀턴이 이 조카에 어찌하여 그다지도 몸서리쳤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도무지 ‘조심’할 줄을 모른다. 어쩌면 그 역시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쥴리안이 참으로 철이 없다는
것만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이 없어서 무모한 것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어 무모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니.
“너, 삼촌 경호를 위해 온 거지?”
“네?”
“삼촌이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그게 누구 짓일 지도
뻔히 알아. 그래서 프리델라 숙모에게 내가 삼촌을 지키겠다고 말
했는데, 간단한 무장 해제 마법에도 당할 정도의 얼간이를 붙여
줬잖아.”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쥴리안이 그런 유릭을 가리켰다.
“식민지로 돌아가. 외삼촌은 내가 지킬 거야.”
“저는 군인이고 상관의 명령은 하늘의 법칙과 비슷한 위력을 가집니
다.”
“돌아가게 해 주지.”
쥴리안이 손을 들며 장갑을 꼈다. 그의 손등 위로, 무언가가 번득였
다가는 사라진다.
유릭은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막 난간을 짚는 순간
에, 그의 눈에 서재 안으로 들어오는 날씬한 소녀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내린, 오늘 프론트에서 본 바로 그 소녀
였다. 유릭은 순간 당황했다.
“위-”
그 말이 스치듯 나오는 순간에 등 쪽으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젠장, 유릭은 이를 갈아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 마법진이
푸르게 번쩍이며 나타나 있었다. 그 빛이 카펫과 서재의 책들을 심
연 속에 있는 듯 오싹하게 비춘다.
“그만 둬!”
“막아 봐. 못 막으면, 더 이상 외삼촌을 맡길 수 없어.”
쿠헝, 하고 동굴 속에서 바람 휘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
고 바닥이 지징 떨리더니, 나무로 된 마루 틈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잉크 퍼지는 듯 스며 나왔다.
유릭은 총을 들었다. 쥴리안이 비웃었다.
“탄환도 없잖아.”
“제겐 다른 사람이 만든 탄환은 필요 없으니까요.”
유릭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온 서재를 깨뜨리듯 울린 그 소리
는, 분명 총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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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네, 여기서는 총도 나옵니다. 총~ 도요.
유릭의 레벨은....... 엔딩 10회전의 아키보다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