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마탄#3
******************************************************************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그림자를 꿰뚫었다. 그리고 다시 탕-!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다른 그림자를 꿰뚫었다. 온
벽을 뒤덮을 듯 솟구쳐 올랐던 그림자들이 바람에 찢기는 구름처럼
갈라졌다. 쥴리안은 이를 뿌득 물고는 손을 뻗었다.
“해제, 막을 것은 없으니 찌를 자 조차 없다! 힐바커, 나는 너를 복종
시킨 자다!”
유릭의 발아래에, 하늘색 마법진이 스캉 나타났다. 방금 전에 유릭의
검과 총을 빼앗았던 무장해제의 진이었다.
유릭은 바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에서 솟구쳐 오른 섬광이 바닥에
박히는 순간에, 마법진은 지워버리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쥴
리안은 허공을 짚었다. 손끝이 스치자, 그 위에서 동전만한 원들이
나타나고 그 원 안에 하나하나 글자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쥴리안의 손이 내려가자 그 마법진 위에서 그림자들이 빠르게 뿜어져
올라 유릭을 향해 쇄도해 왔다.
쿠허허헝--! 허공이 으깨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그러나 유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똑바로 서서, 총구는 쥴리안을
향하게 하며 팔을 곧게 피고, 마치 조각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물
속 얼음처럼 푸른 눈동자로 쥴리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자가 집어 삼킬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앞으
로 쏟아져 들어와도 유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쥴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저러다가 유릭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이다. 밀어 내고 싶은 건 싶은 것이고, 정말 다치는 건 별개 문제다.
유릭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얼음 같은 섬광이 터지며, 쇄도하
는 그림자를 단번에 박살내고 휘저어 으깨어 버리고는 쥴리안을 향해
날아왔다.
쥴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비명을 지르는 듯한 굉음이
볼을 스치고 귀 끝을 베어내며 날아갔다. 그것이 스치는 순간에, 온
몸으로 공포와 두려움이 싸하게 스며들어왔다.
“으헉.....!”
쥴리안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순간에 일어난 일인데, 천년 동안 악몽을 꾼 듯한 엄청난 공포가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뭐라 말은 하고 싶은데, 이가 덜덜 떨려서 그
저 어더더더- 비슷한 이상한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어이, 유릭 크로반 군. 그만 하게나.”
쥴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릭은 입구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헨리 카밀턴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가 쥴리안이
돌아보자 어깨를 축 늘어드렸다.
“내가 쥴리안은 애라고 누누이 말 했잖아, 유릭 군. 애한테 너무 심하
게 굴지 말라고.”
“조카 분께서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장난은 분명 받아
주었고, 그 다음은 너무 심하셔서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카밀턴은 쥴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쥴리안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달
아오르고 있었다.
“쥴리안, 내가 유릭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분명히 주의를 줬다.”
“하, 하, 하지만.....!”
거의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그렁그렁한 열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보니, 유릭이 봐도 좀
불쌍하기는 했다. 방금 전까지의 시건방은 모조리 날려 버리고, 그
자리에는 그저 삼촌의 한 마디에 발발 떠는 꼬맹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카밀턴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 쉬더니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2
층으로 올라오자 지팡이를 휘둘러 쥴리안의 머리를 후려 쳤다. 딱
-캑.
“상대가 되는 사람에게 덤벼라. 아무리 네가 수재라지만, 칭찬하며 응
석 받아 주는 어른 이외의 사람에게 까불면 낭패만 본다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르냐.”
“하, 하지만!”
다시 카밀턴의 지팡이가 쥴리안의 머리를 후려쳤다. 딱- 윽.
“유감스럽게도 유릭 크로반 군은 너를 귀여워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네 놈이 설친다고 봐줄 사람도 아니거니와, 설치는
꼬맹이에게 당할 정도로 만만한 것도 아니다. 세상 무서운 것 좀
깨달아 다오,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하, 하지만.......삼촌은 제가 지킬 거라고요!”
“내가 네 레이디냐? 지키니 마니, 하며 설치게.”
쥴리안의 얼굴이 더욱 벌개지더니, 애꿎은 유릭만 노려보았다.
“이 녀석 정체가 대체 뭐에요!”
“네 숙모 부하.”
“제길! 그건 나도 안다고! 그런데 정체가 뭐냐고요!”
“네 숙모가 뭐 하는 사람이지?”
“네?”
“그럼 네 숙모 부하는 뭐 하는 사람이겠냐.”
쥴리안이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번쩍였다.
“그걸 이제야 말하면 어떻게 해요!!”
성이 오른 쥴리안은 테이블 위에 얹힌 두툼한 책 한권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유릭에게 집어 던졌다. 바보가 아닌 유릭은 당연히 피했고,
책은 책꽂이에 쿠당 부딪히고는 떨어졌다. 카밀턴은 혀를 차고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표지는 그림자처럼 시커멓고, 그 위에
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유릭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카밀턴은 그
책을 흔들며 엄격하게 말했다.
“쥴리안, 이 책은 모두 네 외할아버지의 책이다. 아무리 이 서재가 통
째로 다른 사람에게 건너갔다지만, 이 책을 수집한 것이 네 외할아
버지이자 내 아버지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야. 함부로 다루는 것은
아무리 너라도 용납하기 어렵다.”
“삼촌이 먼저 저 녀석 정체를 안 가르쳐 줬잖아요!”
“카밀턴 경.”
“자네는 조용히 있게나. 이 바보 녀석아, 그런 걸 너한테 가르쳐 줄
이유가 있니?”
“카밀턴 경.”
“조용히 있으라니까, 유릭 군. 그러니까 쥴.....”
유릭은 총을 들었다. 그제야 카밀턴이 돌아보았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거지?”
“책 놓으십시오.”
“응?”
카밀턴은 자기도 모르게 책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순간에, 그 책장
이 바람에 펼쳐지듯 화라락 펼쳐지며 주변으로 돌풍이 몰아닥쳤다.
“이게 뭐야, 이런!”
주변의 책들이 와르르 뽑혀져 나가고 책장들이 찢어지며 눈처럼 튀어
올랐다. 카밀턴은 책을 던져버렸다.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갈라
지듯 펼쳐졌다. 그리고 그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그림도, 글자도, 아무것도 없는 하얀 지면이 바람에 부채처럼 펼쳐
지고 있었다.
유릭이 방아쇠를 당겼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묻혀 총성
은 들리지도 않았지만, 책 바로 앞에 있는 카펫이 단번에 뚫렸다.
그리고 탄환이 흐트러뜨리는 푸른 빛 무리가 책 주변으로 쏟아지는
순간에, 책의 지면 위로 둥근 마법원이 츠캉 나타났다.
유릭은 입술을 꾹 물고는 총을 당겨 올렸다. 쥴리안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내가 해 보겠어-!”
카밀턴이 달려 나가려는 조카의 발에 지팡이를 걸어 넘어뜨렸다.
“캑-!”
“바보 조카 놈 끌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카밀턴 경!”
카밀턴은 그 말에 발끈하여 벌떡 일어나려는 쥴리안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져 버렸다. 유릭은 그들 앞에 서, 책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책이 펼쳐지던 것을 멈추더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지면 위에
핏방울로 쓴 듯한 글자가 튀듯이 떠올랐다.
유릭은 총구를 들어 그것을 겨냥했지만, 순간에 그 마법진에서 붉은
그림자들이 폭포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콰아아악--!
그것은 주변을 휩쓸고, 그 휩쓸림과 함께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다.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이 서재 안을 갈기갈기 찢어대는
굉음에 비하면 새 지저귀는 소리였다. 창문이 흔들리다 금이 쩍
쩍 갔고, 뽑혀져 나간 책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유릭은 이를 악물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뽑혀지
듯 쏟아져 나오는 그림자를 똑바로 겨냥했다.
그림자는 위로 솟구치고 바닥으로 넘쳐흐르고, 마침내 천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핏빛 그림자들이 닿은 곳마다 쩍쩍 금이 가며 희미한
연기가 스며 나왔다.
“이게 본국식 흑마법인 겁니까.”
카밀턴이 일어나려고 버둥대는 쥴리안의 머리를 찍어 누르며 외쳤다.
“참으로 예술적이지 않나!”
“빌어먹게도 예술적이군요.”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핏빛 그림자 속에서 창처럼 날카로운
것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바닥을 찍고, 천장을 뚫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책들을 꿰뚫으며 죽죽 뻗어 나왔다.
유릭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며 총은 여전히 그 그림자를 겨누고 있
었다. 창들이 바닥을 콱콱 찍어내며 다가왔다. 바닥의 나무가 부서져
그 조각은 살점처럼 튀어 오르고,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는 책들의 파편들이 흰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크리게아-”
유릭이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총신의 끄트머리에, 빛으로 쓴 듯한
글자가 잠깐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암만.”
카밀턴은 지팡이를 힘주어 잡았다. 쥴리안이 일어나려고 목에 힘을
주었지만, 카밀턴은 더욱 힘주어 머리를 찍어 눌렀다.
“쏴, 유릭 크로반--!”
콰앙-!
유릭의 총이 푸른 불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중앙, 정확히 유릭이 겨
냥하고 있던 지점에서 빛이 터지며, 그 주변으로 꽃이 펼쳐지듯 엄
청난 선과 글자와 기하학적인 그림들이 방사상으로 뻗어 나갔다.
핏빛 덩어리들, 그 굳은 피 같은 것들이 빛을 향해 쏟아졌다.
유릭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날카로운 섬광이 그 눈부시게 수놓아
진 빛을 통과하자, 실타래가 엉킨 듯 엄청난 섬광의 무더기가 붉은
그림자를 휘감고 조이고 꿰뚫었다.
유릭은 단검을 뽑으며 달려갔다. 그리고 바닥을 차고, 몸의 무게를
실어 바닥을 내리 찍었다. 검이 박힌 곳에서 피가 뿜어져 올랐다.
유릭은 검을 놓은 뒤에 팔을 휘둘러, 세 방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챙캉, 챙캉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릭은 정면
으로 보이는 창을 향해 쏘았다.
챙그랑--!
엄청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며 서재를 휩쓸었다. 유리 파편들이 엎
드린 카밀턴과 쥴리안을 덮쳤고, 유릭의 발치까지 흐트러졌다.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카밀턴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드디
어 삼촌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쥴리언은 당장에 발딱 일어나며 외쳤다.
“내가 한다니까!”
유릭은 총구로 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다 끝났는데요.”
“뭐?”
쥴리안이 입을 딱 벌렸다. 카밀턴은 어깨와 등의 유리 조각들을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다. 카펫은 칼로 난도질 한
듯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사방에 책꽂이가 쓰러지고 책이 무
더기로 쏟아져 있었다. 무사한 책은 역시나 없었다. 들개라도 풀어
놓았던 듯 책들은 모두 찢어져 사방에 종이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릭의 발 옆에 단검에 찍힌 책이 한권 놓여 있었다. 그 낡은
책 주변에는 검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유릭이 단검을
뽑았다. 순간 그 흰 날 위로 붉은 드래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카밀턴은 턱을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지금 뭔가.”
“아무래도 경을 노리는 시도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정말?”
유릭은 책을 들었다. 피 같은 검붉은 액체가 주욱 쏟아졌다. 유릭은
그 불쾌한 것을 탈탈 턴 후에 카밀턴에게 건네주었다. 가죽으로 된
책 표지는 얼룩덜룩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아무
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펼쳐 보았으나, 그 안에도 마찬가지였
다. 누르스름한 종이에는 칼자국만 나 있을 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역사서와 함께 분류될 책은 아닌 듯 하군.”
카밀턴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책이 끄트머리부터 바스라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폭풍의 전조 같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을 때, 책은
완전히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
작가잡설: 좀 늦었군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