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27화 (27/174)

제25편

마탄#4

****************************************************************

“원래 실패한 암살자는 사라지게 마련이지.”

“재미없는 농담인데요.”

“쥴리안, 네가 좀 재밌게 해 주려무나. 나는 도저히-”

당장에 쥴리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도 삼촌을 지킬게요!”

“아주 웃겼다.”

“프리델라 님을 모셔 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 듯 하군요. 그분

이라면-”

“웃겨 달라고 했지 겁주라고 했나, 유릭 크로반 군.”

세 명은 다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검은 부스러기(암살자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쥴리안은 어떻게든 이것의 정체를 알아내어 인정받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활활 태우고는 있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으며, 카밀턴은

유릭을 바라보며 그가 쓸만한 답을 내놓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유릭은 유릭 대로 너무 많은 ‘딴’ 생각을 하느라 답을 내놓지 못

하고 있었다. 유릭으로서는 이 부스러기를 서재 바닥에서 긁어 침

실까지 가지고 온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쥴리안이 테이블

을 쾅 치고는(유릭과 카밀턴은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부스러기는

아슬아슬하게 들썩였다 다시 바닥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둘 다

멀찍이 물러나서 한숨을 내 쉬었다.) 외쳤다.

“맞다, 유리. 너하고 나하고 싸우기 전에 누군가가 들어 왔었잖아!”

“‘내가 두들겨 맞기 전에’- 가 정확한 표현 아니니?”

쥴리안은 카밀턴을 쏘아보았다. 유릭이 카밀턴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 때......이 서재 안으로 분명 누군가가 들어왔습니다.”

“분명, 그 여자일 거야! 그 여자가 이 책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그

여자가 분명 니콜라스의 사주로 삼촌을 노린 암살자라고요.”

카밀턴은 지팡이로 이 조카를 신나게 두들겨 패버리고 싶었다.

“네가 바보라는 증거는 지금도 충분히 확보 했으니 더 제공하지 않아

도 된다, 쥴리안. 무얼 가지고 그리 확신하는 거냐.”

“그런 생각이 없는 한, 여자가 서재에 올 리가 없잖아요.”

카밀턴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바보라는 증거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냐.”

“하지만 이상한 건 사실입니다. 저도, 또 쥴리안도 그 여자가 이 서재

에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나가는 것은 못 봤습니다.”

“둘 다 볼 틈이 없었지. 쥴리안은 두들겨 맞느라 바빠서 못 보았을

테고, 자네는 내 발칙한 조카 놈을 패다가, 그 다음에는 이 서적

암살자 녀석을 상대하느라 못 봤을 테지.”

“하지만 카밀턴 경, 만약 그 난리가 벌어지는 중에 놀라서 그 여자가

나갔다면 당연히 호텔의 관리인이나 직원에게 알렸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카밀턴은 외알 안경의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부스러기를 내려다

보았다. 손톱만큼 남은 부스러기는 카밀턴을 놀리듯이 흰 종이위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그 여자, 어떻게 생겼었나.”

“오늘 호텔의 프론트에서 본 소녀입니다. 호텔에 묵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붉은 머리에 진한 초록색 눈, 그리고 아주 날씬했

지요. 나이는 한 열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고요.”

“얼굴은 분명 기억하고 있나.”

“네.”

카밀턴은 흰 종이를 꺼내어 연필과 함께 유릭 앞에 놓았다.

“그려 보게.”

“네...?”

“그려 봐.”

유릭은 한숨을 내 쉬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밀턴이

정말 하품을 하다가 귀중한 검은 부스러기를 날려 버릴 뻔 할 즈음에

간신히 그림을 마쳐 건네주었다.

카밀턴은 그 그림에다가 코를 풀어 버리고 싶었다.

“자네는 이걸 사람이라고 그린 건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카밀턴은 왕년의 서부전선에서 본, 바리암 마법사들이 소환한 마령들

을 연상케 하는 ‘초상화’를 울적하게 바라보았다. 보고 있자니, 쥴

리안이 거창하게 바보짓을 한다면, 이 유릭은 사소하게 바보짓을

한다는 우울한 생각마저 떠오른다(물론 본인은 그 중간에 위치한다

는 것은 당연히 모른다).

“어쨌건........이건 당국에 증거품으로 제출하고(그 전에 버릴 가능성

이 더 높기는 했지만), 이 호텔의 지배인에게도 보여주겠네(누가

그렸냐고 물으면 쥴리안이라고 답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야지, 하고 검은 부스러기를 가리키는 순간이었

다.

“푸헤취---!”

“.......”

“훌쩍, 방이 되게 춥네요. 헤취!”

다 날아가 버렸다.

“......”

“심했습니다.”

“그 덕에 꺼졌잖아!”

“그래도 심했습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감기 조심해야지, 하고 말할까?”

“........”

유릭은 아무리 그래도 조카이고 어린아이니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

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러나 열 네 살 난

소년을 뒤집어 놓고 엉덩이를 때린 것은, 아무래도 조금 난처한

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오늘은 수고 했네.”

카밀턴은 다시 외알 안경을 썼다. 그리고 그 테두리를 쓰다듬고, 나

른히 한숨을 내 쉬고, 다시 바닥을 본 다음에, 커튼을 조금 걷고

밖을 내다보는 유릭을 흘끔 보고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파난에 있을 때, 프리델라가 그 두툼한 명단을 내게 건네며 이렇

게 말했지. ‘모든 재능 있는 아이와, 단 하나의 특별한 아이를 위

하여’ 황실 음악 아카데미를 세운 루드반 남작이 남긴 말이네. 프

리델라는 그 명단을 건네 줄 때, 적임자인 단 한사람을 찾으라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거지. 물론 못 찾으면 당신 바보야, 라는 난

처한 뜻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유릭은 커튼에 손을 얹으며 카밀턴을 돌아보았다. 카밀턴은 그의 얼

굴 윤곽이 더욱 묘하게 느껴졌다.

“나는 자네 경력의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보지 않았네. 그 정도 경

력은 프리델라가 건네준 그 어떤 자라도 노력하면 할 수 있거나 벌써

한 일들 뿐이었으니까. 내가 자네를 고른 이유는.......사실 매우

간단하네.”

“뭡니까.”

“자네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같은 감옥에서 죽었기 때문이야. 나를

망설이게 한 단 한 줄이 바로 그것이었네.”

유릭은 커튼을 움켜잡았다.

카밀턴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흐릿하게 웃었다.

“동지감이니 뭐니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내 아버지가 그 꼴이 된

덕에, 나는 젊은 시절부터 레반투스 대공을 도와야 했다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하나는 돌비체 수상과 그 멍청이 황제에게

열광적으로 충성하던가, 그에 반하는 레반투스 가문을 돕던가, 아

예 시골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던가- 그것뿐이었네. 나는 그 중에

두 번째를 택했고, 그분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 힘들

었다고 푸념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렇다면 프리델라 님과는.....”

“정략결혼이었지. 현 레반투스 대공과는 사촌지간이자 선대 대공의

조카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혼 한 후 한 10년간 서로 사

랑하기는 했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네.”

“그렇다면 어째서 이혼하신 겁니까.”

“내가 바람났었거든.”

그리고 카밀턴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여자하고는 이혼 직후에 헤어졌어. 그 여자하고 같이 살기 보다

는, 프리델라에게 죽도록 비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여자도 일이 커지니, 꽤 난처해했지. 사실 우리 둘 다 잠깐

놀다가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낭패스럽게 돌아간 거야.”

“하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지는 않군요.”

“사실 지금도 비는 중이야. 정확히 4년 8개월 하고도 24일째지. 그녀

가 자네와 만난 것은 아마도 나와 이혼한 직후였을 거야.........어이,

혹시 내 이야기 안하던가?”

“전남편이 있다는 것을 떠나는 날 알게 되었는걸요.”

참을 수 없이 울적한 얼굴이 된 카밀턴은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푸념은 그만하고, 어쨌건 나는 자네 아버지의 일 때문에 자네를

골랐다네. 그리고......나는 자네 아버지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알아.

나에게 그 정도 문서를 들여다 볼 권리는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야.”

“가르쳐 주십시오.”

카밀턴은 흥미롭다는 눈길로 유릭을 바라보았다. 유릭은 그 녹색 눈

동자가 지나치게 짖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사, 자네는 어린 아이가 아니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

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경을 지키는 것 말입니까?”

“그것만이 아니야. 나를 노리는 자도 알아내게. 그리 된다며, 나는 자

네 아버지에 관련된 모든 문서를 주겠네. 그리고 누명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고, 누명일 경우 자네와 자네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키고 압수된 재산도 되찾게 해 주겠네.”

유릭은 흥분했다는 것을 감추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 했지만, 눈

날카로운 카밀턴은 벌써 유릭의 속내를 알아챈 듯 웃고 있었다.

“내게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네. 내 운명과, 내 아내의 운명과, 내

동생 가족들의 운명과, 나를 수렁에서 구해준 레반투스 대공을 위한,

지금의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지. 자네는 내 경호뿐만

아니라, 꽤 많은 이유로 이리 불려온 거라는 말이야. 아마도 프리델

라 역시 그 점을 분명히 말했을 테고.....”

카밀턴은 유릭의 허리에서 검은 윤기를 반짝이는 총을 가리켰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게, 히게아의 마탄.”

****************************************************************

작가잡설: 아아, 어딜 가도 그놈의 ‘얼짱’ 타령! 이쁜 거 좋고 잘생긴

거 좋고 그런 거 좋아하는 거  사람 본성이라는 거 나도 잘 아는데,

세상에 중요한 것이 오로지 그것뿐이랍니까. 아니, 사람 나누고 우

열 평가하는 기준이 그것뿐입니까? 처음에는 피식 웃으며 넘어가다

가도 이제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합니다. 이쁜 거 좋고 잘생긴 거 좋

은데, 그것 하나만이 세상의 절대선인 양 굴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

다~~~ 아아, 짜증나. ;;

아,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중~ 입니다;; 정확하게 윤곽이 잡히면

공지 때리지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제8장 붉은 장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