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편
붉은 장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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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카밀턴이 ‘우기는 대로’ 끌려 나오게 된 유릭은 한 시간 뒤에
마차 창문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유릭이 예상했던 대로 카밀턴은 너무도 당연하게 마차조차
부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유릭은 그냥 운동 삼아 걸어
가 볼까, 어쩌고 중얼거리는 그를 버려두고 호텔과 이야기해서
간신히 마차를 준비할 수 있었다.
제국의 심장, 브란 카스톨의 하늘에는 서쪽으로 끌려 들어간 저녁 해
남긴 빛이 남아 푸르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무수한 건물들은 어둠에
휩싸여 가고, 서쪽을 불사르는 노을을 비추던 창문에도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나고 자란 카밀턴은 무관심하게(아니 졸면
서)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유릭은 모든 것을 눈에 심듯이 하나하
나 바라보았다.
10년 전에 아버지가 끌려 나갔던 그날까지 그가 기억하는 그 어떤
것도 겹쳐 보일 수 없었다. 분명 같은 건물일 것 같았건만, 전혀
다른 차원인 마냥, 물에 가라앉거나 하늘에 붕 뜬 마냥 이질적으로
보인다.
마차가 검푸른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를 따라 세워진 가로등은
아직 빛이 희끄무레 남은 연청색 하늘을 등진 채 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그 빛의 끄트머리로도 몰려들어, 그 가로
등 빛을 점점 더 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가다가, 드디어 잠에서 깬 카밀턴 경은 타블로이
드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최고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그가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는 모습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눈치 챈 카
밀턴이 신문을 흔들고는 웃었다.
“도엘 지라든가, 조시어트 지보다 이천오백만 배는 유익하지. 적어도
이건 거짓말입니다, 하고 대놓고 말하고 있거든. 낄낄 웃다 보면
즐거워.”
“둘 다 유명한 신문 아닙니까. 뭐, 저는 안 보지만.”
“그 신문은 자기네들이 찍찍 갈기는 헛소리를 객관적 사실이라 우기
거나 착각하는 버릇이 있거든. 멀쩡한 것도 그 신문에서 보도하면
참으로 해괴하게 변해. 안 보는 게 나아. 적어도, 그 신문에 관련된
사건을 한번이라도 당한 사람은 말이야- 어쨌건, 자네도 한번 보게.”
유릭은 신문을 받아 들었다. 지면에는 ‘괴도 박쥐, 그의 정체는 무엇
인가! 1년 동안 그가 턴 물건들의 목록, 국가 예산과 맞먹어!’ 등등,
보기 민망한 헤드라인이었다.
“이게 뭡니까?”
“아, 브란 카스톨의 전 상류층 집을 두 달마다 한번씩 털어먹고 다니
는 도둑놈이지. 예고장과 함께, 수십 겹의 경찰과 군대를 뚫고 날
렵하게 물건을 채 간다네. 나는 요양할 때 처음 알게 되었지. 지금
브란 카스톨 하류층 사람들의 영웅이자, 중류층 사람들의 오락이자,
상류층 사람들의 골치라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단 다섯 건
의 절도사건을 일으킨 도둑이 왜 이리 화제인지, 나도 의문이야.
지나치게 호들갑이랄까.”
유릭은 무표정하게 훔친 물건의 사진과 그 가격을 보며, 도둑맞은 사
람들을 향한 묘한 존경심을 느꼈다.
“아, 이런. 도착했네.”
마침내 마차가 멈추자, 이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신문
을 마차 구석에 던져두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 그들을 마중 나온
검은 옷의 극장 직원이 달리듯 와서는 그 앞에서 두 팔을 활짝 피며
외쳤다.
“헨리 카밀턴 각하, 어서 오십시오!”
카밀턴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조용, 조용.”
그러나 눈치 없는 직원은 두 손을 맞잡고는 허리를 직각으로 푹 숙이
며 더 크게 외쳤다.
“트레비스 님의 명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카밀턴은 난처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오페라를 관
람하러 온 브란 카스톨의 모든 상류층이 운집해 있었고, 그런 마당에
유명하다면 유명한 카밀턴 이름이 천둥같이 불리자 일제히 돌아보
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오신 공자 분은 어디의 누구십니까?”
제 딴에는 한껏 세세하게 챙긴다고 한 말인데, 카밀턴은 좌절해 버렸
고 유릭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태어나서 이
렇게 많은 시선의 집중을 받아 본 적도 없었으며, 이리도 열렬한
의문이 대상이 된 적도 없다고 생각했다. 수 백 개의 낯선 눈동자가
맹렬한 열정과 함께 번쩍이며 카밀턴 옆의 유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릭은 카밀턴을 흘끔 보았다. 그러나 카밀턴은 안경 테두리를 쓰다
듬고 있었고, 그것을 본 유릭은 아예 기대를 접었다. 때에 따라 이
행동이 암시하는 것이 틀린데, 지금은 ‘지금 나는 매우 곤란하니,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 주게.’ 라는 뜻이었다. 요약하자면 ‘난 몰라!’
정도랄까.
유릭이 말했다.
“사촌의 아내의 동생의 아들의 친구의 동생입니다.”
“네?”
직원이 당장에 당황하며 카밀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밀턴이 재빨
리 말했다.
“트레비스에게 안내해 주게나.”
“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트레비스 님께서 한참 전부터 기다
리고 계신답니다.”
카밀턴이 모자를 앞으로 기울이고는 발걸음을 뗐다. 유릭은 그를 따
라가며 입구에 눈처럼 푹신하게 깔린 붉은 카펫을 밟았다. 그리고
그들은 안내에 따라 긴 기둥이 사열하는 입구를 지나, 역시나 붉은
카펫이 깔린 둥근 계단을 걸어 어느 작은 문 앞으로 안내되었다.
금색 문고리가 달린 그 문이 열리자, 화려한 난간이 있는 최고의 관
람석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유릭은 현기증이 나서 문에 기대고 말았다. 말 그대로 최고 귀빈석으
로,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다가 무대의 배우들과 이야기
라도 나눌 수 있을 듯 가까웠다. 무대는 아직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그 커튼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분주하게 오고 가고 있다. 무대
아래에는 오케스트라가 악보를 넘기거나 각자가 맡은 파트를 연주해
보고 있었고, 그것이 너무나 잘 보인다는 것에 다시 현기증이 일어
날 것만 같았다. 그들이 매만지는 악기들을 보고 있자니, 살짝 건
드리는 것만으로도 사망신고를 하게 된다는 그 유명한 크리스 펠로
대위의 바이올린이 생각났다.
“어서 오게, 귀환한 서부 전선의 영웅, 헨리 카밀턴.”
그 목소리는 난간의 오른쪽에서 들렸다. 그곳에, 보통 체격의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꽤나 세련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나이는
카밀턴 보다 열 살가량 많아 보였으나, 머리카락은 아주 검었고, 눈
도 검었다. 콧날은 날카로운 편이었으며, 잘 어울리는 근사한 콧수
염을 기르고 있었다. 어딘지 교활해 보이는 구석도 있었지만, 낭만
적인 순수함 역시 깃들여 있었다.
카밀턴은 우선 유릭을 소개했다.
“같이 오겠다고 말한 유릭 크로반 군이네. 유리, 이쪽은 내 친구인 트
레비스 카트슨이네.”
트레비스가 손을 내밀었다. 유릭이 그 손을 잡자, 트레비스는 그를
아래위로 휙 훑어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유릭은 왠지 순식간에 ‘감정’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직업은 군인, 예술에 대해서는 그리 조예가 깊지 못하겠군.”
“네?”
“군인이라는 건 뭐 카밀턴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거고, 예술에 대해
서 조예가 깊지는 못하다는 건, 여기 들어오자마자 멀미난다는 표
정을 짓고 있어서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대 오페라 좌의
에메랄드 석에 서는 순간에 이 위치가 황제 폐하나 앉는 엄청난
좌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냥 들으면 멋지군요, 감사합니다, 할법한 말이었지만 잘 들어보면
결국에는 이런 자리에 왔으니 영광으로 알라는 자기 자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어딘지 카밀턴 경과 닮아
보였다. 카밀턴이 말했다.
“트레비스, 이 친구는 내 호위니까 너무 말 시키지 마.”
“그런데 이 어린 청년이 정말 서부의 사자를 지킨단 말인가.”
유릭은 ‘어린 청년’이라는 말 뒤로 ‘이 꼬맹이가? 이 애송이가?’ 라는
말을 들은 듯 했다. 유릭 자신이 고작 열여덟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카밀턴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어려 보여도 그 악명 높은 파난 식민 특무부 장교네. 징집병 출신인
데다가 나이도 이래서 아직 하사지만.”
트레비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특무부라면......괴상한 부서잖아.”
“되도록 굉장한, 이라 말해주게나.”
그리고 카밀턴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는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유릭
은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객석으로 느릿느릿 들어오는 관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밀턴의 오페라 관람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또, 이곳은 정말 눈
이 많은 곳인 데다가 극장의 성격을 보아하니 상류층 관람객들이
상당히 오는 곳 같았다. 벌써 로얄 석의 난간으로 화사하게 차려입
은 귀빈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최고 귀빈을 위한 에메랄
드 석에 앉은 트레비스와 카밀턴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유릭은 범인이 누구든 간에 이런 곳에서 암살 시도를 할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대담 이전에 바보짓이다. 유릭은 난
간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나섰다. 카밀턴 옆에 있는 낯선 소년의
모습에, 카밀턴을 아는 듯한 사람들이 일행과 함께 이야기를 수근수
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유릭은 로얄석의 상류층 귀빈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객석 쪽을 내려다
보았다. 객석에는 사람들이 벌써 반쯤 차 있었다. 카밀턴도 공연
시작에 상당히 앞서 도착한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일찍
오는 것을 보니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가 다들 남다른 듯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을 살피던 유릭은, 무대 왼편 벽에 바짝 붙어서
이야기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
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거의 뜨이지 않을 테지만, 유릭의 눈은 피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마르고 몸집이 작은 남자였고, 다른 사람
은 적갈색 옷을 입은 여자였다. 뒷모습만 간신히 보였지만, 아주
날씬한 여자였다. 잠시 여자가 무대 쪽을 돌아보았으나, 모자에 베
일을 두르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고개를 휙 돌
렸다. 무언가 굉장히 화난 듯 격렬한 동작이었고, 그 바람에 베일이
걷혔다. 진한 붉은 빛 감도는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새침하게 턱
을 든 얼굴도 보였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듯 눈썹을 찌푸리고는
상대에게 뭐라 뭐라 쏘아 던지고 있었다.
유릭은 카밀턴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경.”
트레비스와 옥신각신하던 카밀턴이 고개를 돌렸다. 유릭은 말없이 그
기둥 쪽을 가리켰다. 트레비스도 고개를 돌렸지만, 소녀가 기둥 앞
쪽으로 한걸음 나아갔기에 둘 다 보지 못했다.
“뭘 보는 건가.”
“그 소녀입니다.”
“응?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유릭은 잠시 카밀턴의 주의력이 바위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절감
하기로 했다. 카밀턴이 다시 그곳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유릭은 결국 뒤돌아 문을 열었다. 카밀턴이 일어났지만, 그
에게는 그냥 있어 달라는 수신호를 보내고는(파난 특무부의 수신호
라 알아 봤을 리는 없지만) 계단을 달려 내려가, 일반객석 입구로
들어갔다.
“이봐요, 손님! 표 주셔야지요!”
극장 직원이 앞으로 나섰지만, 유릭은 그들의 손을 잽싸게 피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기둥 뒤에 서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상대에게
뭐라 쏘아붙이려다 유릭과 눈이 마주쳤다.
“저...”
유릭이 부르기도 전에 소녀는 베일을 휙 걷어 쓰고는 돌아섰다. 그리
고 옆의 남자에게 쏘아붙이고는-분명 브리칸 어였다.- 무대 옆으로
난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소녀와 싸우고 있
던 남자가 즉각 앞으로 나섰다. 유릭이 그를 지나쳐 가려 하자, 그
는 당장에 유릭의 허리를 끌어 안 듯이 잡으며 뒤로 밀쳤다.
“저 곳은 안 됩니다, 손님.”
그 동안 소녀는 잽싸게 문 안으로 사라졌다. 놀란 토끼보다 빠르다.
유릭은 그를 막는 남자에게 급히 상황을 말했다.
“저 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정말 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유릭의 허리를 거칠게 밀어 젖히고는 험악하게 말했
다.
“자꾸 이러시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당장 나가시오!”
“그런데 정말 급한 일인데요.”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 둘 인줄 아십니까. 젠장, 당장 나가지 못합니
까!”
“급한 일인데.”
진짜 급한 일도 이리 말하면 농담으로 들린다. 그리고 남자는 상식인
이었다. 남자는 당장에 손을 휘둘렀고, 그러자 극장 직원의 제복을
입은 남자 둘이 나타나더니 그 문을 우뚝 서서 지키기 시작했다.
유릭은 주먹을 휘둘러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때려눕히려 하면 못 할
것도 없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카밀턴 경을
지키기는커녕 극장에서도 쫓겨날 판이었다.
유릭은 카밀턴에게 도움을 구해볼 생각으로 에메랄드 석을 보았다.
카밀턴 경이 유릭이 돌아보자마자 당장에 올라오라는 듯 엄지손가
락으로 등 뒤를 가리켜 보였다. 게다가 옆의 트레비스도 얼른 오라
고 손을 흔들어 대고 있다. 그제야 소년이 극장주와 그 귀한 친구
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챈 남자가 당황했다.
“트레비스 님과 카밀턴 경의 일행이십니까?”
“네. 그런데 방금 전의 그 분을 만나러 저기로 가 봐도 될까요?”
남자는 단박에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나 유릭의 등은 굳건하게 밀
며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 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
금은 일단 올라가 계십시오. 곧 공연이 시작됩니다, 공자님.”
유릭은 다시 카밀턴 쪽을 보았다. 카밀턴은 맹렬히 뒤쪽을 가리키
고 있었고, 트레비스는 당장 안 달려오면 내 손에 죽을 줄 알거라,
라는 듯한 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유릭은 돌아서야 했
다. 돌아오자, 카밀턴이 어이없어 하며 험악하게 말했다.
“미쳤나, 자네. 저 사람은 여기 기획실장이라고!”
“하지만 분명 그 소녀였습니다. 또 저를 알아봤습니다.”
“그 소녀? 아는 사람?”
“섬에서 본 그 소녀 말입니다.”
“응, 정말?”
카밀턴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검은 막 너머가 이제 차츰 조용해지고
있었으며, 객석의 사람들도 벌써 꽉 차 있었다. 곧 공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움직이기에는 눈치 보이는 시간이다.
“일단은 오늘 내내 조심해야겠군.”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나도 옆에 바짝 붙어 있겠어, 헨리.”
트레비스의 말에 카밀턴의 입술 끝이 치솟았다.
“자네는 있으나 마나야. 아마 자네가 허벅지에 힘을 주는 순간에
나는 쓰러져 있을 걸. 아, 유언은 들어줄 수 있겠군.”
트레비스가 중얼 중얼 욕을 했지만, 카밀턴은 무시하고 무대를 노려
보기 시작했다.
객석의 불이 하나 둘 꺼져가자, 일반석의 관객들은 물론이요 로얄석
의 귀빈들도 각자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곡이 연주되었다. 오페라 극장주인 트레비스는 눈을 반짝이며,
선물을 기다리는 소년 같은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릭은 어쩌다가 약간 으스대는 것을 제하고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
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무대 앞의
객석을 살폈다.
막이 걷히며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인 듯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숲이었다. 아침 안개처럼 나른
하고 조용한 서곡이 무대와 객석으로 흘렀고, 그 숲 사이에서 드디
어 조명과 함께 체구가 중간 정도 되는 청년이 나타났다. 주연인
남자 가수인 듯 했다. 아직 노래가 없어, 그 청년은 무대 위를
오고가며 서곡에 맞추어 춤추듯 움직인다.
카밀턴은 벌써 졸기 시작했다. 트레비스는 무대를 하염없이 바라보
느라 그런 친구를 쏘아볼 틈도 없었다. 그러나 박자에 맞추어 쿡쿡
찌르며 깨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자네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가극을 어째서 그렇게 싫어하는
지 모르겠어.”
“멍청한 아가씨 하나가 얼굴 반반한 놈팡이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이고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다가 결국
에는 멍청한 아가씨와 역시나 멍청한 남자의 결혼으로 끝나지. 나는
사람들이 이런 우스꽝스럽고 작위적인 놀음에 열광하는 이유를 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야 사람들은 자기와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이 잘 되는 걸 좋아
하거든. 욕망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하려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자네는 대중을 위해 오페라를 만들고, 대중을 경멸하는 군.”
“경멸이 아니야. 나는 그런 순수한 대중을 매우 사랑하고, 그 사
랑하는 대중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싶기에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순수한? 알아서 착각해 주는 멍청한- 이라고 말하는 편이 낳겠지.
왜냐, 워낙에 게을러서 도무지 생각들을 안 하니까!”
“계급우월주의자.”
“나는 건전하고 보수적인 엘리트 주의자일 뿐이야.”
“그건 자네가 절--대 포함되지 않는 계층이잖아.”
유릭은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서른 후반의 성공한 사업가와
전군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장군이 나눌 수준의 대화가 아니었다.
드디어 주연인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꿀이라도 탄 듯 부
드러운 목소리였다. 유릭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그도 카밀턴 경
과 비슷하게 지루해 하고 있었다), 숲에서 외로이 거니니 심심하다,
어쩌고 비슷한 내용인 듯 했다(참 할말도 없다). 음악이 잦아들며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무대 오른 쪽에서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객석의 사람들이 술렁이고, 감탄
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릭은 이 목소리가 카밀턴이 말한 그 소녀일 거라 짐작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숲 속에서
지저귀는 푸른 새 같은,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다.
“에닌 마델로 양이네.”
트레비스가 무관심한 카밀턴 대신 말했다.
“저렇게 아름답게 연주하는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야. 이
오페라단이 만난 인재 중에 가장 완벽한 인재이지.”
무대로 나오며 들뜬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소녀는, 그 목소리만큼
이나 아름다웠다. 갈색 머리는 허벅지까지 물결치고, 희고 긴 목
에 그림 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숲 속으로 숨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며, 소녀는 한껏 맑은 목소리로 노래
를 부른다.
소녀가 노래로 누군가를 불렀다. 저 멀리서 그에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
려왔고, 그 여자의 목소리는 이 소녀에 소프라노에 비하면 그리 아름다
운 목소리라 할 수는 없었다. 조명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비추며,
드디어 주인공의 여동생 역을 맡은 소녀가 나타났다. 검은 가면으로 얼
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조명을 받아 노을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은 묘한
분위기를 냈다.
트레비스가 본격적으로 조는 카밀턴의 발을 콱 짓밟았다. 카밀턴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어야 했다.
“빌어먹을, 이런 건 졸라고 만든 거 아니야?”
“내가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스티아의 전시회에서 이러면 좋겠나!”
“아스티아 여사는 천재라고!”
“입 닥치고 노래나 들어. 나는 그런 개발 새발 낙서는 정말 질색이니까.”
“개발 새발이 아니라, 추상화라고! 브리카니아에서는 그런 예술을 더
예술이라 친단 말이네. 그림이란 있는 대로 그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
니라, 화가의 색채를 통한 세계의 재해석이 더욱 중요한 거야. 해체와
재배열, 그리하여 화가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이야 말로
예술이지.”
“닥치고 노래나 들으라고 했다.”
유릭은 새로운 소녀를 눈여겨보았다(중년 남자 둘이 아옹다옹 하는 것
에는 벌써 관심 끊었다). 아주 날씬한, 정말 요정처럼 날씬한 소녀는
깃털이 나는 듯 가벼운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뭐랄까, 아주 묘했다. 에닌처럼 천사마냥 고운 음색이
아니라, 끓어오르는 듯하면서도 가라앉고 다시 끓어오르는 듯한, 이
상할 정도의 매력을 담고 사람의 귀를 잡아끄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소녀가 가면을 내렸다. 조명이 쏟아지며, 큰 눈을 반짝이는 소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방금 전 무대 대기실로 숨어 버린, 바로 그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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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연재가 요즘 좀 느린 이유는....
사실 작년의 연재 속도가 아주 아주 빨랐던 겁니다;;; (제가 봐도 경이
적인 속도 였습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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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