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30화 (30/174)

제28편

붉은 장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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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정말 처음 임무를 맡아 흑석 폐광으로 들어갔을 때보다 더 덜

컥 했다.

“일전에 내가 말했던 바로 그 로웨나 양이네. 작년, 황실 아카데미의

발표회 때 찾아낸 보물이지. 어떤가.”

트레비스는 자랑스럽게 무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그리고 카밀

턴을 슬쩍 쏘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릭은 소녀를 가리키며

무언가 말해보려고 했지만, 카밀턴은 그런 유릭을 등지고 친구를 향

해 한껏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그럼 왜 저 소녀를 주연으로 내세우지 않는 건가. 기껏해야 아픈 주

역 대신 나오는 평단원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야.”

“에닌 마델로야 말로 고전적인 주인공에 아주 잘 어울리는 소녀이지.

그리고 지금은 돈 많은 사람들 취향에 맞는 고전적인 주인공이 유

행하는 시기이고, 에닌 양이 인기가 좋아 계속 내보내는 것뿐이야.

게다가 누구나 아는 것을 누구보다 잘 하는 것이 바로 에닌 양이

기도 하고. 하지만 새 작품이 준비된다면 로웨나 양을 내 보내 볼

생각이야. 지금이야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아직 덜 다듬어져서 조금

큰 역을 맡기려면 이렇게 원래 맡기로 했던 가수가 아프거나 해야

간신히 넣을 수 있지만.....”

“자네는 에닌 양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군?”

“아니, 아니야. 가수로서는 정말 훌륭하고,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는

정말 천사에게 선물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그런데 살비에 마델로가

너무 싸고돈다는 게 문제야. 자네도 알다시피, 그 살비에 마델로

가 재기하자마자 키딜로로부터 이 오페라 극장의 지분을 빼앗다시피

사 왔잖아. 자기 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여기 오페라 단

으로 입단 시키더니, 이번 연출은 누구로 해 달라 조연 여자로는 누

구를 해 달라, 남자 가수로는 누구를 해 달라, 포스터는 이렇게 해 달

라, 이번 공연은 내 딸이 잘하는 이걸로 해 달라~ 귀찮아 미치겠

다고! 내가 간신히 키워왔던 도어만 군과 비비안 양은 아예 나가

버렸잖아. ‘트레비스 씨, 저희들은 트레비스 씨를 정말 존경하기는

하지만 저 마델로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비에

마델로가 오페라 극장의 지분을 포기한다면 당장에 연락 주십시오.

어디에 있든 당장 달려 올 테니.’ 젠장, 에닌 양이 실력이 없다면

핑계라도 댈 텐데 그것도 아니니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트레비스는 푸르르 한숨을 내 쉬고는 이마를 짚었다.

유릭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로웨나에게서는 시선을 떼지

않고 면밀히 살폈다.

자매의 이중창이 퍼지고 있었다. 아름답고 착한 언니 흰 장미와, 욕심

많고 어리석은 동생 붉은 장미. 노래로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은 대강

마을의 무도회 이야기로, 그곳에서 어느 청년과 춤을 출지를 의

논하는 것이었다. 붉은 장미는 온갖 청년들을 품평하며 으스댔고,

흰 장미 아가씨는 그러면 못써 모두 좋은 청년이란다, 어쩌고 하면

서 응답하고 있었다.

붉은 장미가 앞으로 나서며 노래를 부른다. 새털처럼 가벼운 몸짓이

그녀가 입은 붉은 드레스와 함께 더욱 더 돋보인다. 성량 풍부하고

독특한 음색이 높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방금 전까지

가수들에 대해 품평하던 것을 멈추고 로웨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릭은 난간 앞으로 나섰다. 순간 로웨나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손

을 높이 치켜들고 노래를 부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로웨나의 진녹색 눈이 번쩍였다.

역시나 유릭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거인처럼 힘세지만, 가엾게도 달팽이보다 아둔하지.

그러나 로웨나는 고개를 돌리고는 노래를 불렀다. 치켜들었던 흰 팔

을 내리며, 소녀는 붉은 꽃송이처럼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지푸라기 같은 남자들 보다 더 멋진 남자가

올 거야.

느티나무처럼 듬직하고, 별보다 아름답고, 안개보다 부드러운 마음의

남자가.

유릭은 팔짱을 끼고 소녀를 지켜보았다. 로웨나는 다시 오른손을 앞

으로 뻗었다. 손끝의 베일이 너울거리며, 그 손끝이 유릭의 왼쪽을

향했다. 소녀의 눈이 다시 번쩍이더니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연기

가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란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높은 음을 내지르면서도, 한 순간

도 떨리지 않는다.

유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의 로얄석의 난간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채 유릭과 카밀턴 쪽을 보고 있었다.

유릭은 카밀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트레비스와 옥신각신하던 카밀

턴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 군, 또 뭔가.”

“피하십시오--!”

유릭은 카밀턴을 밀어젖혔다. 유릭의 외침은 파도도 꿰뚫을 듯한 로

웨나의 높은 노래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릭이 카밀턴을

내던진 순간에, 카밀턴의 어깨 위로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카밀턴의 옷이 찢어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

유릭이 총을 꺼냈다.

카밀턴은 피가 배어나오는 어깨를 움켜잡으며 외쳤다.

“무슨 일이야-!”

“암살자입니다!”

로웨나의 노랫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유릭은 카밀턴의 앞으로 나서며 로웨나를 보았다. 로웨나는 유릭과

카밀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이글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는 기

절하기 직전의 여자가 내 보일 법한 엄청난 눈빛이었다. 그러나 놀

랍게도 목소리는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영원토록!

유릭은 그 놀라운 침착성에 존경을 표하며 팔을 뻗었다(브라보!).

뭐냐, 저 녀석은! 숨어 있던 호텔에서 나온 지 단 두 시간 만에 암살

자라니.

일격이 실패하자, 검은 옷의 암살자는 드디어 그의 무기를 내 보였

다. 석궁이었다. 그것을 팔에 얹은 채, 유릭과 카밀턴을 겨냥하고

있었다. 남자의 팔이 휙 움직였다. 흰 빛이 번쩍이더니, 화살이 허공

을 희게 가르며 유릭을 향해 똑바로 쏘아져 날아왔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쏘아져 나간 푸른 섬광이, 쿼렐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쿼렐

이 박살나며, 흰 빛 가루가 어두운 극장 안에 뿌려졌다. 유릭은 총을

한번 돌려 잡고는 남자를 똑바로 겨냥했다. 그런데 남자의 석궁에

다시 쿼렐이 채워져 있었다.

빌어먹을, 연사다.

유릭은 급히 몸을 날렸다. 쿼렐이 아슬아슬하게 정수리를 스치고 지

나가며 로얄석의 기둥에 퍽 박혔다. 유릭은 엎드린 채로 난간의 틈

사이로 총을 쏘았다. 푸른 탄환이 남자가 서 있는 로얄석의 난간을

향해 똑바로 쏘아져 나가, 그 난간에 명중했다. 대리석으로 된 난

간에 금이 쩍 갔다. 남자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유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난간 위로 올라갔다. 남

자가 다시 석궁을 내밀었다. 그보다 먼저 유릭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뿌리는 섬광은 날카로이 어둠을 베고, 그 남자의 석궁에

명중했다. 석궁이 박살나며 그 파편이 치솟았다. 급히 허리를 숙이

느라 그의 모자가 날아갔다. 검은 머리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

러났다가는 사라졌다. 남자는 로얄 석의 커튼 뒤로 재빨리 숨어 버렸다.

유릭은 난간에서 뛰어 내렸다.

“카밀턴 경, 카밀턴 경!”

카밀턴은 손을 흠뻑 적신 피를 내려다보았다. 유릭이 일어나 그 남자

를 쫓아가려 하자, 카밀턴은 그 손으로 유릭을 잡았다.

“쫓아가지 말게, 크로반 군...... 지금은 나를 지켜.”

“하지만 잡아야 합니다.”

“그 암살자는....저렇게 멍청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암살 시도를 하는

것을 보니, 분명 눈가림용이야. 내 옆에 계속 있게. 자네가 사라지면,

진짜가 올 거야!”

트레비스가 하얗게 질려서 외쳤다.

“빌어먹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괜찮나, 헤리?!”

“별로 안 다쳤고, 내가 위험하다고 말 했잖아. 하지만....젠장, 나도 기

가 막히는군. 모습을 드러낸 지 단 두 시간 만에 암살 시도라니.”

“같은 의견입니다.”

유릭은 총을 품안에 넣으며 무대를 보았다.

로웨나의 노래는 끝나고, 다시 에닌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방금

전의 로웨나가 부른 노래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라, 그녀의 노래는

차라리 자장가처럼 들릴 지경이다. 로웨나는 여전히 유릭을 바라보

며 무대 뒤쪽으로 물러나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트레비스 씨, 저 분과 만나게 해 주세요.”

카밀턴의 상처를 살피던 트레비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릭이 다

시 한번 말했다.

“저 분과 만나게 해 주세요.”

“로웨나 하고는 왜?”

“물어 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리고....카밀턴 경, 분명 그 여자

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분명히 맞습니다. 저를 알아 봤어요.”

트레비스는 어리둥절하며 카밀턴과 유릭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멍하

니 있던 카밀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만나도록 하지. 트레비스, 자리를 좀 마련해 주게....... 저

아가씨와 유릭 군이 단 둘이 만난 다면 당장에 스캔들감이고, 그런

건 자네도 별로 원하지 않겠지?”

“매우 심각하게 바라지 않지....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헤리.

로웨나 양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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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너무 레이디 틱하잖아, 카미! 저를 지켜주세요, 라니!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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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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