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편
붉은 장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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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이 끝나자, 오페라 단원들은 분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며 2막을 준
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 로웨나는 맹렬히 파우더를 찍어 발라대고 있었다. 평소라면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고 살짝 살짝 파우더를 찍어 바르는 새침한
로웨나 였기에, 주변의 동료들은 무언가 아주 무서운 일이 생길 것
만 같아 불안 해 하며 그런 로웨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들 자
기들 분장은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에닌이 파우더를 풀풀 날리는 로웨나에게 걱정스레 말했다.
“로이, 대체 왜 그러니.”
“조용히 해! 화장 틀려!”
그러나 로웨나의 화장은 벌써 심각한 수준이었다. 파우더가 눈썹에
하얗게 내려 앉아 있어, 정말 밀가루를 뒤집어 쓴 모양새였다. 에
닌은 거울을 가져다가 로웨나 앞에 들이댔다. 로웨나가 꽥 고함을
질렀다.
“으악, 이게 뭐야!”
에닌은 한숨을 내 쉬고는 티슈를 찾아 로웨나의 얼굴을 닦아내기 시
작했다. 로웨나는 그런 에닌을 한번 흘끔 보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에닌이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니? 오늘 넌 잘 했어.”
“그것 때문이 아냐.”
“아니긴 뭘 아니니. 걱정 마. 모두 잘 했다고 할 거야.”
“그래, 고맙다.”
어차피 에닌에게 아니라고 말 해봐야 끝까지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아직도 로웨나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 남자 아이, 오늘 기획실장과 한바탕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타났
던 그 아이다. 놀라서 얼굴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그와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웨나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분명 호텔의 서재였다. 서재 2층 난간에 기대고 있다가, 로웨나가 들
어오자 외쳤다. 위험 어쩌고 버럭 외치기래, 조용한 곳을 찾으려
했던 로웨나는 서재를 나가 버렸다.
그런데 오늘, 그 소년이 다시 나타나고 정면에서 엄청난 일들이 펼쳐
졌다. 아무래도 엉뚱한 일에 휘말려 버린 것 같다. 게다가 그 소년은
물론이요, 그 소년과 맞선 검은 옷의 자객 역시 로웨나가 자신을
본 것을 알아챘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으니, 모르면 바보 아닌가.
로웨나는 생각 하면 할수록 등골이 오싹 오싹했다. 에메랄드 석에 들
정도의 귀빈을 공격할 정도의 자객이, 로웨나 같은 무명 오페라 가수
하나 작살내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로웨나의 얼굴이 시사각각 창백해지자 그 이유를 오해한 에닌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마실 거라도 가지고 올게. 첫 무대라 많이 긴장했나 보구나.”
로웨나는 에닌을 흘끔 보았다. 백합처럼 하얀 얼굴에 고운 눈망울을
한 에닌은 로웨나를 걱정스레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에닌도
얼핏이나마 보았을지 모른다. 같은 무대에 있었으니까.
“저기, 에니. 정면으로 보이는 그 자리 말이야, 거기.”
“에메랄드 석 말이구나. 그 자리가 왜?”
그 순진한 눈동자를 보며 로웨나는 그녀가 ‘조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오네그 왕자 역을 맡은 프란츠는 벌써 퇴
장하고, 에닌은 무대 객석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있었
던 것은 로웨나 뿐이었고, 게다가 독창을 위해 앞으로 나서기까지
했으니 정면으로 그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로웨나는 다시 현기증이 났다. 하필이면 내가 출연하는 날에 그런 일
이 벌어질 게 뭐람! 그것도 나 혼자! 그것도 원래 맡은 역이 아니라
대역인데!! 그게 더 억울해!
“어머나, 로이. 안되겠다! 내가 물 가져올게. 너무 긴장했나 보구나.”
로웨나는 이 상황에서 저토록 고전적인 발상을 하는 에닌에게 이번만
큼은 감사했다. 조금이라도 눈이 날카로웠다면(아니, 보통사람 만
큼이라도 되었다면) 로웨나가 무엇에 긴장하고 있는 지 알아챘을 테니.
에닌은 문 옆으로 달려가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랐다. 그리고
막 컵을 들고 로웨나에게 오려는데, 분장실의 문이 열렸다.
에닌은 물을 들고는 문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분장실 안으로 들어
오는 사람을 보게 되자, 급히 인사를 했다. 축 처져있던 로웨나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극장주인 트레비스로, 얼굴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잔뜩 창백해져 있었다. 그 이유를 단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는 로
웨나는 그의 눈길을 슬쩍 피했다. 눈치 없기로는 요양원에 있는 로
웨나의 어머니와 맞먹는 에닌은 밝게 웃으며 트레비스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트레비스 씨.”
트레비스는 에닌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정말 훌륭했어, 에닌 마델로 양. 이번에 그대를 주연으로 캐스
팅한 보람이 있더군.”
에닌이 볼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동시에 오페라 단원들의 눈초리가 질시와 부러움으로 불타올랐다. 특
히, 이번에 그토록 기대를 했는데 결국엔 조연을 맡게 되어 버린
파미나는 눈으로 찔러 죽일 듯이 에닌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에닌을 미워하고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실력도 굉장한데다가
대 부호의 딸인 소녀다. 그 중 하나도 가지지 못한 배우들은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고, 그녀가 또 주연을 맡는 것
도 다 살비에 마델로의 입김 때문이라 쑥덕댄다.
그런데 트레비스의 등 뒤에서 키 큰 소년이 나타났다. 낯선데다가 풍
모 자체도 먼 북쪽에서 온 듯 묘하게 이국적인 소년이라, 행여나 이
트레비스의 친척인가 싶어 단원들 모두 긴장했다. 에닌이 로웨나
쪽으로 다가와 컵을 내밀었다. 로웨나는 잔을 받자마자 벌컥 벌컥
들이켰다. 소년은 로웨나를 보더니 트레비스를 살짝 건드리고는
그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로웨나는 그대로 넘어가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에닌을 보았지만, 에닌은 트레비스 옆에 있는 소년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기절하는 척 해서 에닌을 호들갑 떨게 해보
려 했던 로웨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트레비스가 말했다.
“로웨나 그린 양, 따로 할 말이 있으니 와 주겠어?”
“아, 저, 음. 어머나, 어.......어라, 2막 시작이 얼마 안....남았.... 후우,
네요.”
그렇게 실실 웃으며 말하는데, 소년의 등 뒤로 또 다른 남자가 나타
났다. 에닌이 놀라서 숨을 멈추었고, 역시나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파미나 양이 입을 딱 벌렸다.
헨리 카밀턴, 얼마 전에 의회로부터 제국 무공훈장을 받은 바로 그
헨리 카밀턴 경이었다. 모두 그 수여식에 구경 갔기에 그를 알고
있었다. 여자들의 눈이 동경으로 빛나고, 남자들의 눈은 존경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 때의 늠름한 제복 차림이 아니라, 길고 검은
망토를 두르고 해쓱한 얼굴이 되어 분장실을 보고 있었다. 트레비
스가 말했다.
“헨리 카밀턴 경께서 그린 양을 보고자 하는 거야. 어차피 2막 후반
이나 되어야 그린 양이 등장하니, 시간 좀 내 주지. 멀리서 오신
분이야.”
당장에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이 로웨나를 향했다. 단원들의 그 뜨끈
한 눈초리를 받으며, 로웨나는 이 헨리 카밀턴이 귀족사회에서 예
술에 관한한 바닥을 치다 못해 꿰뚫는 무지함으로 유명하다고 말하
고 싶었다. 후원자가 된다든가 로웨나의 팬이라든가, 하는 일은 절
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소년이 말했다면 뭐라 중얼
중얼 핑계라도 댔을 테지만, 카밀턴 경이 나타나 만나고 싶어 한다
고 하니 무엇으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로웨나는 자리에서 일어
나 문 쪽으로 갔다. 에닌이 상냥하게 말했다.
“같이 가 줄까?”
“아니, 괜찮아. 어차피 너는 2막 시작되자마자 나가야 하잖아(게다가
에닌은 ‘꽃병’과 비슷한 존재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로웨나는 턱을 들었다. 트레비스가 빙그레 웃으며
로웨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분장실 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건장한
세 남자에게 둘러싸이게 된 로웨나는 침을 꿀꺽 삼키려다가 딸꾹질
을 했다. 카밀턴이 웃으며 말했다.
“긴장할 것 없어, 아가씨. 조용히 이야기만 하고 보내 드릴 테니.”
“그게 여자가 듣기에 엄청나게 살벌한 말이란 건 아세요?”
트레비스가 카밀턴의 허리를 콱 꼬집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눈치 없으니 이혼당하지.’ ‘죽을래!’
“정말이라니깐요! 그 때, 저 남자애가 말하지 마자 서재를 나갔다고
요!”
로웨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제발 믿어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트레비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로웨나를 데리고 간 곳은 극장에 있는 트레비스의 접견실이었
다. 귀빈들을 맞이할 때 트레비스가 쓰던 곳으로, 로웨나도 이 극
장과 계약할 때 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카밀턴은, 로웨나가 상대하기에는 정말 하늘처럼 아찔한 신분
의 이 남자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로웨나는 검은
머리 소년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그럼, 섬에는 왜 간 거지? 트레비스가 말하기로는, 그런 곳에 갈만큼
아가씨가 부자인 건 아니라는데.”
“그, 그야.........에닌이.... 도와줬어요. 에닌....아버지가 그 호텔 주인이
니까....그러니까.....”
“왜 간 건데?”
“어, 어머니....때문에요. 그곳.....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로웨나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었다. 제발 어머니가 왜 그곳에 가고 싶
어 했는지, 그 어머니가 어디 계시는 지 묻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
으니, 점점 초조해졌다. 카밀턴은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대고는 그의
옆에 서 있는 소년에게 손짓을 보냈다.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로웨나는 그 조용한 얼굴을 한대 갈겨 버리고 싶었다.
“유릭 크로반입니다.”
순간 로웨나는 눈을 반짝 떴다.
“크로반이라고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요. 가만 그 사람은 트로반이었나? 도
노반? 크로노?”
로웨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금방 생각나지는 않았다. 유릭이 물었
다.
“어쨌건 그 때 저를 보신 게 맞지요?”
“너를 본 게 아니라 정면을 본 것뿐이에요. 그 장면에서 내가 맡은
역은 그렇게 해야 했다고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게 된 건 정말 우
연이라고!”
“저를 알아보고 왜 그렇게 놀란 겁니까?”
“내가 놀란 건, 네가 트레비스 씨하고 같이 있어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요!”
로웨나는 호칭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뭐가 이상한 지는
워낙에 당황하고 있어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우리에게 난처한 짓을 하던 검은 옷의 신사를 발
견한 겁니까.”
“그야.....그 때 제가 해야 하는 연기가 그 쪽을 바라보는 거였거든요.
그러고 막 요렇게 고개를 트는데, 그 남자가 망토를 걷으며 뭘 꺼
내더라고요. 그게 석궁이라 놀란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갑자기 총
을 꺼내 들었고, 화살이 이분을 향해 날아가 박히더군요.”
유릭은 카밀턴을 보았다. 카밀턴은 눈을 크게 뜨고 그리 말하는 로웨
나를 보고 있었다.
“맙소사, 그 거리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본 건가?”
“한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으셔서 그런 것 같은데, 거기 서 있으
면 객석이 구석구석 잘 보여요.”
로웨나는 그리 말하고는 아차 싶었다. 높은 사람 앞에서 말투가 너무
거칠었다. 유릭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 자객도 아가씨 얼굴을 본 겁니까?”
“못 봤으면 눈이 삔 거죠.”
트레비스가 신음을 흘렸다. 카밀턴역시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
며 한숨을 내 쉬었다. 카밀턴이 말했다.
“이 아가씨 공연 일정이 어떻게 되지, 트레비스?”
“그야....빌어먹을,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트레비스의 얼굴이 당장에 창백해졌다.
카밀턴은 한껏 우아하게 말했다.
“사냥꾼이 떴소. 그대의 귀여운 새를 어서 감추어야지.”
“날카로우며 차가운 아침 햇살이 찾아내지 못할 곳으로, 그리하여 저
녁 햇살이 지친 어깨를 늘어뜨리며 노을을 뿜어낼 때까지.”
로웨나의 말에, 카밀턴은 음?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라고
있었다.
“봄의 연가에 나오는 대사잖아요. 그러니까, 거기 아가씨의 목숨이 위
험해 져서 그 약혼자더러 데리고 도망치.......그러니까, 지금 뭐야! 내
목숨이 위험하니까 도망치라는 거에요? 그럼 공연 일정 다 취소
하고요?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에요!! 죽으면 죽었지 공연 취
소는 못 해요!!! 아무리 대역이라지만 그래도 간신히 제대로 된 역을
맡아 본 건데! 이번 주 두 번 다 나갈 거라고--!”
무대 구석구석에 내리박히는 초인적인 성량이라, 그 기함은 참새가
천 마리는 지저귀는 듯 엄청났다.
카밀턴은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카펫에 미끄러져 버렸고, 트레비스는
카밀턴의 옷자락을 움켜잡다가 그 옷자락을 찢어 버리고 말았다. 카밀
턴이 턱을 박는 동안 옆에서 유릭이 한 일은 카밀턴의 어깨가 있던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것뿐이었다. (같이 놀라는 바람에 그도 한발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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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간만에 맥주와 육포로 즐거운 시간일 보냈습니다. 그리고.....
체, 했, 습, 니, 다...-_- ;; 아, 정말 굉장했습니다..... 바닥이랑
천장이 오락 가락~
스캐너를 새로 장만했습니다. 메인 스피커가 떨어지며 바닥에서 자고
있던 스캐너를 개, 박, 살 냈기 때문에(말 그대로 개박살 났습니다.)......
돌아다니다가 참 황당한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김윤아가 잘 불러요,
박기영이 잘 불러요?’ .....;;;;; 정말 황당했습니다. 원래 보컬이란
일정 수준 이상만 되면 각자의 특성과 장점으로 파악하지, 누가 1등이
네 누가 2등이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1등이네, 그리고 나도
1등 수준의 취향이네, 하면서 으스댈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대한민국
교육의 서열우선주의의 천박함이 이런 데도 발견되니 참 씁쓸하군요.
p.s 하사가 '부'사관이었군요. -_-; 죄송합니다...;; 아울이 아직 군대를 안
갔다 와서.......;;;
p.s2 bugmage님, 감사합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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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9장 후원자들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