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32화 (32/174)

제30편

후원자들의 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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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흰 장미’를 본 관객들은 아마도 그 오페라가 만들어 진 이래

최고의 소프라노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박력 넘치는, 그 증오와

분노에 찬 최강의 소프라노에 사람들은 거의 압도당해(아니 기가 죽어)

버렸다.

“그야 감정 이입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으아아아, 오늘은 정말 끔찍

한 날이야-!”

로웨나는 팬들이 쏟아낸 꽃다발 속에 파묻혀 있는 에닌의 칭찬에, 그

렇게 윽박질러 버렸다.

“제대로 해 줄까? 자아, 폭풍우여 오라, 그리하여 이 난도질 되어 너

덜거리는 가슴을 쓸어가라! 풀 한포기 남기 말고 쓸어 가거라! 으엑,

정말 열 받는 다고!”

로웨나가 화가 나면 늘 하는 버릇이, 연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연이

나 악당들이 부르짖는 대사를 ‘혼을 담아’ 외치는 것이다.

“분노가 올가미가 되어 너의 발을 묶으리라! 가라, 가라, 가라! 하지

만 이 증오를 담아, 내 너를 거꾸러뜨리리라! 너의 피로 타는 목을

적시고, 너의 살점으로 내 굶주린 배를 채우리라! 젠장 할!”

보통 연극이었다면, 이 대사가 터지는 순간에 다들 숨을 죽이거나 박

수를 터뜨리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장소가 장소인지라 대기실의 배

우들은 이 열광적인 외침을 듣고도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있을 뿐

이었다.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쟤는 대체 왜 가수가 된 거야?

그 때 분장실 문이 열리며 파미나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동시

에, 문 옆에서 로웨나를 기다리는 유릭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 카

밀턴은 오페라가 끝나는 대로 유릭을 보낼 거라 말했었고, 참으로

부지런한 저 녀석은 벌써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먹구름이 와락 몰려온 듯 기분이 나빠진 로웨나는 고개를 팩 돌려 버

렸다. 저 녀석은 정말 기분 나쁘다. 묘하고 서늘한 눈빛을 해 가지

고서는, 얼굴 생김새도 어디 추운 외국에서 온 듯 요상하고. 그런데

에닌이 말했다.

“로이. 저 사람... 방금 전에 너를 찾아왔던 그 분 아니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로웨나는 끝나는 즉시 유릭과 함께 오라는 카밀턴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부인하려 하면 할수록 유릭과 카밀턴이 쏟아낸

절망적인 상황과 난감한 처지가 천둥처럼 머리 속으로 메아리칠

뿐이다.

“저기, 혹시 외국 분이니? 분위기가 너무 신비로운데.”

로웨나는 그 자식이 뭐가! 하며 윽박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몰라.”

그런데 다른 단원이 나가며 다시 문이 열고 닫히는 순간에 유릭이 등

을 떼며 분장실 안쪽을 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서 준비하고

나오라는 것이다.

결국 로웨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그에게

갔다. 그리고 분장실 문을 쾅 소리가 낮게 닫고는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유릭은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어 열었다. 낡았지만 새겨진 무늬나 장

식을 보니 고급 물건이었다. 아니, 낡은 물건이라기보다는 골동품

이라 불릴만한 물건이다. 로웨나는 행여 이 소년이 부잣집이나 귀족

의 아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떠 올렸다.

“이만 가지요.”

“저기,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는 어디엔가

들러야 해요. 그래서 내일 아침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안되는데요.”

“정말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오늘 마르첼린 여사의 주최로 트레비스

씨의 저택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그곳에 신문의 기자들이랑 부자들이

잔뜩 온단 말이에요. 나는 이제 데뷔하는 가수라서 그런 자리에

안 나가면 건방지니 뭐니 험담을 듣게 되고, 그러면 정말 끝장이라고요.”

로웨나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눈을 반짝 반짝 빛냈다. 연기력을 총

동원한 호소였건만, 유릭은 그 서늘한 눈빛으로 로웨나를 바라보다가

시계를 탁 닫았을 뿐이다.

“압니다.”

“네?”

“알고 있으니, 어쨌건 준비하고 나오세요.”

로웨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만 같은 눈으로(이건 진심이었다) 유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릭은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아주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로웨나가 울부짖으려는 순간에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가요?”

“.......”

뭐 이딴 자식이 있는지,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로웨나는

힘겹게 돌아섰다. 유릭은 팔에 걸고 있던 정장 상의를 입기 시작

했다. 로웨나는 그런 유릭을 한껏 쏘아 보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하

는 짓이 얄미우니, 제대로 골탕 먹이고 싶어졌다. 어디 두고 보자, 너.

로웨나는 잽싸게 분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파우더 케이스를

열어 볼과 이마에 두드리고, 눈썹도 올리고 그리고 해서 화장을 아주

화사하게 고쳤다. 유릭이 어찌하나 살펴보니, 로웨나가 준비를 하

고 있는 거라 판단한 듯 로웨나를 보던 시선을 복도 반대편으로 돌렸

다. 로웨나는 거울을 보고 모자를 쓴 다음, 숄을 챙겨들고 어깨

를 감쌌다. 그리고 에닌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짓을 보냈다.

“에니, 이리 가까이 와 볼래?”

“응. 왜?”

에닌이 가까이 오자 로웨나는 잽싸게 속살거렸다.

“저기, 저 도련님이 네 팬이란다. 너 하고 한번만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어쩌니. 트레비스 씨가 팬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은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에닌의 볼에 홍조가 약간 돌았다. 그런 모습을 그 유명한 안개의 백

작을 만나는 때를 제하고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로웨나는 오호라,

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좀 더 확실하게 골릴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틈에 도망가 버리면 되지, 뭐.

“그래도 네가 잠깐만 만나주면 좋겠는데, 에니...... 너무 간곡하게 청

해서. 너를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서 루게나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잖아. 그런데 워낙에 수줍음이 많아서, 직접 말하지도 못하고

나한테 부탁하더라니까.”

에닌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새침하고 자존심 강해서 평소에는 절대

부탁하는 법이 없는 로웨나가 그리 말하니, 벌써 망설이는 눈치였

다(물론 보통 사람이었다면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 의심부터 했을

테지만, 에닌은 그런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에닌답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깐만이야.”

“물론이지. 아주 점잖은 분이니까, 절대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점잖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니, 거짓말은 아니다.

로웨나는 에닌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분장실의 뒷문으로 빠져나갔

다. 그리고 에닌을 짝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로웨나를 통해

그녀에게 장미와 선물 몇 가지를 전달하기도 했던 미술부의 자코보

를 찾았다. 자코보는 역시나 행여나 에닌의 옷자락 한번 볼 수 있

지 않을까 해서 분장실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어 로웨나의 눈에

쉽게 뜨였다. 로웨나가 부르자, 덩치 큰 자코보는 활짝 웃으며 그

녀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로이! 오늘 에닌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너도 물론 잘 했지만, 나의

에니는 정말 노래의 천사 같았어.”

아아, 저 눈물나게 진부한 표현. 그러나 로웨나는 평소처럼 새침하게

빈정대는 대신 당장에 울상을 지었다.

“물론 알지. 그런데 자코보, 어쩌면 좋아. 세상에나, 트레비스 씨하고

아는 분의 조카 라는 남자애가 에니를 찾아왔지 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코보의 눈에 역시나 불꽃이 번쩍였다. 로웨나는 속으로 씨익 웃고

는 속살속살 말했다.

“그 사람이 벌써 트레비스 씨에게 말해서 에닌과 단 둘이 만나게 되

었어. 어차피 트레비스 씨가 잠깐만 시간을 내 도록 해 준거지만,

그래도 좀 곤란하더라고.”

단순하고 성질 급한 자코보는 당장에 이를 북 갈았다. 그도 상류층

자제들이 미인인 오페라 가수들에게 얼마나 치근덕대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컷 가지고 놀고 버린다는 것도, 그 덕에 인생 망

친 여가수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도.(동시에 에닌이 신분으로

는 낮아도 재정적으로는 매우 부유하다는 것은 잘도 잊어 버렸다.)

“트레비스 씨하고 아는 분의 조카라니! 대체 어떤 놈팡이야! 빌어먹

을!”

“그야 나도 모르지.... 어쨌건 지금 그 사람과 이야기 하는 중일 테니

까, 에닌과 이야기 하고 싶으면 조금 뒤에 이야기 하라고 전해주려고

왔어.”

자코보가 진지하게 물었다.

“잘 생겼어?”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에니는 어딘지 신비롭게 생겼다고 하

던걸.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너보다 키도 작고 근육도 없어. 내가

보기에는 네가 훨씬 더 멋있는 걸. 흐음.”

당장에 자코보의 얼굴에 우쭐한 기색이 비쳤다.

“지금 만나고 있는 거야?”

“물론이야. 분장실 앞문 앞에 있어.”

자코보는 로웨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당장에 분장실로 달려갔

다. 로웨나는 가볍게 휘파람을 부르고는 그를 따라갔다.

로웨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릭은 분장실에서 자태 고운 소녀

가 얌전하게 나오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다. 오늘 주

연을 맡았던 에닌 마델로라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저-”

에닌이 뭐라 말하려 하다가 어물거린다. 유릭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

가 듣기 좋을 말을 건넸다.

“오늘 잘 봤습니다, 마델로 양(물론 어차피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에닌도 수줍게 웃었다. 유릭은 다시 문의 손잡이를 보기 시작했다.

어서 저 손잡이가 돌아가고 로웨나가 나와야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누울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머뭇거리던 에닌이 얌전하게 물었다.

“아, 저 성함이-”

“유릭 크로반.”

“고마워요, 크로반 씨.”

“좀(사실은 아주) 촌놈이라 세련된 찬사는 못하겠지만.....어쨌건 아주

잘 부르시던걸요.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어머나.”

에닌은 볼을 붉혔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 소녀는 정말 예뻤다. 잘 된

조각처럼, 누구라도 예쁘다 칭찬할 만한 미모였다. 그러나 유릭은

고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흠 없이 완벽하며 아름다운

귀부인들의, 그러나 전혀 사랑스럽지는 않은 그런 초상화 말이다.

에닌이 조금 우물대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저기....”

“네, 말씀하세요.”

행여나 로웨나가 무언가 전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유릭은 그녀

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분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덩치가

곰만한 남자가 튀어나와 유릭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저기요?”

“이 자식이, 지금 누구한테 치근덕대는 거야! 잘난 집 아들이면 다

야!”

유릭으로서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호칭이었다. 유형

수 아들이 잘난 집안 아들이라면, 거리 부랑아는 황손이다.

“네?”

에닌이 남자의 팔을 잡았다.

“자코보, 아니야. 이분은..... 저기, 이분은!”

“에닌, 이런 자식은 아예 처음부터 혼쭐을 내야 한다고! 트레비스 씨

가 늘 말했잖아! 이런 놈이 처음에는 세상을 다 바칠 듯이 졸졸 따

라다니다가, 나중에는 정말 헌신짝처럼 차 버린다고!”

“저기요?”

무언가 아주 단단히 오해를 받은 것 같아 대체 왜 그리 화를 박박 내

는 지 물어 보려 했지만, 남자의 곰 앞바닥 같은 손은 유릭의 목을

짓누르고 있어 켁- 하는 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당장 꺼져, 너! 어서 당장 꺼지라고!”

유릭은 이 남자를 때려눕히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옷

을 보니 아무래도 극장의 직원 같고, 이런 직원을 아무리 오해 때

문이라지만 두들겨 팼다가는 극장 주인인 트레비스를 화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섣불리 손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분장실 문이 열리며 로웨나가 나왔다. 로웨나는 완벽하게 외

출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유릭을 보더니 메롱- 하고 혀를

냅다 내밀고는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그제야 유릭은 상황을 알아챘지만, 그 때는 이미 자코보인지 뭔지 하

는 녀석의 바위 같은 주먹이 유릭의 턱을 강타한 뒤였다.

아마도 칼 뷰겐트의 ‘예뻐해 주는’ 주먹과 맞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릭은 나가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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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에드는 뭐 하고 있으려나~

p.s 오타 수정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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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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