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편
후원자들의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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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망갔다고?”
“네.”
“자네 특무부 맞나?”
“......맞습니다.”
“빌어먹을, 당장 쫓아가악---!!!!”
“.......”
유릭은 그 ‘덩치 큰 놈’에게 얻어맞는 중에도 로웨나를 찾기 위해 현
관 쪽으로 달려갔지만, 로웨나는 벌써 지나가는 마차를 집어타고
도망쳐 버린 뒤였다. 유릭은 정말 자괴감 비슷한 감정마저 느꼈는데,
평범한 오페라 가수일 뿐인 그녀가 추적에 관한한 사냥개와 비
슷한 수준인 특무부 소속의 그를 따돌렸기 때문이다.
유릭은 창피를 무릅쓰고 카밀턴에게 달려갔고(중간에 다시 덤비는 자
코보는, 시간이 없는 고로 그냥 쓰러 뜨려 버렸다. 지금쯤 깨어났을
테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듣게 되자 카밀턴
은 버럭 버럭 화를 낸 뒤에 당장에 가겠다고 일어났다. 트레비스는
절대 안 된다고 말렸고, 트레비스와 카밀턴이 또 옥신각신 하는 동
안 유릭은 어질어질한 머리와 욱신욱신한 턱과 카밀턴의 지팡이와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결론은 결국 트레비스의 저택이기도 한 마르첼린의 파티장
으로 가는 것이 되었다. 말려 봤자 듣지도 않자 트레비스는 표정까지
바꾸며 엄격하게 말했다.
“좋아, 만나는 것은 허락하도록 하지. 그렇지만 하나는 분명히 하자
고. 자네가 직접 찾아서는 안 돼. 절대.”
“왜!”
“자네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는 놈들이 이 브란 카스톨에 얼마나 많
은 지, 자네가 더 잘 알잖아. 특히나 자네 이혼 사유는 온 브란 카
스톨이 다 안다고! 뿐만 아니라 자네가 결혼하기 전에 얼마나 바람
둥이였는지는, 당시 상대들의 현재 남편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 테고!
그런 자네가 열일곱 살 먹은 오페라 가수에게 말 거는 거 들켜봐.
로웨나 그린 양은 물론이요, 자네까지 끝장이라고! 자네야 워낙에
씹히는 인간이라 뭐로 씹히든 상관없네만, 그린 양은 내가 키우는
가수란 말이야. 제대로 키우기도 전에 그런 추문에 휩싸이게 할 수
는 절대! 없어.”
카밀턴은 유릭을 가리켰다.
“그럼 크로반 하사에게 시키면 될 거 아냐. 이 녀석한테.”
“좋아, 분명하게 약속하는 거지?”
“이봐,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어기지는 않지. 다만 중간에 잊어먹어 버릴 뿐이지....! 젠장,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자네가 내 다락방에 나타난 날 그날로 쫓아냈어야
했어! 거의 나타날 때마다 사고야!”
“자네는 뭐 대단했는 줄 알아! 파혼당한 다음에 죽네 사네 설치는 놈
잡으러 파난 까지 달려간 게 누군데!”
“이혼이나 당하는 인간한테 훈계 받을 생각 없는데.”
“아하, 그래도 나는 결혼이나 하고 이혼했지. 자네는 결혼식 당일 날
안드로마케에게 채였잖아.”
“안드로마케가 마놀료 수도회 수녀가 된 건 내 탓이 아니잖아! 젠장,
그날 신의 계시가 내릴지 내가 알았나! 연적이 신인데 나보고 어쩌
라고.”
“아하, 자네가 세상을 심각하게 우울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 아닌
가? 그러니 결혼 당일 날 위대하신 신과 눈 맞아 도망쳐 버렸지.”
“카밀터언-!”
이러다가는 세살 때 이불에 실례한 것 가지고도 싸울 것 같다는 생각
에, 유릭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극장 직원에게 트레비스 대신 마차
좀 부탁 한다 전했다. 그리고 카밀턴과 트레비스가 이말 저말 이
주먹 저 주먹 오고가는 것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을 붙잡아 끌고
문 앞에 대기 중인 마차로 향했다.
“두 분께서 가슴 아픈 추억을 오랜 시간 같이 나누어온 절친한 친구
분들인 건 알겠는데,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카밀턴이 젊은 시절에 좀 날리던 남자고, 트레비스가 아직도
홀몸인 것이 결혼 당일날 파혼 당한 상처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세 사람이 타자마자 마차는 돌진하듯 트레비스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차가 돌진하는 내내, 카밀턴과 트레비스는 반대편을 노려
보며 씨근덕거렸다. 보아하니, 카밀턴은 ‘이혼’ 이야기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트레비스는 ‘파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비슷하게
싫어하는 것 같다. 마차가 멈추자, 카밀턴은 저택에 도착해서 멈춘
건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트레비스가 당장에 그
의 뒤를 따라 뛰어나가며 그를 붙잡았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 벌써 잊었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지, 다
른 문으로 들어가서 내 서재로 들어가 기다리던지 하라고. 이렇게
뛰어가서 ‘로웨나 그린 양, 당장 나오시오!’ 하고 외칠 생각인가!”
“벌써 잊어버린 줄 알아? 자네 서재로 올라갈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유릭이 그의 붉어진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벌써 ‘잊고 있었
던’ 듯 했다. 트레비스는 카밀턴을 놓아주고는 말했다.
“나는 마르첼린에게 가서 로웨나 양에 대해 말해 놓겠어. 헨리, 당장
에 서재로 올라가 버려. 다른 놈들 눈에 뜨이기 전에. 오늘 초대한
사람에게는 렌든도 있단 말이네.”
카밀턴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빌어먹을, 누가 그런 놈 초대하라고 했어!”
“그건 마리에게 따져. 마리가 그 놈 마누라하고 친하잖아.”
누구 이야기 하는 지 유릭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카밀턴이 이를 북북
가는 동안 트레비스는 먼저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유릭이 뒤따라 내리자, 카밀턴은 끓어오르는 숨을 후욱 들이 마쉬고
는 말했다.
“최대한 빨리, 무조건 찾아야 하네, 하사. 내가 나왔다는 것이 알려진
지 두 시간 만에 암살자가 들이닥쳤는데, 나보다 더 만만한 풋내기
신인 가수는 삼십분 만에 끝장나도 할 말이 없는 거야. 그러니 찾아.
벌써 자네가 엿먹인 특무부의 명예를 걸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현관 까지는 같이 들어가야겠군. 뒷문으로 가는 길을....잊었
어.”
트레비스가 옆에 없기를 다행이다. 유릭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
당겼다. 카밀턴 경이 먼저 앞으로 나서 저택의 활짝 열린 현관으로
들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파티장은 엄청났다. 샹들리에는 별이 쏟아지는 듯 반짝이고, 구석구
석 놓인 등불에서도 금빛 빛이 퍼드러지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들
리는 가운데, 호화롭게 차려입은 상류층 사람들이 웃고 떠들어 대며
그 파티 장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갖 화려한 옷에, 그 목과 가
슴에 번쩍이는 보석들은 눈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유릭은 그 중에 파난 산 사파이어들을 쉽게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것을 캐기 위해 폐가 썩어 들어가는 어린아이들과 죄수들도 쉽게도
기억할 수 있었고, 그것을 파내는 광산보다 더 깊은 곳에서 바스러
져 버린 아버지는 너무도 시리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보니, 유릭은 상황이 우스꽝스럽고 허망하다고 생각되
었다. 지금 필사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지금 앞에서 춤추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술잔 끝의 빛처럼 너무도 허망하게 보였다.
카밀턴이 어깨를 툭 쳤다.
“어서 찾지 않고 뭐하나.”
“.....다들 이러고 삽니까?”
카밀턴은 그제야 유릭이 왜 멈추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에 어린 것은 부러움도 선망도 아닌, 서늘한 슬픔이었다.
“군인의 피와 노동자의 절규와, 대를 이어 피와 눈물을 쏟아낼 그 후
손들이 바치는 부가 이루어 낸 번쩍임이네. 하지만 유리 군, 그 이
야기는... 우리 나중에 하지.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잖나.”
“압니다.”
유릭은 여자들을 살폈다. 번쩍이는 드레스 자락에 푹 파묻힌 여자들
중에 날씬한 로웨나 그린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번쩍 번쩍 거리니 현기증 일어난다.
“나는 트레비스의 서재로 가 있겠네.”
“알겠습니다. 제가 데리고 가지요.”
“좋아, 서재에서 조용히 말하고, 말을 안 듣는 다면 조용히 기절시켜
서 데리고 가면 되니까 일단 찾아서 데리고 오기만 하면 자네 임무는
끝이고, 이번 실수도 용서해 주지. 하지만 또 실수하면 화 낼 거야.”
“감사합니다.”
유릭은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헤어지기도
전에 그들 옆에 있던 하인들이 크게 인사를 외치며 허리를 꺾었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이, 그것도 굉장한 귀빈이 온 것이다. 뒤를 흘
끔 돌아본 카밀턴이 나른히 한숨을 내 쉬고는 벽 쪽으로 물러났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서늘해졌다 싶어서 유릭은 대체 누가 왔나
돌아보았다.
“이런, 헨리 아닌가. 벌써 귀국 했나?”
카밀턴이 으르렁거리며 돌아섰다.
“왜? 귀국 축하파티 준비 중이었나?”
현관에 번듯한 장교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카밀턴 보다
두 어 살 많아 보인다. 옅은 갈색 머리에 구렛나루를 기르고 있었고,
얇은 눈에 두툼한 코를 가지고 있어 늑대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런데 정말 묘하게 웃고 있었다. 입술 끝을 슬쩍 올리며 둘을 보
고 있는데,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라 상대방을 표정으로 압도하여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너무도 뻔히 보이는 비웃음이었다. 카
밀턴은 손을 들어 휙 휘두르고는 말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윌리엄.”
“귀국한다는 소식은 들었네.”
“추기경 예하께서 전해 주시던가?”
“직접 전해 주시더군.”
“이런, 나한테 관심 많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네.”
“자네야 여러 모로 유명인사지.”
얼음 속에 있는 듯 싸늘하며, 칼을 댄 듯 예리한 분위기였다. 카밀턴
은 턱을 든 채로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지독했다. 증오와
경멸을 담은, 벼리고 벼린 칼날마냥 매서운 눈빛이었다. 트레비스
와 실없이 티격태격 하고, 이리 저리 덜렁대며 유릭을 골치 아프
게 하고, 철없는 조카를 향해 지팡이를 휘날리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렌든이 웃으며 유릭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늑대가 웃는 듯 소름이
끼쳤다.
“자네의 그 신경과민 전처가 붙여준 경호원이 이 꼬마인가 보군.”
“렌든-”
“출신 성분 멋지더군. 유형수 아들이라. 그것도 자네 아버지가 연루된
것과 꽤나 비슷한 사건에 연루된 유형수 아들.”
“그만해 두게, 렌든. 자네와 크로반 하사는 처음 만나는 사이이고, 그
런 식으로 출신을 문제 삼는 것은 아--주 유치하고 저열한 어법
이라 생각하네.”
방금 전보다 카밀턴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 져 있었다. 그러나 렌든
은 비웃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네의 목숨을 노리겠나. 그러니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면 집어 치워. 우리가 그 정도에
당할 정도의 얼간이들이었다면,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 부상은 뭐라고 생각하나. 이 다리 말이야.”
“멀쩡한 길바닥을 가도 넘어지는 자네 아닌가. 다리 부러지는 거야
다반사일 테지.”
카밀턴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그만 두도록 하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은
정말 사양이라니까.”
“하긴, 주인이 없으니 사냥개는 얌전히 있어야 도리겠지. 하지만 헨
리, 우리는 토끼가 아니라 사자야. 서툰 사냥개를 풀어 놓는 다면,
즐거운 밤참으로 알고 집어 삼켜 주겠어.”
렌든과 함께 온 젊은 아가씨가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분위기가 심
상찮아지자 싫은 것이다. 카밀턴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팡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렸을 뿐이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렌든은
웃으며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자, 카밀턴은 흠뻑 젖
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나른히 숨을 몰아쉬었다.
“누굽니까.”
“뭐, 정적이라고 해 두지.”
유릭은 혹시나 하며 묻는 눈길을 보냈다. 카밀턴은 푸흡, 하고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아냐, 저 얼간이는. 그런 방법을 상상하지도 못해. 그 정도 되는 실
력자를 부릴 정도의 능력이 되지도 못하고.”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뭔가 아주 개인적이고도 오래된 언짢은
감정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나하고는 같은 학교 동기야.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 말이야. 둘
다 같은 죄목으로 아버지가 체포되었고, 둘 다 비슷한 처지가 되었
다네. 나는 레반투스 대공에게로 갔고, 저 친구는 자기 아버지를
체포했던 니콜라스 추기경 밑으로 들어갔지. 근본을 의심받는 자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리고 저런 얼간이가 택하는 방법은, 늘 열
광적인 충성이란 말이야. 공포와 무지에 근거한 열광은 무서워. 지겹
고, 끔찍하고, 젠장! 정말 진절머리 난다고.”
“경에 대한 암살과, 저 사람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뻔하지. 나는 레반투스 대공 편이고, 니콜라스 추기경은 저 남자를
이용하지. 저 얼간이는 내 암살 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이
니콜라스 추기경을 실각시키기 위해 내가 꾸민 자작극이라고 확
신하는 거야. 추기경은 다행스럽게도 브라키니아 출신인 교황과 사
이가 나쁘고, 교황은 언제라도 추기경을 파문시킬 궁리만 하고 있으
니까. 그런데 저 얼간이가 저렇게 나오면, 꼭 기가 막힌 일이 벌
어지고는 하는 게 문제란 말이야..... 빌어먹을, 저 얼간이 덕에 서부
전선에서 브란 카스톨까지 사문회에 불려 간 적도 있었다고......!”
그리고 정말 생각하기 싫은 듯 카밀턴의 눈이 어두워졌다. 유릭이 말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한 거로군요.”
“응?”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분명한, 그리고 전혀
상관없는 제3자의 증거 말입니다.”
“잘 아는 군.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가 위험하다는 것조차 납득시켜야
할 판이라네.”
“그리고 추기경을 실각시키기 위한 증거이기도 하고요.”
“결론이 그리 된다면 이 세상에 평화가, 쯤이 될 테지.”
유릭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카밀턴은 의아해 하면서
도 긴장했다.
“이제 제가 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확히 알게 된 것 같군요.
어쨌건 로웨나 그린 양은 꼭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유릭의 눈빛이 카밀턴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한 꺼
풀 차가운 막이 잠시나마 벗겨진 듯한, 아주 상쾌한 기분이었다. 무
언가를 얻은 듯한 기분, 그것도 썩 괜찮은 것을 얻은 듯한 성취감
과 함께. 카밀턴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2층으로 오르는 계
단을 향했다. 유릭은 그가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콰당, 아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자코보는..... 실려 갔고, 그 분은 결국 집으로 돌아갔어. 정말 너
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릴 수도 없었지 뭐야.”
파티 장에 도착한 로웨나는 에닌과 만나 그녀가 떠난 뒤의 상황에
대해 듣게 되었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등골이 조금 오싹했다. 그
래도 어쨌건 파티에 참석은 했으니, 나중에 그 녀석이 뭐라 하든 말든
그건 나중 일인 것이다.
“참, 로웨나. 방금 전에 좋은 분을 만났는데 네게도 소개 해 줄게.”
“응?”
그리고 에닌은 그녀를 에닌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데리고 갔다.
작곡가 지망생이라는 시무스 달턴이라는 남자로, 깡마르고 창백한 얼
굴이었지만 눈만은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이글거리는 갈색 눈이
드러나 로웨나는 오싹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는 에닌에게 홀딱 반해
있었고, 에닌이 로웨나와 함께 돌아오지 들뜬 눈으로 바라보며 찬사
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행여나 자신에 대해 무언가 말 해줄까, 해서
기대하던 로웨나는 자리가 금방 지겨워졌다. 에닌이 정말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 거라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에닌은 자신에게도 친절하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거라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어마어마
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여기 저기 살피고, 딴 생각을 하고, 막 하품을 하려
다가 하인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소년을 발견했다.
로웨나는 입을 딱 닫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유릭이었다. 이런..! 여기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네.
로웨나는 한참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그쪽을 보았다. 유릭은
하인에게 무언가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이 빙그레 웃으
며 로웨나 쪽을 가리켰다. 으악, 뭐하는 거야! 저런 친절은 베풀 필요
도 없다고!
로웨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뒤가 근질근질 한 것이, 금방이라도 유릭
이 나타나 어깨를 잡을 것만 같았다. 로웨나는 급히 여기 저기 살피다
가, 멀지 않은 곳에 정원으로 향하는 창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웨나는 갑자기 창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착한 에닌이 한참 작곡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랐다.
“어머나, 로이! 무슨 일이니?”
“아아.....모, 모르겠어...... 약간 현기증이..... 미안. 이렇게 중
요한 자리에서.....”
그러며 로웨나는 유릭을 살폈다. 유릭은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로웨
나를 찾고 있었다. 하인은 대강 이쪽이라고는 이야기 했지만 정확하
게 가르쳐 주지는 못한 것이다. 만세! 로웨나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
다.
“또 빈혈이니? 정말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 그러게, 내 주치의를
찾아 가 보라고 했잖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잠깐 바람만 좀 쐬면 될 것 같
은데.....도와주겠니?”
그리고 로웨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에닌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으로 로웨나의 손을 잡았다. 로웨나는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이마를 기댔다. 그러나 눈만은 날카롭게 유릭을 살폈다.
유릭은 로웨나가 있는 곳으로 계속 두리번거리며 오고 있었으며, 에
닌에게 가려져 있기에 로웨나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없는 각도였다.
에닌이 로웨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같이 나가줄게, 로이. 너무 피곤하면 우리 집에 가서 쉬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에닌 양, 로웨나 양!”
역시나 작곡가 지망생이 나섰다. 그에게도 로웨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시무스 씨.”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우리 조용한 곳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아주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의 대화 양상을 돌이켜 본다면 구두 굽으로 발등을 찍으며 당
장 못 꺼져, 이 떠버리야! 하고 험악하게 윽박질러 대고 싶은 심정이
었지만 로웨나는 유릭에게 신경 쓰느라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의외의 곳에서 꼬여 버렸다. 마르첼린 여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그녀가 로웨나를 불렀다.
“그린 양, 굉장한 분이 그린 양을 만나고 싶어 하는 군요.”
로웨나는 얼결에 돌아보았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운 마르첼린 카트슨
여사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키가 작은 신사가 한명
서 있었는데, 로웨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오페라 작곡자이자
트레비스의 동업자중 하나인 므첸스키였다.
로웨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오늘 아주 인상적이었소, 로웨나 그린 양.”
“여, 영광입니다.”
로웨나는 치마를 걷으며 인사를 했다.
“오늘 주연도 아닌 조연이었지만, 정말 근사한 노래였소. 첫 무대였
지만, 정말 교회 천장에 울리는 듯한 힘찬 목소리였어.”
“과찬이세요.”
므첸스키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시벨리나 양 대신 출연한 것이라면서.”
“네. 시벨리나 양이 갑자기 아파서 제가 대신 하게 되었지요.”
“언젠가는 정말 주역이 되어 출연하는 것을 보고 싶소. 처음부터
그대에게 주어지는 역으로 말이오. 아니, 당장에 내일 모레 공연을
다시 보고 싶어질 정도요.”
“너무 감사합니다!”
로웨나는 천진하게 웃었고, 그 모습에 므첸스키 역시 귀여운 딸을 보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 호감 넘치는 미소에, 로웨나는 유릭에 대한 일
은 완벽하게 잊어 버렸다. 너무 기뻐서, 오늘 본 일마저도 꿈에서 본
일인 듯 느껴지기 시작한다. 역시 그 녀석을 그렇게 치우고 온 보람이
있었어! 그래서 에닌의 어깨 너머로 유릭이 나타났을 때 로웨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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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카밀턴과 트레비스가 좀 오래 싸웠습니다. 그 동안 에닌도
로이도, 모조리 드레스로 갈아입고 파티에 왔습니다.
그나 저나 울적한 마크를 달고 다니는 이혼남 카미와 파혼남 트리;;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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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