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편
후원자들의 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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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웨나는 여전히 웃고는 있었지만, 에닌의 어깨너머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는 유릭이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상황에서 이 아가씨는 위험하니 어쩌고 하면서, 다음 공연에 나오지
않을 거라 말하면 최악이다. 그런데 에닌이 유릭을 먼저 발견했다.
“어머나, 크로반 씨. 턱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아, 저 로웨나 그린 양-”
일 났다, 로웨나는 억지로 (쳐다보는 순간에 그가 꺼져 버리기를 간
절히 바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장 안 꺼져? 싫은데? 정도의
대화가 텔레파시로 팍팍 오고갔음에도, 유릭은 로웨나에게 다가왔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바라던 기회가 왔는데, 이
이상하게 생긴 녀석 때문에 다 망치게 생겼다.
그리고 그 때,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대기 시
작한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파
티장 안을 휩쓸어 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에닌마저도 볼을 붉
히며 입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므첸스키도 로웨나를 잠시 잊은 채
입구 쪽을 돌아보며 들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때 옆에서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요.”
“에, 응?”
로웨나는 고개를 팩 돌렸다. 바로 등 뒤에 유릭이 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릭은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켜 보였다.
“지금 안 가면 메고라도 갈 예정인데.”
“싫어요! 지금 어떤 자리인 지 알기나 해요?”
“알지만 저하고는 상관없잖습니까.”
“한 시간,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절대 이 파티장을 안 떠날 거에요. 알
겠어요? 그 정도도 못 봐줘요?”
그런데 유릭이 정말 로웨나의 허리를 잡았다. 이 정신 나간 녀석이
정말 들쳐 메고 가려나 싶어서 로웨나는 꽥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
때 입구에서 회색 망토를 두른 키 큰 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파
티장에 들어서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주변을 둘러 보더니 아
는 사람이 다가오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주 잠깐, 유릭의 눈
이 그 신사를 향했다. 로웨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의 발등을 콱
내리 찍었다.
“억-”
유릭이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로웨나는 슬쩍 주변을 살펴보
고는, 모두의 시선이 새로 나타나는 신사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확
인하고는 유릭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저기-”
유릭이 뭐라 말하려 하자 로웨나는 다시 그의 발등을 찍었다.
“큭-”
로웨나는 주변을 잽싸게 살펴, 바로 근처의 테이블에 트라브 열매 접
시와 술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트라브 열매는 안주로 자주
쓰이는 것이지만, 그 지독하게 매운 맛 나는 껍질을 벗겨야 안에
있는 달콤한 과즙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껍질을 미리 벗기면 금
방 색이 변하고 맛도 변하기 때문에 연회용으로 나올 때는 손님이
요구하면 하인이 직접 그것을 벗겨 준다. 로웨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트라브 먹어 본 적 있어요?”
“네?”
“아, 한번 맛보라고요. 촌놈에게는 정말 다시는 맛보지 못할 근사한
경험을 하게 해 줄 테니.”
그리고 로웨나는 열매를 집어 유릭에게 주었다. 유릭이 멍하니 있는
데, 로웨나는 그의 허리를 잡아 비틀었다. 유릭이 신음과 함께 입을
벌리는 순간에 로웨나는 그의 입 안에 그것을 쏙 집어넣었다. 유릭
은 얼결에 그것을 씹고 말았다.
“지금 뭐 넣은 겁니까?”
“하나, 둘, 셋.”
“읍-!”
당장에 유릭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어머나, 정말 매운가 보네. 여기 마실 것.”
로웨나는 술잔을 건네주었다. 유릭은 그 술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말
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로웨나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유릭은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속이 확
확 타는 것 같아 다시 술을 찾아 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나 머리가
핑 도는 듯 그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곱게 안 물러난 벌입니다, 검고 음흉한 박쥐 신사 분.”
그리고 로웨나는 손에 키스를 하고는 날리듯 흔들어 주고는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었다. 유릭은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술기운 때문에
허공만 망연히 짚고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대체 어떤 술을 건네
준 건지, 머리는 순식간에 핑핑 돌았다. 그런데 덩치 좋은 하인 하
나가 성큼 성큼 다가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손님, 바람 쐬시겠습니까? 어느 여자분께서 손님께서 아주 과음을
하셨다고 하더군요.”“아, 네?”
“젊은 분이 벌써 그렇게 과음을 하고 숙녀분께 무례를 저지르시면 안
되지요. 어서 밖으로 갑시다.”
그리고 유릭은 하인에게 덜미가 잡혀 바로 정원으로 쫓겨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방금 전에 그녀와 이야기 하고 있던 중년 남자를
다시 찾아가 발랄하게 말을 건네는 로웨나였다.
“빌어먹을 계집애.”
유릭은 핑핑 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휘청거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말았다. 드
러누운 바닥이 통째로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며, 유릭은 하염없이 그
대로 누워 잠들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 올라왔지만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변은 빙글빙글 돌고, 들리는 소
리는 모조리 윙윙대는 소리로 들릴 뿐이고 속은 울렁울렁 거린다.
몇 번째 당하는 건가, 하고 세 보려다가 기억도 나지 않아서 관두어
버렸다. 목이 확확 타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어디선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비실비실 기어갔다.
조개모양의 수반(이기는 했지만 유릭의 눈에는 커다란 사발 비슷하게
보일 뿐이었다)에, 그 옆에 서 있는 여신상(유릭의 눈에는 몽둥이
비슷하게 보인다)이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유릭은 다시 빌어먹
을 계집애, 라고 중얼거리며 그 차가운 물을 마셨다. 목을 대강 축
이자 고인 물로 얼굴을 씻었다. 머리카락까지 흠뻑 젖도록 세차게
얼굴을 닦아내니, 그제야 간신히 정신이 좀 든다.
유릭은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는 수반 옆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
았다. 여름이 오고 있어서, 후끈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볼을 말려
주었다. 오싹하다.
-형은 언제나 무표정하게 나 완벽해, 하고는 있지만 엉뚱한 곳에서,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된통 당한다고.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조심해.
그래, 또 바보짓 했구나. 가토.
유릭은 푸후-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시큰한 술 냄새가 확 피어올
라, 머리가 다시 띵해져 온다.
오싹오싹해 오던 뒷덜미가 이제는 서늘하게 느껴진다.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 지고, 온 몸은 젖은 듯이 눅눅해진다.
유릭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누릇한 조명에 젖은 정원수들과 그 틈틈
이 숨은 진한 어둠뿐이다. 유릭은 다시 고개를 푹 떨구고는 바닥을
보았다. 잔디가 비죽비죽 솟은, 거북이 등 같은 포석이 보인다.
머리가 더욱 무거워 지고, 눈이 감겨왔다. 잠들면 안 되는데, 할 일
이 있는데, 해야 하는데......그렇게 생각하며 유릭은 다시 얼굴을
적시기 위해 수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수
반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작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꿈쩍도 하기 싫었다.
“젠장-”
유릭은 다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많이 마셨나 보군.”
기묘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멍한 상태에서 듣고 있는데, 얼음
처럼 싸하게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너무도 뚜렷하다, 그 목소리는. 더운 여름 새벽에 목 줄기에 닿아오
는 얼음마냥.
누굴까.
유릭은 무거운 고개를 돌렸다. 회색 망토가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보고 있는 듯은
한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술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 풍기는 그 ‘회색의 느낌’만은 너무도,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남자는 안개 같았고, 구름 같았고, 연기 같았다. 새벽의 한숨처럼, 싸
늘하고도 모호하다. 그 남자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수반의 물을 적
셨다. 유릭이 눈길을 내렸을 때 그는 그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유릭
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 수건을 받아 얼굴을 덮어버렸
다. 손수건에 배인 기이한 향수냄새가 머리를 쿡 찌르고 들어왔다.
처음 맡는 냄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술을 마신 거지?”
“불순한 겁니까?”
회색의 남자가 웃었다.
“불순의 말뜻은 알고 있나?”
“보기 아니꼽다는 뜻이지요.”
남자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한 답을 했나, 그리 생각하
며 유릭은 고개를 젖혔다.
신사가 그를 보고 있었다. 아주 무표정하고 기분 나쁜 표정이라 생각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은 회색 가면에 덮여 있었다.
남자는 가면의 끄트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 손 역시 두툼한 회색
장갑에 덮여 있었다. 그리고......껍질을 벗듯이 남자는 가면을 벗었다.
얼굴이 드러났다. 희고 창백한 얼굴에, 고인 듯 조용한 회색 눈동자.
반듯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과, 역시나 잿빛 눈썹.
유릭은 안개로 만든 조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구름으로 만든 조각을
보는 듯도 했으며, 희끄무레한 달빛 한줌으로 빚어진 조각을 보는
듯도 했다.
그 얼굴에는 피없는 차가움이 있었다. 심장 없는 오싹함이 있었다.
낯설고 낯선, 살아 있는 것 하나 없는 매끄러운 대리석의 공간에
홀로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다시 어지러워진다. 머리를 쿡 찔러 들어오는 두통과, 뱃속에서 벌레
가 스물 스물 기어 다니는 듯한 거북함.
“이름이 뭐지.”
“유릭 크로반.”
“그래.......유리.”
그 말끝에는 나른한 한숨 같은 것이 묻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고개
를 돌려 파티장 쪽을 보았다. 깎아낸 듯한 옆얼굴이었다. 깊은 눈
매와, 날렵한 콧날과, 꾹 다문 입술에는 잘 맞춘 듯한, 동시에 비인
간적인 완벽함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북해 끝의 북극성마냥.
유릭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머릿속이 모두 얼어붙는 것만 같
았다. 생각난다. 멀고 먼, 등 뒤에 두고 온 파난 섬.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 까맣고 까만 어둠이 고인 그곳, 지하의 오래된 마법사
여왕의 무덤.
추위가, 엄청난 추위가 쏟아진다. 그대로 얼어붙어 바위 같은 잠 속
에 가두어 버릴 듯한, 그런 추위가.
남자의 손이 다가왔다. 기이한 향수냄새가 다시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왔고, 그것은 곧 어둑어둑한 무의식 속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의식이
툭 끊어져 버렸다. 휘몰아치듯 올라온 취기가 그 기묘한 모든 것
을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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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지금 상황 분석....
에드- 그래, 유리....
유리- 누구신지? -_-a
p.s 저는 군면제자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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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