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36화 (36/174)

제34편

꼭대기 방#1

****************************************************************

으슬으슬 춥다. 뼈까지 얼어붙을 듯이 춥기만 하다.

그렇게 추운 날이었다는 것만을 기억한다.

점잖게 차려 입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겨울에 입기에는 너무

얇은 바지와 셔츠를 입힌 그들은, 소년을 데리고 거대한 기둥들과

미끄러질 듯 깨끗한 복도를 지나 어딘가로 향했다. 두터운 벽돌로

뒤덮인 벽을 지나, 칼과 방패를 들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조각상

들이 그들을 사열하며 길게 놓여 있었다.

소년은 그 조각상들의 가슴과 방패에 그려진 투란바코스의 십자들을

보며, 지금 온 복도를 압도하는 추위보다 더한 추위를 느꼈다.

서글픈 눈으로 망연히 문을 바라보던 아버지와, 마르고 초라한 아버

지를 짓누르고 묶어 버리고는 개처럼 끌고 가 버린 그들의 가슴과

어깨에 박힌 십자가.

왜 이곳으로 끌려오는 걸까.

이제 열 네 살이었지만, 온갖 눈치를 다 보아 오며 살아온 소년답게

침울한 상상부터 떠 올리기 시작했다. 높은 분들이 낮은 것들을 부를

때는, 언제나 그가 꽤나 괘씸하다 판단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

고-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 원초적으로.

그저께 식민지에 사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한다는 군의 적성검

사를 받았다. 우글우글 모인 지저분한 소년들을 향해 제복의 남자

들이 1급, 2급, 하며 무성의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유릭의 이름이 불렸을 때 그는 유릭을 한번 흘끔 보더니 내일

다시 오라고 전했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쏠려왔다. 두런두런 거리기

시작했으나,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 나 혼자만 그리 된 걸까.

그를 데리고 가는 흰 로브의 여자를 얌전히 따르고는 있었지만, 머릿

속은 그렇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왜, 왜, 왜-

떠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에드먼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할 일이나 한가로이 고민하며 살았던 그들이건만,

일순간에 토굴 감방에 끌려가 처박혀 버렸다. 사육되는 벌레처럼

살아가야 했다. 게으른 죽음만이 그들의 희망일 뿐이었다.

-다 왔다. 들어가라.

흰 로브의 여자가 그리 성의없이 말하고는 검은 돌로 만든 듯한 문을

가리켰다.

유릭은 문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묵직해 보이는 문이 유릭이 손을

가져가자마자 고개를 숙이듯이 열렸다. 여자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은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돌로 만들어 진 테이블이 펼쳐져 있

었고, 그 양 옆에는 여자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녀들이 앉아 있었다.

나이들은 모두 지긋해 보였으며, 그 눈은 너무도 먼 곳에 놓여

있기에 유릭으로서는 그들의 생각을 감 잡을 수조차 없었다. 두텁고

높은 벽에 둘러싸인 듯 답답하고 두렵기만 하다.

유릭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문 바로 옆에 검은 장교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옅은 금발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덩치는 곰 마냥 크고, 제복에 꽉 조여

진 팔과 허벅지는 나무둥치처럼 두툼하다.

그들 중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로, 후리후리하고 깡마른 사내였다.

그는 유릭 앞으로 와 그 이마에 손을 얹고는 무어라 읊었다. 순간에,

이마가 화끈해진다.

유릭은 눈을 콱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맞군. 특무부로 넘기겠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장교복의 남자가 유릭의 어깨를 잡았다. 모든 것

이 너무나 순식간에 끝난 듯한 기분이 들며, 여태까지의 긴장이 우

습게 느껴졌다.

-가자.

유릭이 물었다. 뭐죠, 이게? 전......

-내 이름은 칼 뷰겐트. 파난 특무부 소속 대위. 그리고 이제부터 너의 상

관이자 보호자가 될 것이다, 유릭 크로반.

그가 말했다.

-.....항마전쟁, 이것이 무엇인지는 너도 알 것이다. 그람노스에 의해

벌어졌던 대 살육의 전쟁. 문제는 쌍방 모두에게 그러했다는 것이고,

아쉽게도 그람노스는 그 살육의 끝을 다 보지 못했다. 평생을 와스

테 윌린과 팔콘의 뒤를 이어, 붉은 종족들의 멸망에 바쳤던 그는

유감스럽게도 위대한 살육자이자 헛된 파괴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

러나 그의 의지 하나는 이 제국에 분명하게 각인되었지. 와스테 윌

린이 성궤로 봉인한 흑마법사들의 힘, 그것이 다시는 이 제국에 나

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물론 세상과 함께 태어나 존재하는 것들

을 박멸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아둔한 발상이라는 데는 동의

한다. 그러나 제국은 흑마법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그것만

은 분명하지. 제국은 교황청보다 더욱 히스테릭하게 흑마법을 혐오

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 바리암도, 브라키니아도, 북부 전선의 잔당들도 흑

마법을 쓴다. 그람노스의 뒤를 이은 엘문티에르 여제는 마령과 교감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것이 바

로 특무부의 전신인 녹슨 십자가의 기사들. 그들은 오로지 흑마법

사들을 전쟁터에서 상대하기 위해서만 키워지며, 오로지 이 땅의

흑마법을 몰아내고 마령들을 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후 특무부

는 거대해지고, 복잡해지고,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지며, 일반 마법

을 배운 자들이나 성령의 마법을 쓰는 자들도 같은 일을 맡게 되었

다. 그러나 진정한 녹슨 십자가를 짊어진 자들, 마령을 읽고 부리며

소멸시킬 수 있는 자들, 그런 사람들은 제국 정부에 의해 직접 골

라내어지게 된다. 바로 나처럼, 또한 이제 곧 네가 만나게 될 사람들

처럼, 또한 너처럼.

성스러운 제국을 위해, 녹슨 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 제국이 두려

워하는 그림자들과 맡서는 것이 바로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며,

의무이며, 숙명인 동시에, 네 업보이다.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건 거부할 수 없다. 네가 인간이듯, 이것 역시 네가 그리 태어난

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네 의지에 따라 그만

둘 수는 있다. 의무복무 기간을 다 채우면 네게는 선택권이 주어

질 것이다. 하지만 한번 이런 힘에 눈을 뜬 자는 다시는 보통사람

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감옥 너머, 너덜너덜한 죄수복을 입고 우울한 미

소를 띤 채 유릭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군인이 되어선 안 된다.......유리. 그들은 너를 타락시킬 거야.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머리는 깨어질 듯 하고, 속은 울렁울렁 거

리고, 가슴은 답답하다. 밖에서 누군가가 우악스레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싸움이라도 난 듯 치고 박는 퍽퍽 소리에 꽥꽥 고함지르

는 소리에 뭐가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릭은 눈을 떠

보려 했지만,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서 그냥 더 푹 자고만 싶었다.

그러나 주변이 너무 환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조차 고역으로 느껴

진다. 어디 어두운 곳으로 기어가거나, 뭐....

유릭은 얼굴을 덮을 것이 없나 주변을 더듬었다. 천 조각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유릭은 그것을 당겼지만, 못에라도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야, 이게..... 유릭은 다른 것을 찾으려고 이번에는

왼쪽을 더듬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등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유릭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데, 순간 옷 속으로 거친 손이

쑥 들어왔다. 유릭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저분한 천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먼지 낀 햇살을 쏟아내는 지저분

한 창문에(깨어져 있었고, 깨진 틈을 종이로 붙여 놓았다)그 창턱

까지 가득 가득 쌓인 책 무더기에 아찔해졌다. 어질어질하니, 금방

이라도 그 아래에 깔려 버릴 것만 같다.

유릭은 슬쩍 옆을 보았다. 누워 있는 곳 주변에도 산더미 같은 책들

이 쌓여 있었다. 얇고 두껍고 낡고 새롭고, 적어도 수천 권은 됨직한

책들이 바닥을 채우고 천장을 뚫을 듯 쌓여 있다.

“이게 어디지...”

유릭은 일어나려다가 그 깨어질 듯한 두통에 다시 엎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방금 전에 셔츠 속으로 들어왔던 손이 그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

눈만 크게 뜨고 있는데, 이제 등에 볼을 비벼왔다. 술 냄새가 뒤에서

확확 풍겨왔다. 며칠 씻지도 않고 뒹군 듯 끔찍한 냄새가 주변에

자욱하다. 유릭은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상대는 유릭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묘한 신음을 흘렸다.

“으흠-- 로이...”

“!!!!!”

분명 남자 목소리다. 유릭은 더 참고 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소름

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싸하게 끼치는데, 정말 끔찍했다. 유릭은

돌아누워 그의 머리를 밀어 젖히려 했지만, 몸을 뒤틀자 이번에는

목덜미에 코를 묻고는 부비작거렸다. 아기 고양이라면 보드랍고,

아리따운 소녀라면 황홀하고, 성숙한 여인이라면 황송할 테지만, 이

남자는 두꺼비의 뜨끈한 애무를 받는 마냥 끔찍할 뿐이다.

“아잉, 로이- 앙탈은. 어딜 도망가?”

“......”

유릭은 그의 이마를 가만히 밀었다. 칼 뷰겐트 정도의 힘만 있다면

그대로 바수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순간, 바람소리가 휘잉 들

리더니 깨어질 듯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깡, 깡, 까아아아앙--!

“억!”

“큿!”

머리가 박살나고 귀청이 찢어지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당장에 뒤에

있는 남자가 뜨헉, 비명을 지르고는 귀를 막았다. 유릭도 신음을

흘리며 귀를 막아야 했다. 머리 바로 위에서 양철 냄비를 뚜드려 대

고 있었다.

“일어나, 이 술주정뱅이들! 어서!”

그리고 유릭의 허벅지를 걷어차고, 뒤에 있는 남자의 엉덩이를 걷어

찼다. 유릭이 신음을 삼키고, 뒤의 남자도 비명을 질렀다. 둘 다 그

렇게 몸을 비틀어 대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로 국자가 날아왔다.

“윽!”

“깩!”

벼락이 치고 별이 보인다.

“왜, 이불피고 산 넘고 물 건너 돌아올 수 없는 선까지 넘어가도록

놔 줄 걸 그랬나?!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집 밖에서 하라고!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이쁜 녀석들도 아니니까.”

여자 목소리다. 그것도 소녀 목소리. 낭만파 칼 뷰겐트 소령이라면

여인의 꽃 같은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으니, 이 어찌 하리요. 어쩌고

하며 주변 사람 소름끼치게 했을 것이다. 다시 국자 날아오는 바

람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눈을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났다. 옆의 남자

도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자 마자 둘 다 고개를 휙 돌렸다.

엉망진창으로 어깨까지 기른 금빛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을 가진 청년

이었다.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은 듯 턱에는 모래알 같은 수염이

비죽 비죽 불규칙하게 나 있고, 무시무시하게 지저분했으며, 옷은

참으로 남루했다. 빛바랜 회색 상의에, 무릎이 반들거리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지저분한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릭을 보더

니, 어라? 하며 유릭과 앞의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누구야?”

“어머나, 방금 전에 뜨뜻하게 주물럭거리고는, 눈 뜬 다음에 이게 누

구야하고 모른 척 하면 난처하지. 남자가 책임 질 일을 했으면 책

임을 져야 하는 거 아냐, 이 술 주정뱅이야!”

그리고 소녀는 그의 머리를 국자로 후려쳤다.

퍽, 컥, 딱, 억-!

“또 술 처먹고 왔어, 또! 그럴 돈 있으면 이번 달 방세나 모아! 너 때

문에 몇 달이 밀렸는지 알기나 해? 아주 그냥 내 등을 쳐 먹으려고 작정

했냐, 작정을! 학생이라고 봐 주니까 끝도 없이 게으름이나 피우고!

밤낮 술이나 처먹고!”

딱, 퍽, 캑.

유릭은 서둘러 옷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특무부로 온 듯한, 즉 등골 서늘하게 비정상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데 남자가 유릭의 벨트를 덜컥 잡았다.

“그런데 이 자식은 대체 누구야! 누군데 내 방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유릭은 드디어 상의를 찾아 움켜잡고는 나가겠다 말하기 위해 뒤를 돌아

보았다.

“길 가다 주운 술주정뱅이.”

로웨나가 양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

작가잡설: 특무부의 정체는............. 녹십자.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