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37화 (37/174)

제35편

꼭대기 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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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처음 만난 남자를, 왜 네가 데리고 온 거야?”

“내가 데리고 오고 싶어서 데리고 왔어? 사람은 자빠져 있고, 모르는

사람은 아니고, 그런데 집은 모르고. 알릴만한 사람도 없고. 그러니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데리고 왔지.”

당장에 청년이 컥컥댔다.

“그런데 왜 내 방인 거냐!”

“그럼 내 방에서 재우리?”

“거실에서 재우면 되잖아!”

“처박아 놓은 다음에 널 발견했단 말이야. 다시 끌고 나가는 것도 귀

찮아서 그냥 처박아 뒀어.”

“그게 말이 되냐!”

둘이 악악대며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보며 유릭은 찢어진 셔츠를 꿰

맸다. 그리 있으니 대강 상황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릭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니-아니, 마셔서는 안 된다, 에 가깝다

- 그 두 잔에 핑 가 버렸고, 유릭을 떠맡게 된 로웨나는 트레비스

에게 말할 상황이 아니라서(유릭의 정체는 트레비스의 친구의 조카,

정도로 대강 설명되었다. 유릭은 언제쯤 자신의 신분이 정착될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그러

나 이 로웨나는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동거인

은 지금 앞에서 아직 자기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 놈팡이가

누구냐고 바락 바락 호통 치는 지저분한 금발 남자였다.

유릭은 아파트를 둘러보며 심한 압박을 느꼈다. 방 두개에 좁은 거실

과 부엌이 딸린 낡은 아파트였다. 남자의 방과 그 문 주변에는 사

방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책이 쌓여 있었고, 그 무더기가 끝날 즈음

에 선을 그어 놓은 듯 빈 공간이 아주 약간 있고, 그 앞에는 또 책

과 악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악보들이 있는 쪽에도 문이

있었는데, 그 문 너머로 낡은 피아노 한대와 침대, 그리고 역시나

수북한 책들이 보였다.

유릭은 찢어진 셔츠를 다 꿰맨 후에 소매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의

(대체 어떻게 끌고 왔는지 궁금해진다)를 꿰매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자니, 오늘 아침에 카밀턴이 대체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지 상

상하게 되어 울적해 진다. 아마도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잠

들었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구두도 제대로 못 찾아 온 방을 휘

젓고 있을 것이다. 옷이라도 제대로 챙겨 입을지. 아니, 그러기도

전에 침대에서 기어 나오다가 튀어나온 못(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지

만, 카밀턴은 잘 찾아서 걸리는)에 걸려 넘어질 가능성도 높다.

그 모든 생각을, 유릭은 새벽 공기마냥 싸늘하고 조용한 표정으로 하

며 두 남녀를 관찰했다.

이제 둘은 픽 토라져, 로웨나는 창밖을 노려보고 있고 남자는 씩씩대

며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부는 아닌 것 같고(설마), 남매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남자가 씻으면 좀 닮아 보일 지도 모르겠다).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만.”

“말 놔.”

“이분한테는 올려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유릭은 남자를 가리켜 보였다.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난 이제 스무 살이라고! 나한테도 말 놔. 누굴 아저씨 취급하고 그

래!”

참으로 쓸데없는 데 경쟁심을 느끼는 것을 보니, 연인도 절대 아니

다.

“성함이?”

“미하일 카프첸코.”

“유릭 크로반.”

“카스톨 제국 대학 문학부 2학년. 휴학 중”

“백수.”

“.....”

로웨나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유릭의 조용한(아니, 싸늘한)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소매를 다 꿰매자, 유릭은 상의를 입었다.

“과정은 생각 안 나지만 어쨌건 재워줘서 고맙다. 이만 가 볼게.”

“어이, 아침이나 먹고 가지.”

유릭은 처참한 부엌을 바라보았다. 쌓여 있는 접시에는 한달 쯤 전부

터 화석이 되어 붙어 있었을 듯한 음식조각이, 찻잔에는 착실하게

축척된 차 찌꺼기가 지층마냥 눌어붙어 있었다. 화덕위에 놓인 냄비

는 차마 열어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개수대 뒤에서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긴 더듬이를 휘두르며 스물 스물 기어 나온다. 로웨나가

일어나더니 그것을 ‘잡아’ 창 밖으로 가져갔다.

“이번 주 식사 당번은 로이니까, 먹고 가. 어차피 내가 하는 것도 아

닌데, 뭐.”

미하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유릭은 로웨나가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는 것을 보고, 완전히 결정을 내렸다.

“.......간다.”

그런데 갑자기 로웨나가 눈을 부라렸다.

“어이, 크로반. 하룻밤 신세 졌으면 밥값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냥 내

뺄 생각이었어?”

그러며 로웨나가 당장 먹을 것 내 놓으라는 듯 식탁 옆의 의자에 앉

았다. 유릭은 저 손은 언제 씻을까 생각하며 부엌을 보았다. 먹을

만한 것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먹을 것을 담을 접시도 없고, 먹을

것을 요리할 냄비는 더더욱 없다. 유릭은 식민전쟁의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참담한 부엌을 가리켜 보였다.

“저걸로?”

“씻으면 되잖아. 조기, 조거 일주일 밖에 안 된 거니까 그냥 써도 될

거야.”

유릭은 다시 로웨나의 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끼어들

었다.

“일 주일은 아깝잖아. 또 써도 되는데. 저거 쓰면 안 될까. 지지난 주

에 먹던 거잖아.”

“지난달일걸. 저기다가 먹은 기억이 있는데. 워낙에 화려해서 말이

야.”

“......”

미하일이 바닥에서 바퀴벌레 시체가 시먼 담뱃재와 함께 눌어붙은 접

시를 하나 집어 올렸다.

“그럼 이거 쓸까? 언제 썼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건.”

“미하일, 그건 네가 재떨이로 썼던 거잖아.”

.........파난에서도 이러고는 안 산다.

유릭은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

들을 위해 식탁을 차려 주었다.

유일한 야채인 시든 브로콜리를 삶고, 양파(아주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를 까고, 냉동고에 든 고기(갈색이었다)를 대강 녹여 양념(

통에 눌어붙은 것을 떼어내느라 힘들었다)을 넣고, 국수(서랍 바닥

에 흩어진 것을 다 주워 3인분을 만드느라 좀 애먹었다)를 삶아

같이 볶아 내었다. 그것이 모두 익는 동안에, 팔만 휘두르면 걸리

는 접시들도 모두 모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그 동안에 바

퀴벌레 시체를 스물다섯 개 정도 찾아내기도 했다(그중 절반이 푹

썩어 있었다).

손님인 유릭이 노동을 하는 동안 집주인인 미하일은 자고 로웨나는

악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식사 준비가 끝나자, 부르지 않아도 그

둘은 발딱 일어나 달려왔다.

“빠르다, 유리! 혹시 여기 얹혀 살 생각 없어? 응? 어차피 미키는 거

의 매일 집 비우니까, 그 방에 살면 되겠네.”

“책에 압사 당할 것 같던데.”

“걱정 마. 미하일 군의 책은 책이자 가구거든. 적당히 같은 높이로 만

들어서, 그 위에 매트릭스 깔고 이불 덮으면 편하게 잘 수 있을

거야.”

“로이! 남자하고 같이 산다는 게 말이 되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

고.”

“방세 낼 때까지 넌 이 집에 대한 의사를 표시할 아무 권리도 없으니

까 당장 입 닥쳐. 어때, 유리? 생각 있어?”

“나는 동거인이 있어.”

동거인이 아니라 거의 모시고 사는 주인님 수준이긴 하지만.

유릭은 아침에 일어나서 ‘유리 구우운.... 내 안경 어디 갔나? 어라 내

파이프는? 여기, 빗살무늬가 들어가고 마카노 산이라는 표시가 되

어있는 그 놈 말이야. 어디 갔지, 이게? 여기다 놨나?’ 하다가 어디엔

가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부딪히고 미끄러지는 카밀턴을 생각하며,

그보다 몇 배는 더 심각하게 무감각하며 뻔뻔한 이 남녀가 접시

의 국수를 몰아치듯 먹어 치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로웨나라면 몰라도, 미하일은 밤 새 술을 퍼마셨을 텐데 속 좋게 먹

고 있다. 그렇게 다 먹어 치우고 미하일의 접시에 포크를 들이미는

로웨나를 보니, 유릭은 로웨나의 마른 팔과 허리가 참으로 신기하

게 느껴졌으며, 어젯밤에 호호 웃으며 상큼 발랄하게 ‘중년 남자들’

틈을 누비고 다니던 모습도 생각나 가증스럽기까지 했다(그리고 생

각해 보니 식사하기 전에 손 안 씻었다). 네 거나 먹어, 내 거 다 먹

었어, 등등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결국 두 접시는 삽시간에 거덜 났다.

“후아, 잘 먹었다. 그런데 유리, 너 어디로 갈 거야? 트레비스 씨 댁

으로 데려다 줄까?”

“나만이 아니지.”

그러며 유릭은 로웨나를 가리켰다. 그제야 전날의 일이 생각난 로웨

나가 눈을 콱 부라렸다.

“하룻밤 동안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리고 내가 여기 산다는 건, 아무

도 몰라.”

“야, 어제 무슨 일 있었는데?”

미하일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눈이 번득 번득거리는 것을 보

니, 아주 수상쩍은 상상을 하는 듯 하다. 로웨나가 웃으며 말했다.

“스토커가 생겼지 뭐야. 어젯밤 오페라 극장에 찾아왔는데, 이 애가

할일도 없고 해서 나를 지켜주기로 했거든. 완전히 기사님이지.”

무슨 레이디가 기사의 발등을 콱콱 내리찍고 술 먹이고 하여 의식불

명으로 만드나.

유릭은 잠시 멍해졌다.

미하일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아아아아? 에닌이라면 몰라도, 너한테 스토커가 생긴다는 게 말

이 되냐아아아?”

“잘났다. 그래, 시골에서 진흙탕 뒹굴며 지저분 너저분 뒹구는 계집애

에 비해 레이스 리본 치렁치렁 감고 비누냄새 향수 냄새 풀풀 풍기

면서 상냥한 말 건네는 아씨가 훨씬 더 근사해 보였던 건 나도 이

해하는데, 나도 가수라고. 생기지 말라는 법 있어?”

“그 스토커 취향이 참 매니아스럽구나. 찾아오면 소개 좀 해 줘라. 연

구 대상이네.”

놔두면 이 유치한 다툼이 하염없이 길어질 것 같아 유릭이 끼어들었

다.

“가자, 로웨나. 위험하든 안 하든, 어쨌건 가야 해.”

“나, 안 위험하다니까.”

“위험한 것과 상관없는 이유야.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위험해 져서

는 안 되는 거고.”

“싫어.”

“너를 위해서야.”

미하일은 대체 어떤 스토커인지 궁금해 하며 턱을 긁적거리기 시작했

다. 로웨나는 여전히 고집스레 그 큰 눈을 부라리며 유릭을 보고

있다. 유릭은 그런 로웨나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그 허리를 덥석

잡았다.

“어라?”

그리고 그대로 달랑 들어 들쳐 맸다.

“으아악!!!! 너, 너 뭐 하는 거야! 어서 놔, 어서!! 미키, 너는 안 도

와주고 뭐해! 어서! 으학, 이 나쁜 자식 당장 놔! 놓으라고!! 끼악!”

미하일이 놀라 유릭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유릭의 손이 휙하니 움

직였고, 미하일은 그대로 캑하고 쓰러졌다. 로웨나가 놀라 고개를

빼며 외쳤다.

“뭐 한 거야!”

“기절.”

“끼악, 이 불한당, 치한, 스토커!”

“골칫덩이, 왈패, 망나니.”

“으익!”

“당장 가자.”

“젠자앙! 알았으니, 옷 갈아입고 올게! 세수도 안한 꼴로 어떻게 나

가! 그러니 당장 놔! 안 도망간다고! 여긴 꼭대기라, 현관문 빼고는

도망칠 구석도 없단 말야! 으악, 어지러워! 어서 놔!”

유릭은 로웨나를 놓아 주었다. 로웨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유릭

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대강 성공했다 안심한 것도 잠시, 유릭은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 가

량 아주 후회를 했는데, 그것은 여자가 ‘옷 갈아입고 오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몰랐던 것으로 인한 불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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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가 로이에게 당한 건............

아마도 본인도 그렇게 당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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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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