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편
꼭대기 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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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갔는데?”
“사십분 전.”
“아직 멀었구만.”
“......”
유릭은 인상을 살짝 구긴 채 소파(방금 전 그 틈에서 바퀴벌레 한 마
리가 기어 나와 힘차게 비상했다)에 앉아 있었다.
깨어난 미하일은 하품을 길게 하고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로웨나의
‘옷 갈아입고 오는 시간’은 미하일이 깨고도 남을 정도로 오래 걸
리고 있었다. 하도 나오지 않아서 혹시 도망 간 것은 아닌지 문을
열었다가 로웨나가 집어 던진 책을 간신히 피한 것이 벌써 20분
전이다(‘어머나, 빗나갔네. 나는 좀 더 아래쪽을 겨냥 했는데 말이야.’
하고 말해서, 유릭은 그 후로는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미하일, 로웨나와는 어떤 사이지?”
“소꿉친구. 아주 어렸을 때......... 아, 그러니까 로이의 부모님들이 이
혼한 뒤에 로이가 내가 살던 시골로 내려 왔거든. 로이의 외삼촌이
우리 동네 선생님이었으니까.”
유릭은 주변을 굴러다니는 시집 한권을 집어 들었다. 앞표지를 들춰
보니, 작년에 출판된 것이었다. 칼 뷰겐트에게 한번 보였다가는 ‘시가
아닌, 현대적이고 천박한 정서를 얄팍한 상술과 선정적인 단어로
치장한 주저리’라고 평했을 것이다. 펼쳐 보니 브라킨 어로 되어
있었다. 미하일이 자신의 이마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래 뵈도 내가 동네에서는 소문난 수재였거든. 선생님 댁 드나들다
가 저 로이랑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뭐... 그러다가 친구가 된 거지.
그 이상은 아냐.”
유릭은 시집에서 눈길을 들어 히죽 웃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마른
턱에 지저분한 턱수염의 얼굴이 그리 웃으니, 어딘지 파난 섬의 유
형자들이 생각난다. 미하일이 위협하듯 잔뜩 심술궂게 말했다.
“너, 곱게 자라서 이런 지저분한 곳에는 처음이지? 이해해, 이해해.
놀라고 당황하고 어색하고 불쾌 할 테지.”
“설마.”
“응?”
“곱게 자란 사람이, 너희들 식사를 차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 낭패로군. 몽상과 상상이 논리와 현실을 대신하고 있으니 말
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붕 아래에서 잔적도 그다지 많지 않아.”
그제야 미하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했다. 그가 굉장히 억울하
다는 듯이 창 밖을 노려 보는 동안, 유릭은 시집을 덮고는 다른 책을
찾기 시작했다. 소파 발치에 ‘식민 개발의 역사’ 라는 책이 굴러
다니고 있었다.
식민지에 이런 책이 굴러 다녔다가는 당장에 안보부에 얽혀 들어간
다. 흑마법서를 보아도 그보다는 부드럽게 체포되어 애정 어린 고
문을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 심문을 맡은 적이 있는데
특무부답게 매우 독특하게 심문을 끝낸 기억이 난다. ‘알아낼
것 전혀 없음. 혐의 없음.’라고 보고서를 썼다가 두들겨 맞기는 했
지만 말이다(유릭 역시 잡혀 갈 뻔 했는데, 특무부 전원이 증인으
로 출석하는 것으로 단번에 해결 보았다.... 칼 뷰겐트만 나타나도 ‘
당장에 데려가십셔!’ 할 텐데, 뭐 하러 전원이 왔는지 모를 일이다.)
미하일이 배를 긁으며 물었다.
“그런데 너 대체 어디 출신이냐? 생긴 게 참 희얀한데.”
“브란 카스톨.”
“에?”
유릭은 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브란 카스톨 출신이라고.”
“어라, 그럼 아버지가 이민자냐?”
“팔콘의 개척시기에 우리 조상님이 따라 왔으니 이민자는 이민자군.”
미하일이 어버버버 거리는 동안 유릭은 책을 펼쳐 보았다. 역시나 브
라킨이다. 아니, 대부분의 이런 사상서들은 브라키니아 어로 적힌다.
그래서 집요하기로 유명하며 무식하기로도 유명하며 억지 부리는
것으로는 더더욱 유명한 안보부에는 높은 급료를 주며 브라키니아
인을 데리고 있다. 그저 ‘번역’용으로 말이다. 유릭이 책을 흔들며 말했다.
“이런 거 가지고 있어도 되나?”
“5년 전에 산거야. 돌비체 수상이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금서는커
녕 대학 교양서였다고.”
드디어 로웨나가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유릭은 그대로 책을 떨어뜨
렸다. 늘 보던 모습인 듯 미하일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었다.
“어이, 가자.”
로웨나는, 말 그대로 ‘둔갑’을 한 상태였다. 낡은 바지에 슬리퍼 질질
끌고 때 낀 셔츠 한 장 달랑 걸친 채 눈곱 달고 하품이나 하던 소
녀가, 지금은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녹색 원피스에, 머리카락은
예쁘게 늘어뜨려 녹색 리본으로 묶고 있고, 방금 전에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잡아대던 손에는 곱고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주 옅게
화장을 했을 뿐인데, 새로 갈아 끼운 듯 고왔다. 놀라운 재주다.
유릭은 어제 무대에서의 그녀를 떠 올렸다. 그 때는 아주 진하게 분
장을 하고 있어서, 지금과는 영 딴판이었다. 파티장에서도, 조명과
어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찌하여 이 미하일과 로웨나가 같이 살면서도 아무 사이도 아닌 지
짐작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매일 매일 둔갑을 거듭하는 소녀와
함께 살다 보면, 절대 여자로 안 보일 것이다.(여우나 너구리 비슷
하게는 보일지언정)
“방금 전 까지는 가자가자 보채더니, 뭐야. 어서 가자.”
로웨나는 모자를 쓰고는 리본을 묶었다.
미하일의 마중을 받으며(다시는 오지 마! 라고 외쳤던 것 같다), 유
릭은 로웨나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도시의 하류층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골목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
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낡은 건물에 눌린 하늘은 길보다 더 좁아
보인다. 그 위로 빨래들이 걸려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있었으며,
간혹 그 위에서 오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로웨나는 용케도 그 오
물에 맞지 않으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로웨나가 말했다.
“미하일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트레비스 씨한테 엉뚱한 이
야기 하지 마. 트레비스는 다른 건 몰라도 가수들 사생활은 정말
엄격하게 단속하거든. 게다가 미키는 좋아하는 사람도 따로 있으니
까 이상한 소문나면 나부터 족칠거야. 귀찮으니까 어디 가서 딴 소
리 하지 말아라.”
“에닌인가 보군.”
“어머나, 어떻게 알았어?”
유릭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릇 조각을 피했다.
“그냥 감으로.”
“나중에 한번 물어 봐라. 고학생의 구구 절절 애절한 짝사랑 이야기
를 듣게 될 테니. 내가 맨날 빈정대서, 나한테는 말 안 해.”
그 말과 동시에 유릭과 로웨나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넓은
길이 펼쳐지고, 광장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햇살에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 물에는 붉은 물고기들이 싱싱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소년 소녀들이 수로에서 장난치고 있었다. 소년
하나가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물속의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로웨나가 지나가자, 소년이 손을 흔들었다.
“로이 누나! 안녕하세요!”
“어머, 세드릭. 안녕?”
로웨나는 소년에게 큰누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 주고는 유
릭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 진짜 정체가 뭐야? 카밀턴 경의 부하?”
“비슷해.”
“으흠, 나중에 느긋하게 추리해 봐야겠네.”
로웨나는 치마를 살짝 걷고는 수로의 난간 위를 걷기 시작했다. 긴
치마를 입고,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는데다가 우산까지 휘두르며 참
잘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 너 어제 내 공연 봤지? 어땠어? 트레비스 씨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하거나 하지 않았어?”
굉장한 광경을 본 주제에 정작 매우 중요하다고 물어 보는 것은 난처
할 정도다. 배짱이 두둑한 건지 그냥 무관심한 것뿐인지. 유릭은
전날에 카밀턴과 트레비스가 나눈 말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지만 트
레비스가 이 로웨나에게 직접 칭찬하는 것을 삼가는 것 같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유릭이 고개를 젖자, 로웨나는 실망했다.
“그래, 어차피 나는 대역이나 하는 애니까. 대역 맡은 것도 운이 좋아
서 그런 것뿐이고. 그래, 그런데 너 어제 보니까 아주 잘 쏘던 걸.
거의 날아다니더라.”
“군인이니까.”
로웨나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유릭을 보았다.
“그렇게 어린데 군인이야?”
“열네 살 때부터 군인이었어.”
로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파난에서 왔구나.”
“응?”
“그 어린 나이에 지원병일 리는 없고, 징집제를 시행하는 지역은 파
난 식민지뿐이거든. 또, 너 같은 아이라도 전쟁터로 끌고 간다면
파난 식민지 전선뿐이잖아.”
바람에 흩어지는 로웨나의 머리카락을 보며, 유릭은 이 소녀가 그냥
가수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로웨나는 걷기만 했고, 유릭은 간혹 로웨나를 살피며 묵묵히 따랐
을 뿐이다. 다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아이는
몇 마디 말만 듣고도 상황을 모두 파악해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눈치 빠른 여자아이는 언제나 조심하라고 크리스 펠로가 충고했었다.
그렇게 걷다가, 둘은 드디어 트레비스의 저택에 도착했다. 어제는 밤
에 도착한데다가 저택이 눈에 들어올 상황도 아니었던 유릭이었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로웨나는 난간에서 뛰어 내려 유릭을 끌고 저택의 현관으로 향했다.
로웨나와 유릭을 알아본 문지기가 둘을 들여보내 주었다. 어제 파
티가 벌어졌던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택은 깔끔했다.
북적대던 사람들이 말끔히 사라진 상태라, 넓은 정원과 훤칠한 저
택의 모습도 잘 볼 수 있었고.........저 멀리서 달려오다가 넘어지는
카밀턴의 모습도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프리델라에게 연락해야겠군. 당장에 바꿔달라고 말이야!”
전날의, 유릭이 저지른 특무부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난처한 실수를 듣게 되자 카밀턴은 푸르르 한숨을 내 쉬고는 그리
말했다(그리고 넘어져 부딪힌 무릎을 간혹 문지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열일곱 살짜리 꼬맹이한테 그렇게 어이없이 당
해서 그 꼴이 되었단 말인가. 아하, 어쨌건 임무하나를 이루긴 이
루었으니 봐주어야 하겠군.”
유릭이 저도 이제 열여덟인데요, 어쩌고 해 봐야 소용없다.
“죄송합니다.”
“여기는 식민지가 아니란 말이네. 식민지처럼 위험이 나 위험해, 하고
써 붙이고 나타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사소한
위험들이 산재한 지, 알기는 하나.”
“죄송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열 일곱 살 밖에 안 된 여자애라지만 그렇게 물렁하
게 해서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유릭은 세 번째로 사과를 하며, 저 멀리 분수대 옆에서 유유자적 돌
아다니는 로웨나를 살폈다. 범인인 그녀는 호숫가 황새마냥 평화로
운데, 정작 피해자인 유릭은 이렇게 매 앞의 참새마냥 혼나고 있으
니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아하, 죽지는 않았지. 하지만 이 저택에서, 그것도 트레비스 옆에서,
암살 위협을 받는 몸이 자그마치 반나절 동안 ‘혼자’ 있었단 말이네.”
“이봐, 내 저택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 줄 알.....”
트레비스가 끼어들었지만 카밀턴은 지팡이로 그의 종아리를 퍽 쳤다.
트레비스가 신음을 삼켰다. 유릭은 다시 로웨나를 살폈다. 연못 옆을
거닐며 뭐라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노래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겨우 잡아 왔는데 저렇게 놔두어도 되는 겁니까?”
“화제 돌리지 말게나. 지금 중요한 건, 자네의 실수지 그린 양이 아니
라고.”
그러나 이 상황에서 로웨나가 포르르 도망가 버린다면, 그 실수를 저
지른 이유조차 실패로 돌아가는 셈이니 참으로 억울할 노릇이었다.
이제 로웨나는 벤치에 앉아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릭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자니 정문 쪽에서 검은 말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는 것이 보인다. 어깨에 번쩍 번쩍 술이 달린 것으로 보아
평범한 장교는 아닌 듯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카
밀턴이 지팡이로 유릭의 발 옆을 쿡 찔렀다.
“크로반 하사, 딴청 피우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그렇게 사소한 실수
가, 자네의 신용을 얼마나 깎아 먹었는지 아나. 자네는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임무 수행 중이었고, 그 임무는 나를 지키는 거였단
말이네!”
이제 그 장교는 문지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지기가 펄쩍 뛰기라도 하는 듯 놀라더니 저택을 향해 달려왔다. 카
밀턴이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쳐서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딴청 피우지 말라고 했네, 하사.”
유릭은 저기, 굉장히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요, 어쩌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택의 집사가 응접실문을 떼어버릴 듯 쳐들어 왔다.
“트, 트레비스 님! 카밀턴 각하! 크, 큰일났습니다!”
그 순간에, 유릭은 로웨나가 고개를 돌려 저택 쪽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또 도망치려고 저러나, 하고 생각하는데 집사가 울부짖듯이 외쳤다.
“안보 위원회에서 왔답니다, 안보 위원회에서요!”
드디어 로웨나는 유릭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돌아섰다. 유릭은 이마를 짚
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너는 한번 된통 혼나야 정신 차리겠구나.
뒤에서는 여전히 집사가 울부짖고 있었다. 트레비스가 급히 물었다.
“누구를 찾아온 건가.”
“카밀턴 각하를 찾아왔답니다. 여기 계시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는
지.....맙소사, 또 그 사문회인지 뭔지 몹쓸 것을 만들어서는 카밀턴 각
하를 끌고 가는 것 아닙니까.”
카밀턴이 한숨을 내 쉬며 이마를 짚었다.
유릭은 전날에 만난 그 렌든인지 뭔지 하는 남자를 떠 올렸다. 그는 카밀
턴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늘 쾌활한 트레비스마저 창백해져
있는데, 방금 전에 보았던 그 붉은 제복의 장교가 집사의 안내도 없이
나타났다.
카밀턴은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장교의 계급장이 소
위라 유릭은 일어났다. 사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소위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강등 두 번 거듭 당하고 지금은 하사인 상태이니. 장교는 카밀턴
을 보자마자 경례를 올려붙였다.
꽤 젊어 보이는 남자로, 구불거리는 밀빛 머리카락에 구리빛 피부를 가지
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암이라든가, 남쪽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서’ 그리된 피부색인 듯 했다. 턱이 널찍해서 어딘지 아주
우직한 인상을 주었다. (즉 말기 안 먹히게 생겼다.)
카밀턴이 징글맞다는 듯 말했다.
“또 자넨가, 라콘 소위.”
“늘 이런 일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각하.”
“소환장 가지고 왔나? 있으면 내 놔.”
라콘 소위라 불린 남자는 당장에 품 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어 카밀턴
에게 주었다.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공손한 태도였다. 카밀턴은
편지를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고는 찢었다. 너무 거칠게 찢어, 안에 있는
소환장마저도 같이 찢겨 나가버리고 말았다.
“젠장. 쪼아댈 이유 추가로군.”
카밀턴은 찢어진 소환장을 펼쳐 맞붙였다. 두어줄 적혀 있는 소환사유를
읽자, 그는 정말 씹어 삼키고 싶다는 듯이 소환장을 노려보고는 테이블
위로 던져 버렸다. 유릭이 그것을 집어 카밀턴이 내 던진 봉투에 넣었다.
“소환 사유가, 정당치 못한 꾀, 병으로 직무유기를 하고 있어서라고?”
“저는 내용을 모릅니다. 그저 사문회가 열리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 드
리는 것만이 제 임무의 전부입니다.”
“빌어먹을, 그런데 지금 당장 오라니! 안보 위원회에는 헨리 카밀턴 전
용 사문위원회가 늘, 항시, 준비되어 있나? 내가 렌든을 만난 것은 어제
라고.”
“사문회는 며칠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카밀턴 각하께서
어디 계시는지 몰라 연락을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주, 내 귀국날짜 맞추어서 붙들어 가려고 단단히 준비했군.”
“바로 지금 저와 같이 가시면 됩니다, 각하.”
“뭐?”
유릭도 놀라고, 트레비스는 파랗게 질렸다. 그의 턱이 분노로 경련을 일
으키고 있었다.
“아니, 지금 헨리가 내란죄라도 저질렀나. 통보하자마자 당장에 오라니,
이게 말이 되?”
“그건 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렌든 각하께서 그리 전하셨습니다.”
카밀턴은 이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가면, 그 잘난 사문회는 대체 언제 끝나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
“지난번처럼 내가 이끌던 서부 군단이 깡그리 죽어 나갈 때까지 지하실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건가.”
“모릅니다.”
카밀턴의 눈에 벼락이라도 친 듯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라콘 소위를 노려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릭이 말했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자네는 안 와도 돼.”
“경을 지키는 것은 제 임무입니다. 따라 가야지요.”
그런데 라콘 소위가 나섰다.
“렌든 각하께서, 만약에 수행원이 따라 오겠다 하면 절대 같이 오지 못
하게 하라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직속상관의 명령입니다.”
유릭의 말에 라콘 소위가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본국이고, 식민지에서 듣고 온 명령이 무엇이던 본국의 명령이
우선하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프리델라 각하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이곳
에서는 렌든 각하와 내 명령이 더 우선한다.”
“군단장 이상의 모든 장군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수행원과 호위와 함
께 청문회와 사문회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다고......아마도 ‘본국’
군법서에서 읽은 듯 합니다만.”
“이건 비상사태다.”
유릭이 카밀턴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밀턴은 사문회에서 온 소환장을 건
네주었고, 라콘이 눈을 부라리던 말든 그것을 꺼내어 읽었다.
“여기 적힌 ‘확인되지 않은 사유로 인한 병고로 인한 직무유기로 인
한......대체 누가 썼습니까? 어쨌건, 그런 이유로 인한 직무유기라고
되어 있는데.... 각하의 부상이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사태인 건가요?”
라콘 소위의 입술 끝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호위와 수행원을 둘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 지도 구
분할 수 없는 정보뿐이시란 말씀이고, 이렇다면 저는 각하와 함께 위원
회로 가겠습니다. 확실치 않으니, 확실해 질 때까지는 각하 옆에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요.”
트레비스의 눈이 기특해 미치겠다는 듯 반짝였다. 그러나 카밀턴은 한숨
을 내 쉬었는데, 그것은 이 라콘 소위가 이렇게 말이 길어질 경우 어찌
하는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콘 소위는 이를 뿌득 물고는 앞
으로 성큼 나섰다.
“식민 징집병 졸병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대드는 거냐.”
“그래도 황제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군인입니다. 그리고 제 계급은 졸
병이 아니라 하사입니다.”
그리 말하는 유릭의 무관심한 눈빛은 시건방져 보이기에 충분했다. 웃
고는 있었지만, 그 눈빛 때문에 상대는 오히려 더 불쾌해 진다. 때론
미소가 최악의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법이고, 유릭은 눈빛과 더
불어 최악의 효과를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완전
히 비웃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비렁뱅이 식민지 놈이 무슨--!”
“전.....”
“천한 것은 입 닥치고 있어! 그 턱부터 부수어 버리기 전에 말이다.
카밀턴 각하, 각하는 당장 따라 오십시오!”
옆에서 카밀턴이 말했다.
“어이, 패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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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도움 안되는 레이디 장군님.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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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