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편
꼭대기 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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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한 라콘 소위가 하녀의 부채질과 하인의 얼음마사지를 받는 동
안, 카밀턴은 여유 있게 채비를 했다. 그는 우선 유릭에게 호텔의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모두 금고에 들어 있으니까, 자네가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돈은 책상 서랍에 있고, 모자란다면 여기 이 카드를
쓰게.”
유릭은 카밀턴이 건네주는 카드를 받았다. 테두리가 금색으로 둘러
쳐져있고, 특별회원이라는 멋들어진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정말 제가 안 가도 되는 겁니까?”
“안보 위원회 지하실은 지나치게 안전하네. 걱정 안 해도 돼. 낭패라
면, 차라리 안전하지 않은 바깥에 지내고 싶어진다는 거랄까.”
그리고 한숨을 내 쉬었다. 얼굴을 보니, 10년은 폭삭 늙은 듯 했다.
“그리고 달리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로웨나 양이나 잘 지켜주게. 트레비스야, 워낙에 유명인사이다 보니
괜찮아. 저리 나사 빠진 것처럼 촐랑 촐랑 굴어대도, 사실 꽤 쓸만한
친구라네.”
“어느 정도 뒤에 나오시는 겁니까?”
“그야, 뭐....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달도 걸릴 거야.”
“그렇게 오래요?”
“지난번에는 석 달이 예정되어 있었어. 서부전선이 작살나지 않았다
면 분명 그리 되었을 테지.”
“그런데 이번엔 대체 왜 끌고 가는 겁니까?”
“뭐긴 뭐야. 어제 렌든이 말한 대로 ‘본 때를 보여주는 거지’. 너무 까
불면 재미없다, 라는 메시지이기도 하고. 나도 그리 설치면 언젠가는
재미없어질 거다, 하고 응수하곤 하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빠
른 시일 내로 그리 되기를, 프리델라가 돌아오기를 기도할 때 같이
기도한다네. 하지만 성당을 바꿔야겠어. 보다시피 효험이 하나도 없잖아.”
“경께서 이렇게 경우 없이 불려 나가는 것을 본다면, 보여줄 필요도
없을 듯 한데요.”
“안보 위원회 지하실로 들어가면, 레반투스 대공은커녕 황제도 뭐라
할 수 없네. 그람노스 이후로 그렇게 정해져 있어. 그런데 낭패스
러운 건, 전통적으로 사제들이 맡는 그놈의 개애애애애 같은 안보
위원회를 니콜라스 추기경 자식이 장악했다는 거지.... 어쨌건 나는
다녀오겠네.”
저 멀리서 라콘 소위가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밀
턴은 유릭의 어깨를 쳐주었다.
“수고해 주게. 그리고.... 행여나 하는 말인데, 쥴리안이 자네더러 숙
부의 누명을 벗기겠네 어쩌고 하며 찾아오거든 싹 무시해. 알겠지?
그런 꼬맹이들은 언제나, 자기가 아는 걸 자기만 아는 줄 아는 게
문제니까.”
“주의하겠습니다.”
그 때 라콘 소위가 문을 벌컥 열며 쳐들어왔다.
“야, 너--!”
그렇게 그가 달아오른 얼굴로 유릭에게 빽 윽박지르려는 찰나, 카밀
턴이 그 옆을 지나갔다. 그런데 소위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카밀턴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오라며. 안 가나, 소위?”
결국 라콘 소위는 이를 북 갈아붙이고는 카밀턴의 뒤를 따랐다. 그가
한방 갈기고 갈 줄 알았던 유릭은 꽤 놀랐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그 때는 전쟁터였던 지라 더 심했
다), 당시에 라콘 소위는 카밀턴의 부하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뒤에, 그를 중점적으로 두들겨 팬 카밀턴의 부관과 끝까지 싸우느
라 카밀턴이 부대를 떠날 때 바로 따르지 않았다. 카밀턴은 사문회
에서 그 직무유기를 아주 ‘소상히’ 보고 했고(겨우 10분 지체했다는
말은 뺐다, 당연히), 라콘 소위는 두 달간 감봉처분을 받았다. 그
리고 당연하게도 유릭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카밀턴이 저택을 나서자 트레비스는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
내며 으르렁댔다.
“빌어먹을, 대체 언제까지 저 개--자식들이 물어뜯는 대로 뜯겨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젠장! 10년도 더 되었다고 10년도 더! 어제
마음껏 수다 떨라고 몰아넣어 줬더니, 밤새 저 궁리만 한 건가!! 제길,
젠장! 괜히 모아 놨어-!”
유릭은 카밀턴이 건네주고 간 열쇠와 카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
러자 트레비스가 말했다.
“머물 곳 없으면 여기서 지내. 식민지 출신이니, 여기 아는 사람도 없
을 것 아닌가. 어쨌건 카밀턴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 줄
수 있어.”
트레비스의 제안은 고마운 것이었지만, 유릭은 웃으며 거절했다. 카밀턴
이 벌써 로웨나를 잘 지키라 명령했으니, 이렇게 되면 머물 곳은 정해지
는 셈이다.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루게나 까지 한번 왕복할 수 있는 마차만
빌려 주시면 됩니다. 다녀 오는 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특히나 저 개---자
식들 엿 먹일 일이 있으면 꼭 부르고! 무엇이든 환영하지!”
트레비스는 한껏 으르렁거리고는, 창밖을 향해 힘껏 가운데 손가락은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릭은 정말 카밀턴과 트레비스가 닮았
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비슷하게 ‘유치하다’.
유릭이 루게나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였다.
노랗게 저물어 가는 햇살에 젖어, 그들이 외출한 후로 정지해 있는
그 방은 어딘지 오래된 사진처럼 보였다. 유릭은 상의를 벗어 던지
고는, 그의 짐이 있는 방으로 갔다. 호텔이라지만 특실중의 특실이
라 방이 두개나 있었다.
그곳에도 노란 햇살이 가득했다. 시트위로도, 그저께 아침까지 보던
책들 위로도, 가토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 위에도.
유릭은 책들을 챙겨, 침대 밑에 놓아둔 빈 가방에 넣었다.
옷들도 챙기고, 필기구도 챙기고, 마지막으로 가토에게 쓴 편지를 집
어 들었다. 보내는 것만 남은, 이미 주소까지 다 쓴 편지였다.
잠시 쉴 생각으로 유릭은 가방 구석에 놓아둔 담배갑을 찾았다. 카밀
턴도 없으니 피워도 상관은 없겠지.
그런데 막 한 개비 물었을 때 유릭은 어깨와 등을 휙 쓸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
유릭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헤어져 가는 하루의 낡은 햇
살만이 흐느적거리고 있을 뿐. 그러나 유릭은 방구석에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나가는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을 발견한 듯 했다. 붉은 것
이 반짝인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문 앞
에서 방안을 흘끔 흘끔 들여다보며 유릭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서늘함은 이제 목덜미를 훑고 있었으며, 심장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
다. 유릭은 담배를 던져 버리고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변의 침묵이
그를 압박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숨이 점점, 아주 느릿느릿 가빠
져왔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조용하던 숨소리가 크고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유릭은 주머니를 뒤졌다. 손바닥에 손가락 길이만한 병이 잡
혔다. 그는 차가운 유리병을 꺼내어, 그 안에 든 알약 하나를 꺼내
어 입에 털어 넣었다.
다시 세상은 적막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못 박혀 고정된
듯- 표본이 되어 코르크 마개에 꽂힌 나비마냥,
약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답답했던 숨이 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어서 가야겠다. 어서 떠나야 한다. ‘혼자’ 오래 있으면 좋지 않아.
유릭은 가방을 닫고 방을 나섰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그 검은 것
이 어디론가 휙 사라진 듯도 했다. 유릭은 카밀턴의 방으로 가, 서
랍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카밀턴이 말한 모든 것을 찾은
뒤에 닫았다. 그런데 문득, 열쇠가 있는 첫 번째 서랍이 신경 쓰였
다. 유릭은 이제 열쇠 꾸러미 중 가장 작은 것을 그 서랍의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서랍 속에서 유릭은 카밀턴이 늘 쓰고
있던 수첩을 발견했다. 왜 금고에 넣지 않았을까. 유릭을 내보내고
쓸 만큼 비밀스레 쓰던 것인데, 어째서 이것은 금고에 넣지 않은 걸까.
그리 큰 비밀은 아닌 걸까.
유릭은 수첩을 열어보았다. 카밀턴이 알면 호되게 혼날 테지만, 그래
도 그는 열어보았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안에서
빛바랜 사진 몇 장이 후두둑 떨어졌다. 유릭은 사진을 제대로 보지
도 못하고 쓸어 담아 모두 수첩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막 그 고
리를 채우려는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심스러웠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마령의 숨소리마저도 짚
어 낼 수 있는 예각은, 인간의 것은 너무도 쉽게 짚어낼 수 있으니.
유릭은 수첩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슬쩍 거실 쪽을 보았을 때,
그곳에 망토를 걸친 남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얼굴도 가리고 있
었고, 손도 장갑에 끼워져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실체
가 있는, 진짜 ‘사람’이다.
유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단검도 총도 모두 품안에 그대로 간
직한 채, 슬그머니 현관 쪽으로 갔다.
검은 옷의 남자는 아직 거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금고가 있는
곳, 액자가 걸린 벽을 망설임도 없이 성큼 성큼 가서는 액자를 걷어
치웠다. 금고의 문이 있었다. 남자가 손을 대는 순간에, 금고의
문에서 빛이 번쩍이며 입이 벌어지듯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가 주먹으로 벽을 쾅 치고는
돌아서려 했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유
릭은 현관문을 열고 도망쳤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릭은 총을 뽑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남자의 컴컴한 얼굴이 보이는 순간에 그 이
마에 총구를 댔다.
“누구냐.”
남자의 얼굴은 컴컴했다. 가면을 뒤집어 쓴 듯이 ‘새카맣다’. 그러나
유릭은 그가 ‘극장의 그 남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보
이지 않는 것은 상관없다. 유릭에게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순간 귀 언저리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오싹한 손길 같은 것이 다가오
는 느낌이 든다. 유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애처럼 서툴군.”
그리고 그 순간에, 차가운 기운이 목을 휘감았다. 유릭은 남자를 걷
어찼다.
“컥!”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이는 순간에 유릭은 문을 닫았다. 역
시나 찬 기운이 조금 약해진다. 유릭은 팔을 휘둘러, 총을 쥔 손을
허리 쪽으로 찔러 넣었다. 물컹하고 찬 느낌이 팔을 휘감아 단단하
게 조인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캉-!
양철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섬광
이, 유릭을 감싼 검은 안개를 뚫고 반대쪽 벽에 부닥쳤다. 그리고
검은 안개의 중앙에, 거울 같은 원이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유릭은 팔을 밀어 넣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껍질 두꺼운 빈
통을 걷어찼을 때 같은 소리였다. 굉음에, 복도가 울렸다. 원이 산
산이 부서졌다. 검은 안개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용돌이쳤다.
유릭은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사방이 무언가를
찾은 듯 어질러져 있었다. 유릭은 혹시나 해서 카밀턴의 방으로 달
려갔다. 온 방이 뒤집어져 있었고, 방금 전에 유릭이 수첩과 돈을 꺼
낸 그 서랍은 모두 뽑혀져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었던 몇 가지 서류와 책들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유릭은 땀을 훔치고는 방을 나섰다. 더 방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그
러나 막 문지방을 건너는 순간에 유릭은 문 옆에 숨어있던 무엇과
마주쳤다.
붉은 눈, 심장이 떨군 핏방울처럼 붉은 두개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은빛의 칼날이 번쩍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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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정말 왜 이리 연재가 느린 것 같지요? 왜 이럴까, 대체 왜!!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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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11장 초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