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편
초대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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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베따의 클럽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로웨나는 일당으로 지
급되는 아르바이트비로 빵과 과일 약간, 석간신문 등을 사서 아파
트로 돌아왔다.
로웨나가 하는 일은 리자베따의 우렁찬 노래에 맞추어 피아노를 치거
나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코러스를 넣어 주는 일로, 딱 한달만 하
기로 했는데 벌써 1년째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니, 빚을 갚기 위해 모으는 적금을 뺄 수는 없
는 노릇이라 남는 월급을 모조리 병원으로 부치게 되었다. 그러니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별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운이 좋아 생각보다 좋은 주인을 만났고, 그 덕택에 간혹 식당에
서 남는 음식도 가지고 올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최근에 로웨나가
비록 대역인 데다가 조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독창을 할 수 있는
역을 맡게 되자 축하파티까지 조촐하게 해 주었다.
그날 미하일과 리자베따는 ‘사나이다운’ 노래를 부르며 거하게 취했
고, 로웨나도 알딸딸한 행복감에 젖어 퍼지게 마셨다. 드디어 공연
벽보가 카스톨의 벽에 붙여질 때, 로웨나는 그들에게 입장권까지
사서 나누어 주었다.
“그 이상한 녀석만 안 나타났으면.”
그래서 몇 번 되지도 않는 공연 모조리 취소하고 얌전히 보호받는 게
생명 보존에 좋다는 유릭인지 항아리인지 하는 녀석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1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역을 맡았는데, 그곳
도 그 동안 고생하던 그녀를 도와주고 돌봐주던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바보 같다는 건 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별로 중요
하게 보이지도 않아 보일 테니. 그러나 가끔은 눈앞의 위험보다 더욱
소중하고 귀중한 일들도 있는 법이다. 스스로가 정하는 가치는 다
른 사람의 상식과는 전혀 상관없기도 하다.
그러나 로웨나는 유릭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자기 일 열
심히 하려는 녀석을 너무 괴롭힌 거 아닌가.
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단 1분도 조용할 날 없는 슬랍
가는 지치지도 않고 구석구석에서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싸
우는 것이 애정의 확인인 양 매일 매일 들리는 부부 싸움 소리에, 밤
잠 없는 애들 뒤엉켜 싸우는 소리에, 세상 구경한 지 얼마 안 되는
애가 세상이 왜 이 꼴이냐고 항의하듯 우는 소리에, 주정뱅이가 병
깨는 소리에, 주정뱅이 끼리 건달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에.
세계종말의 날 직후가 되지 한 이곳은 조용해지지 않을 것이다.
7층에 오자 로웨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문 앞으로 다가가는데 누군가의 허벅지가 걸렸다.
“응?”
집 잘못 찾아온 주정뱅이인가, 하며 로웨나는 그 다리를 슬쩍 피했
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막 피하려는데 이번에는 가
방이 채였다. 묵직했다. 술 퍼마시려 나왔으면서 가방은 왜 들고
나왔담? 그리 생각하며 로웨나가 문에 열쇠를 꽂는데, 이상한 생각
이 들었다.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여어, 늦게 오네.”
로웨나는 비명을 질러 버릴 뻔 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
며 복도가 환해졌다. 로웨나는 기겁을 했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던 바로 그 소년, 유릭 크로반이
복도에 느긋하게 앉아 로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막대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그 끝에 달린 자그만
유리구슬 같은 것에서 빛이 환하게 쏟아지며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거 뭐야?”
“아, 손전등. 밤에 나가야 할 일이 많으니까......늘 가지고 다니지.”
“사감 몰래 야한 책 볼 때 쓰면 딱 좋겠다. 그런데 너 뭐야? 나 잡으
러 왔나? 아닌데. 어라, 이 가방은 뭐냐? 집 나왔니?”
“여기에 집 없어.”
“그럼 뭐야. 호텔에서 쫓겨 난 거야?”
그제야 로웨나는 유릭의 반대편 어깨가 이상할 정도로 처진 것을 발
견했다. 얼굴도 창백했고, 목덜미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로웨나는
혹시나 싶어 바닥을 보았다. 그의 왼손은 피에 젖어 있었다. 유릭이
피에 젖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상한 놈들이 찾아왔어.”
로웨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설마 너 쫓아 온 거야? 여기에 이상한 놈들 따라 와 있는 건 아
니지?”
“쫓아 온 게 아니라 쫓아 낸 거지.”
그리고 유릭은 일어났다.
“여기는 왜 온 거야?”
“카밀턴 경의 명령 받고 왔다. 너 간수 잘 하라고.”
유릭은 로웨나가 꽂아 넣은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놀란
로웨나가 악악거리던 버벅거리든 상관치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도로 지저분해 지는 구나.”
유릭이 들어오자마자 그리 말했다. 로웨나는 미하일이 다시 난장판으
로 만들어 놓은 복도와 거실을 보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뭐, 늘
이러고 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유릭이 상의를 벗었고, 그 셔츠
의 절반이 피에 젖어 있었다. 로웨나는 당장에 기겁했다.
“으악, 너! 무지 다쳤잖아.”
“칼에 맞았으니까. 하지만 별로 안 다쳤어.”
그리고 유릭은 셔츠를 벗었다. 남자 웃통 벗은 것은 물론이요 홀딱
벗은 것도 미하일 덕에 심심찮게 봐 왔던 로웨나 인지라, 미하일
보다 삼십 배는 잘 빠졌다 생각했을 뿐이다(그 녀석은 젊은 주제에
벌써 배가 나왔다). 유릭이 물었다.
“씻을 수 있을까.”
“목욕하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해. 간단하게 씻는 건 부엌을 이용하면
되지만 말이야.”
유릭은 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때 낀, 걸레인지 수건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천 조각 하나를 찾아냈을 뿐이다. 다행히, 로웨나가 방으로
들어가 깨끗한(아니 ‘새’) 수건을 가지고 왔다.
“오다가 강도라도 당했니? 한심하다. 군인이라면서 칼이나 맞고.”
“피할 수 없게 만든 녀석이 있었어. 칼이 바로 어깨 근처에 왔을 때
간신히 알아챘지....하지만 스치기는 했어.”
그러나 스쳤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할 정도로 유릭의 상처는 깊어 보였
다. 유릭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우선 그 안에서 회색 병을
꺼내어 그 안에 든 가루를 상처 위에 뿌렸다.
“안 꿰매도 되는 거니?”
“이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유릭의 몸을 보니, 여기 저기 흉터가 있었다.
유릭은 붕대를 꺼내어 상처를 감싸기 시작했다. 대신 해 줄까, 하고
말하려 했지만 유릭이 워낙에 솜씨가 좋아서 관두기로 했다. 상처
처치가 끝나자, 그제야 유릭은 나른히 한숨을 내 쉬며 의자에 기댔다.
피 묻은 셔츠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릭은 셔츠를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미하일은 없나 보네.”
“뭐 이상한 서클에 간다고 하면서 저녁 먹고 나갔어. 하여간 대학생
들이란 것들은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놀러 다니고 술만 퍼 마신다니까.
그 시간에 어디 가정교사나 하며 돈이나 벌어올 일이지. 그런데
배 안고파?”
“네가 해 주게?”
로웨나는 사과를 꺼내 휙 집어던졌다. 유릭은 그대로 이마에 맞았다.
받으라고 던진 것인데 머리에 박아 버렸으니, 로웨나는 기가 막혔다.
“그렇게 덜떨어져서 어떻게 군인하고 다니냐? 계급 뭐야?”
“하사.”
“정말 쓸만한 인간이 없었나 보다. 너처럼 칠칠맞은 녀석을 하사까지
나 진급시켜 주게.”
유릭은 아픔을 참으며 사과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로웨나가 물었다.
“언제 꺼질 거야?”
“당분간 여기 있어야 해. 명령 받았으니까.”
“누구한테? 헨리 카밀턴 장군한테?”
로웨나는 사과를 꺼내어 대충 옷에 문질러 닦고는 와득 베어 물었다.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웨나가 당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칠칠맞은 너한테 경호 받을 생각 없어!”
“하지만 지금 나는 잘 곳도 없는 걸.”
“돈은?”
“별로 없어.”
“친척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마그레노 시에 살아.”
답이 갈수록 암울해지자 로웨나는 푸르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럼 얹혀살겠다는 거 아냐! 공짜로! 나는 그런 거 절대 용납 못해!
아니, 집주인인 그 할망구가 셋이서 산다는 것을 안다면 당장에 방
세를 올릴 거라고. 너, 돈도 없다며.”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면 어떨까.”
“응?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너.”
“생활환경을 개선시켜주고. 그 개선을 유지시켜 주고. 급료는 안 받겠
다는 말이야.”
“즉?”
“식사, 세탁, 바느질, 청소, 모두 해 주지. 미하일이고 너고, 어지를
시간은 있어도 치울 시간은 없지. 그걸 대신 해 주겠다는 거야. 여기
사는 대신에.”
로웨나는 순간 그러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며 혹했다. 그러나 이 자
식을 집안에 들여 놓는 엄청난 짓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지금 무슨 생각인 거냐.
로웨나는 대신 턱을 들고는 새침하게 말했다.
“집세를 안 내면 절대 안 돼. 그런 노동력 제공 안 받아도, 나하고 미
하일은 여기서 1년이나 잘 살았단 말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집세가 얼만데?”
“20카스티야. 너는 적어도 10카스티야는 내야 해.”
사실 15카스티야다. 게다가 방도 없이 쪼그려 지내야 할 게 뻔한데,
10카스티야는 확실히 심했다. 유릭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지만, 결국
고개를 젓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상의와 가방을 챙겼다.
“알았어,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하지만 너를 지켜봐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건 명령 받은 거고, 나는 군인이니까.”
“아, 그, 그래. 잘 가. 그리고 내 옆에서 다른 사람이 눈에 뜨이게 얼
쩡대는 건 정말 질색이야. 싫다고.”
옹골찼던 방금 전과는 달리, 지금 로웨나의 목소리에는 별 힘이 없었
다.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돌아섰고, 그대로 쿵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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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졸도라니! 유리, 이런 아가씨스러운 수법을! 이런 건 카밀
턴이 써야 한다고!
....그리고 눈물나게 투철한 정신자세! 부상당한 와중에도 가방만은
철저하게 챙긴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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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