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41화 (41/174)

제39편

초대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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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로 씻어내듯 화창한 날이었다. 단원들이 연습실에서 아직도 전날

에 나온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저께 에닌 주연의 아가테이아 부활

축일 기념 공연은 꽤 호평이었다. 주연이었던 에닌은 당연히 극

찬이었고(그녀의 아버지인 살비에 마델로의 입김이 태풍 급으로 작

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역할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자 역이자,

오랜 경력을 가진 데다 주역인 테너 프란츠야 두 말할 것도 없었

고, 조연인 로웨나에 대해서도 자그마치 ‘두 줄’이나 적혀 있었다.

로웨나는 어제 저녁에 이미 본 기사였지만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두 줄이었지만, ‘.....그리고 오늘

공연에 대역으로 출연하여 많은 사람의 우려를 불렀던 로웨나 그

린 양은 그럭저럭 괜찮은 신인이었다....’ 로웨나는 그 기사에 볼을

비비며 마냥 행복해 했다. 지면이 엄청나게 할애된 에닌에 비하면

초라했지만(게다가 칭찬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이제 막 시작인

로웨나에게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로웨나는 신문을 잘 접어

가방에 넣었다. 트레비스가 아픈 시벨리나 대신 로웨나를 넣으라 할

때나, 리허설 할 때는 정말 어떻게 될까 그리도 두근두근 했었는

데, 이렇게 작게나마 결실이 오니 마냥 행복하다.

“로이! 너도 신문 봤지?”

단원인 소녀들이 로웨나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전날에는 모두 연습이

없었기에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로웨나가 신문을 흔들며 외쳤다.

“내 이름 나왔어! 봤지?”

“물론이야! 축하해.”

“리리아의 이름도 나왔지.”

“수잔나도 나왔고.”

에닌 찬가에 밀려나 각자 두 줄 한줄 반줄 밖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인인 셋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좀 심한 거 아니니. 아무리 에닌이 주연인 데다가, 인기도 엄

청나게 좋다지만, 로이도 꽤 비중 있는 역이었잖아. 네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동기 중에서 너만큼 잘 하는 애도 없잖아. 그런

데 그렇게 퉁명스러운 두 줄 뿐이라니.”

리리아가 볼을 부풀렸다.

“보면 모르니. 에닌 네 집이 엄청나게 부자잖아. 분명 걔네 아빠가 돈

썼을 거야. 너무한다, 정말. 아무리 대역이었다지만, 너에 대해 궁

금하지도 않나봐. 그러게, 졸업식 때 진지어 빅틴 여사가 너한테

뭐라고 했었니. 돈을 좀 적게 주더라도 에닌과 같은 곳으로 건 피하

라고 했잖아. 특히 너는.”

사실 로웨나는 다른 오페라 단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에닌과 친하

기는 하지만, 그녀와 같은 극장의 오페라 단에 동기로 입단하는 것은

그녀와 졸업 성적이 비슷했던 로웨나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트레비스 씨가 다른 곳보다 자그마치 30카스티야나 더 준

다고 하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당시는 정말 한 푼이 아쉽다 못해

지나가다 동전 하나만 주워도 기도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리리아가 투덜댔다.

“걔는 자그마치 엠마누엘 누트 여사가 레슨을 해 준다잖아.”

“나도 들었어. 걔네 아버지가 엄청나게 돈을 주고 브라키니아에서 데

려 왔대. 완전히 개인 레슨 해 준다더라!”

“그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으면서 그 정도 선생한

테 배운 데다가 밤낮 아버지가 돈 쓰며 신문에 좋은 말만 줄줄 늘

어놓도록 하면, 놀면서도 그 정도 하겠다.”

두 친구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그리고 주변의 단원들 모두 귀를 번쩍

치켜들며 열렬한 동조를 보내는 것을 보며, 로웨나는 에효,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어렸을 때부터 에닌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풍족하고 편

안하고, 뭐든 주려는 사람 천지고. 그 아이는 가만히만 있어도 발

앞에 선물과 꽃이 쌓인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는 요양소에 있고, 아버지는 딴 여자하고 살고

있고, 전날에는 팔자에도 없는 간호(한 일이라고는 옆에서 졸아대는

것뿐이었지만)까지 하고 온 로웨나 자신은 뭔가. 로웨나는 힘이 주

욱 빠졌다. 자신을 동정하기 시작하면 끝장이라고, 다른 사람 원망

하고 환경 원망하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끝이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만 어깨에 얹힌 묵직한 빚과 가난을 확인하게 되면 피곤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그 녀석 잘 자고 있으려나.’

게다가 지금은 유릭 녀석까지 집에 얹히겠다고 하지 않는가. 병자라

서 내쫓지도 못하고 난감하게 됐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풀썩 쓰러지고, 멀쩡해 보이던데 짚어보니 펄펄

끓고 있었다. 의사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 데다가 덩치 큰

녀석 끌고 어디로 갈 수도 없어서, 마루에 눕히고 찬수건 이마에 얹

어 놓고 꾸벅 꾸벅 졸면서 간호해 주었다. 아침까지 녀석은 쿨쿨

자고 있었고, 이마를 짚어보니 열도 대강 내린 듯해서 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 않은 녀석이니, 뭐 사람 같지 않은 방식으로 낫겠지.....

한참 에닌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던 리리아와 수잔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로웨나는 대강 상황을 짐작했다. 에닌이 들어온 것이다. 문

앞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들리다가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연

습실이 싸늘해 질 정도로 조용해지자, 에닌은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대강 짐작한 듯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

는 듯 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르사메 여사가 부르십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오라고 하시네

요.”

아르사메 여사라면, 이번 공연의 연출자다. 에닌의 말이라면 무엇이

든 공격적으로 받는 수잔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네가 안 불러도 다 알아. 가자, 로이.”

그리고 로웨나를 잡아끌었다. 다른 단원들도 쌀쌀맞게 일어났고, 에

닌에게 찰싹 붙어 마르고 닳도록 아부 떠는 것으로 유명한 키키아가

또 달라붙어 한껏 상냥한 척 조잘대기 시작했다. 로웨나는 수잔나

가 리리아와 이야기 하는 틈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에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키키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긴, 쟤는 절대 걱정할 필요가 없지. 뭐든 좋게만 보니까. 로웨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르사메 여사의 레슨실에는 벌써 오케스트라 단원이자 가수들의 연

습을 도와주는 피아니스트가 와 있었다. 아르사메 여사, 잔뜩 틀어

올린 머리에 리본을 묵직하게 매달고 있는 이 여자는 턱을 쳐들며

모두에게 말했다.

“자, 모두. 어제 공연은 그래도 칭찬을 받았지만 우쭐하고 만족해서는

안 돼요. 특히나 어린 아가씨들, 어려서 조금만 칭찬해 줘도 자기가

세상 최고인 줄 알고 들 뜨는데, 벌써부터 그랬다가는 이른 나이

에 끝장나는 경우가 있으니 정신들 바짝 차리도록.”

그리고 에닌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에닌 양은 예외에요. 너무나 훌륭해요. 누트 여사가 인정한 천

재답다니깐요.”

수잔나와 리리아 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의 얼굴이 일시에 구겨졌

다. 수잔나와 리리아는 나이가 비슷하기라도 하지, 선배에 해당되는

이들은 자기를 제치고 인기와 일방적인 지원을 얻고 있는 어린

가수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대단했다.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주역이라

니, 심해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에닌의 아버지는 이 극장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운영

자이기도 했으며, 신문까지 장악하고 있다. 에닌이 활동하는 동안

그 누구도 주역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고, 지난달에 주역

에서 밀려난 여가수 하나는 다른 극장으로 적을 옮기기도 했다.

신문에서는 언제나 에닌 찬사뿐이고, 보러 오는 사람들도 에닌에 대

해 험담이라도 하면 교양 없는 사람으로 몰릴까봐 조심 조심이다. 처

음에는 그 아이가 잘 해서, 하고 생각하려 했던 단원들은 이제 질

투를 넘어 증오에 가깝게 에닌을 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잘

해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에닌 마델로 양에 비

하면 말이야~’ 따위를 듣는다면 화가 나게 된다.

“우선 로웨나 그린 양.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그렇게 힘주어 꽥꽥 질

러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에닌 양 같은 천재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노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을 놀래

킬 일 있나요? 편안하게 부르란 말이에요. 편안하게.”

“악역이 얌전하게 노래를 부르면 대체 누가 악역이라고 생각해요? 이

건 오페라지, 가곡 콘서트가 아니잖아요.”

“로웨나 그린 양, 이건 연극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우아하고 아름

다운 노래를 들으러 오는 거지, 천박하고 경박한 연극을 보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멜리잔드 피케 양 같은 그런 천박한 연출은 정말

경멸한답니다.”

로웨나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다른 단원들의 눈도 험악해졌다. 이

여자와 로웨나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는데,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둘

다 성격이 고약하고 고집도 세서이다. 로웨나가 쫓겨나지 않는

이유는, 트레비스가 로웨나를 은근히 아끼고 있고 다른 연출자들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단원들도 이 여자를 싫어하는

건 매 한가지였다. 다른 연출자중 하나인 점잖은 한스 크롬은 다른

단원들 모두를 기분 좋게 해 준다. 괴팍하지만 공평한 멜리잔드

피케 양 역시 마찬가지. 둘 다, 실력들도 굉장하고 트레비스와도 사이

가 좋으며, 단원들에게도 공평하다(한스 크롬은 공평하게 친절하고

멜리잔드는 공평하게 퉁명스럽다). 그리고 배역과 연출자의 손발

이 착착 맞는 공연은 언제나 최고였으며, 히트치는 공연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 탄생된다. 사실 이번 기념 공연에서 트레비스는 멜

리잔드 피케를 연출자로 두려 했지만, 운영자인 살비에 마델로가

나서 이 여자를 추천했다. 이유는 ‘내 딸이 나오는 공연은 귀족들이

보러 오는 수준 높은 공연이고, 그런 공연에는 아르사메 여사가 적

합하므로.’ 였다. 트레비스는 반대했지만 지분이 있는 살비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에는 아르사메 여사를 연출자

로 임명했고, 단원들은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이 여자를 감독으로

‘또' 맞이해야 했다.

“자, 모두 정신 차리고. 가장 형편없었던 것부터 불러 보도록 하겠어

요. 우선 로웨나 그린 양, 그린 양은 전체적으로 형편없었으니 모두

불러야 할 걸요. 하긴, 처음부터 역이 있었던 게 아니라 대역이

었으니 오죽할까. 맨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제일 길 테니까.”

이거, 너무 노골적이다. 로웨나는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며 연습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잔나가 가장 먼저 노래를 부르려는 데 누군가가 연습실 문을 두드

렸다. 대체 누가 들어오려나,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다. 그리고 제발

트레비스가 ‘아르사메 여사, 나 좀 봅시다.’ 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에 로웨나만이 놀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릭이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 얼굴도 멀끔하고 머리도 단정하고 복장마저 단정

한데다가, 어제 다쳤던 곳마저도 꼿꼿하다. 얼굴이야 처음부터 깔

끔했으니, 지금은 어느 외국에서 유학 온 부잣집 공자처럼 보일 정

도였다. 아르사메 여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관계자 분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어서 나가세요.”

“로웨나 그린 양과 할 말이 있습니다. 전할말만 하고 가지요.”

아르사메의 싸늘한 눈초리가 로웨나에게 꽂혔다. 로웨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너 집에 가서 보자 어쩌고 하며 중얼 거렸다.

“물론 안 돼요.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그리고 로웨나

그린 양, 나중에 충--분히 주의를 들어야겠군요. 어쩜 이렇게 경우

없는 일이 생길 수 있담. 이런 건 품위 있고 얌전한 에닌 양을

본받으란 말이에요, 에닌 양을!”

그런데 유릭이 품안을 뒤적거리더니 카드 두 장을 보였다. 아르사메

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나는 귀족들에게만, 그것도

백작이나 공작 급의 최고 귀족들에게만 발급하는 골드 카드였으며,

다른 하나는 트레비스가 친하거나 유력한 인사들에게 건네주는

특별 출입증이었다.

아르사메 여사의 눈초리가 유릭을 삭삭 훑었다. 유릭은 카밀턴 경에

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최고급 정장이었다.

단원들이 소곤대자, 여사의 귀가 그쪽으로 쫑긋 올라갔다.

‘전날에 트레비스 씨하고 카밀턴 경이랑 같이 온 그 애지?’

‘맞아. 로이를 불렀잖아.’

‘저 사람 카밀턴 경의 조카라고 들었는걸.’

‘아들 아니었어?’

‘미쳤냐, 너! 나이를 봐, 나이를! 조카가 맞다니까.’

헨리 카밀턴에게 여동생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몇 사람이나 알겠는

가. 그리고 역시나 여사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릭을 순식간에 카밀턴

경의 조카나 매우 가까운 친척으로 판단한 여사는, 당장에 입술이

치솟아 올랐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군요. 어차피 그린 양은 한--참 이나 뒤

에 연습을 하게 될 테니, 잠시 이야기해도 좋아요. 자, 어서 나갔다

와요, 그린 양. 그리고 나중에 주의를 듣는 건 잊지 마세요.”

로웨나는 냉큼 일어나 후닥닥 나갔다. 기다리던 유릭이 급히 따라 나

가야 할 정도였다.

“너, 너,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 와!”

“되잖아.”

유릭이 다시 출입증을 보여주었다. 로웨나의 눈썹이 치솟아 올랐다.

“너, 어떻게 그 출입증 가지고 있는 거야?”

“들어올 때 트레비스 씨가 줬어. 가지고 가야 만날 수 있을 거라면

서.”

“그런데 몸은 괜찮은 거야? 오늘 당장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돼?”

유릭이 웃었다.

“아니. 하지만 어쨌건 너하고 같이 있어야 하고, 트레비스 씨도 허락

해 주었으니....당분간은 같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내내 졸졸 따라 다니겠다? 스캔 날 일 있냐!”

“별 수 없지.”

“너, 상식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니면 멍청한 거니! 솔직히 말해

서 너......”

“선물.”

그리고 유릭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덥석 건네주었다. 로웨나는 얼결에

받아,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헉, 하고 신음을 삼켰다. 푸짐하게

점심을 때울 수 있는 햄 샌드위치에, 우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솜씨 없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식당에 가도 이것 보다 근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 그녀의 가방 안에 든 빵 한 덩이 보다

수 십 배는 근사하다.

“점심에 먹어.”

로웨나는 이 유릭이 혹시 취사반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

릭이 인사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나중에 갈 때 데리러 올게.”

“야, 난 허락한 적 없어!”

“선택의 여지없어. 나는 너를 지켜야 해. 카밀턴 경이 돌아올 때 까지.

안 된다면 너희 집 문 앞에서 매일 매일 쭈그려 앉아 자겠어. 그리 되면,

나는 상관없지만 너는 상관 많겠지?”

“왜 그렇게 고집 피우는 거야? 다른 할 일도 없니, 너는?”

“응.”

“.........”

로웨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궁리해 보니, 이 소년을 쫓아낼 뾰족한

방법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태까지 해 온 걸 생각해 본 다면 정말

저 말대로 할 거고, 그게 더 눈에 뜨인다. 그래, 뭐 어떻게 되겠지.

로웨나는 한숨을 크릉 내 쉬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집안일 모두 네가 해. 그리고 미하일은 자기 방 정리하는 거 무진장

싫어 하니까, 건드리지도 말고. 지저분하든 말든, 그 책에 깔려 죽을

것 같든 말든 내버려 둬. 내 방은, 내 방 악보랑 책을 시대별 작곡가

별로 정리할 생각 없으면 내 버려 둬. 그리고 저녁은 여섯시 반. 나

는 일곱 시에 일 하러 나가야 하니까 말이야. 미하일이 밤에 불쑥

불쑥 들어오는 건 신경 쓰지 마. 한 달이나 안 들어온 적도 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다른 지시는?”

‘지시’라는 말에 로웨나는 질렸다. 여기가 군 내무반인줄 아나!

“없어. 청소나 잘 해주고, 어제처럼 자빠지지만 않으면 돼. 이 점심

잘 먹을게. 고마워.”

그리고 로웨나는 바구니를 흔들고는 연습실로 돌아섰다.

로웨나가 연습실로 가자, 유릭은 일단 시간을 확인하고는 트레비스의

접견실로 향했다.

로웨나는 오늘 다섯시까지 연습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고, 일곱 시 경에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라고 전날 로웨나가 꾸벅 꾸벅 졸고 있을 때

그 수첩을 슬쩍 뒤져 다 알아냈다. 글씨가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한

달간의 예정을 알아내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파난의 밀림을

뚫고 임무를 수행했던 유릭이다. 열나는 중에 챙길 것 챙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간호한답시고 호들갑 떨어대는 로웨나를

보며, ‘내가 할게.’하고 나서고 싶은 것을 참고 그냥 누워 있느라

참으로 힘들었다)

“헤리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건가!!”

접견실에 오기 무섭게 트레비스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저한테 물어도 소용없는데요.”

“그럴 때는 그냥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울면서 말하면 되는 거야.”

“트레비스 씨, 저 역시 카밀턴 경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있으

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트레비스는 속마음에 칼이 꽂힌 듯한 표정이 되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

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저기, 크로반 군, 나하고 자네 말고, 헨리를 ‘아주’ 걱정하

는 사람이 여기로 왔다네.”

“설마 프리델라 각하께서 오신 겁니까?”

“그러면 나도 좋아. 안드로마케가 도망간 뒤로 때려 치운 신앙생활을 다시

할 용의까지 있다고.”

트레비스의 얼굴에 간절함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레타의

눈빛이 저러했을 거라 생각하며, 유릭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찾아온 거지요?”

“나--!”

유릭은 트레비스가 왜 유릭이 오자마자 헨리 언제 나와, 어쩌고 하며 그

리도 배고픈 양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

자면 유릭의 머릿속에도 순간에 ‘카밀턴 경, 대체 언제 나오실 겁니까!’

하는 울부짖음이 천둥치듯 우르릉 울리고 사라졌으니.

접견실 벽난로를 바라보는 소파에서, 세일러 칼라를 휘날리는 교복을 입

은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야, 오랜만이다, 유릭 크로반!”

“........”

카밀턴의 경고가 먹구름마냥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난감함과 무력함에

도망치고만 싶어진다. 트레비스가 이마를 짚으며 나른히 한숨을 내 쉬었

다. 유릭은 헨리 카밀턴의 여동생 되는 헨리에타 가스코 공작부인의 연락

처라도 알아 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떠 올리기 시작했다. 아니, 안되더

라도 카밀턴의 지팡이라도 빌려서 이 녀석의 엉덩이나 허벅지를 두들겨

주었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쥴리안 시저 반 가스코 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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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영화 ‘페이스’를 보고 온 동생의 평: ‘감독의 페이스를 뜯어

버리고 싶었어. -_-’

그나 저나 무책임한 보도와 그로 인한 오해로 인해 억울한 사람의 명예가

피해를 보는 군요.

불량만두'소' 납품 업체가 쓰레기 단무지로 만두소를 만들어 납품한 겁

니다. --; 만두 회사는 '받아서' 쓴 거고요.

아아.... 착찹하군요, 정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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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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