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편
쌍둥이 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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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고 자상하며 책임감 넘치는 손길 한번이면 ‘집’이라는 작고도
일상적인 공간은 너무도 쉽게(또는 기적적으로) 살만한 곳으로 변해
버린다.
로웨나는 일주일도 안 되어 그 사실을 너무나 절실하게 깨닫는 중이
었다. 그리고 이러다가 이 녀석에게 너무도 익숙해 져서, 나중에
유릭이 일이 끝나서 짐 싸들고 나갈 때에 아쉬워서 어쩌나 하는 생
각마저 들었다.
처음에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긴장했던 로웨나였지만, 유릭은
로웨나가 대역으로 나가는 공연 두 번이 모두 끝날 때까지 말없이
옆에 머물기만 할 뿐 특별히 눈에 뜨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르사
메 여사도 유릭이 트레비스와 함께 언제나 에메랄드 귀빈석에서 공
연을 보니(유릭은 감시하는 것뿐이었지만), 유릭이 근방 어디에서
얼쩡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사근사근 굴어댔다. 게다가 점
심 도시락도 싸주고 바래다주고 모셔오니, 사흘도 되지 않아 로웨나는
“유리야, 어서 가자~” 하고 말하게 되어 버렸다.
뿐만이 아니다. 매 끼 뜨끈한 식사 제공은 당연하다. 미하일은 입을
옷을 찾기 위해 빨래 더미를 뒤질 필요가 없어졌다. 로웨나 역시
지나가다 미하일의 축축한 속옷을 밟을 일이 없어졌다. 다 떨어진 옷
이 모조리 수선되어 멀쩡한 옷들이 된 것도 두말할 것 없다. 집 안
은 깨끗해졌고, 부엌의 그릇들도 잘 정리되어 찬장에 놓여졌다. 미
하일은 첫날에 당장에 쫓아내라고 소리 높여 으르렁대더니(물론 식사
를 마친 후에), 그 다음날부터는 오후 다섯 시에 즉각 돌아와서
저녁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로웨나가 같이 산 1년 동안 마주한 시간
보다 최근 이틀 동안 그와 마주한 시간이 더욱 길다고 투덜댈 정도
였다. 미하일 본인은 유릭과 로웨나 사이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몰라 감시한다고 우겼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어쨌
건 짐승동굴 비슷했던 집안이 단 하루 만에 사람 사는 곳이 된 건
사실이었으니.
“집안일이 요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책임감과 절박함이지. 닥치면
누구나 하게 되.”
로웨나가 감탄하며 묻자 유릭은 그리 답했다. 그렇게 셋이 같이 지내
기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나 드디어 금요일이 되었고, 로웨나와 유릭이
백작으로부터 초대받은 무도회 날이 되었다.
입으로는 유릭에게 로웨나를 향한 어떤 불건전한 생각도 용납 못한다
고 하고, 몸으로는 유릭이 해 주는 것들을 잘도 납죽 납죽 받아먹던
미하일은 ‘단 둘’이 파티에 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문 앞에 서
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비켜.”
“안, 돼.”
“꺼져.”
“절, 대, 안, 돼! 단 둘이 어딜 가? 파아아아티?”
“밤낮 너 같은 기집애는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투덜댄 주
제에, 갑자기 이게 무슨 꼴값이니?”
“꼴값이라니, 말은 좀 잘 하자! 그리고 절--대 안돼. 밤늦게 이 자
식이랑 단 둘이 올 거라는 말이잖아! 그것도 퇴폐적이고 음험하기로
이름 높은 란슬로 백작의 홀라그로 성에서! 그리고 돌아올 때도
단 둘이 돌아오고!!”
“자알~ 났다. 언제 네가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냐? 아르바이트 하고
돌아 올 때는 너는 이상한 놈이 달려들어도 네가 알아서 때려눕힐
거야 어쩌고 하며 마중 한번 나와 본 적도 없는 놈이. 솔직히 말해.
너, 저녁 먹여 줄 사람 없어서 이러는 거지?”
“내가 그딴 놈으로 보이냐. 어쨌건 안 돼. 절대 안돼. 나도 데리고 가
지 않는 한 둘만 보낼 수 없어.”
로웨나의 눈 꼬리가 당장에 치솟았다.
“어디서 오빠 아빠 행세야, 너?”
미하일이 문 앞에 찰싹 붙었다.
“로이, 남자는 다 늑대라고. 단 둘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남자인 법이고, 저렇게 ‘저는 남자와 여자의 몸 구조차이 같은 건
전혀 몰라요.’ 라는 듯한 얼굴의 샌님은 더더욱 믿어선 안 되는
법이야.”
“그럼 너처럼, ‘나는 아주 밝히는 늑대 놈이요.’ 라는 얼굴을 하고 있
는 놈은 믿어도 되고?”
“적어도 널 여자로 보고 있지는 않으니 안전한 놈인 건 사실이잖아.”
“아하, 그럼 지난번에 그 사건은 뭐지?”
미하일의 얼굴이 물 번지듯 단번에 시뻘개졌다.
“빌어먹을, 그 날은 취해 있었던 거야.”
“세상 모든 여자가 너 빼고 모두 남자가 되어도 너한테 손댈 일은 없
을 거라고 큰소리 친 게 누구더라? 그런데 어디를 주물럭거렸지?”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야. 내가 그런 놈인 거랑, 저놈이 그런
놈인 거랑은 다른 문제라고 본다. 어쨌건 단 둘이 나가는 거, 그것도
파티에 같이 가는 건 반대야.”
로웨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미하일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미하일도
앉은 자세 그대로 팔짱을 끼고 로웨나를 노려보았다. 로웨나는 후
우-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다면 별 수 없네. 좋아, 네가 이겼어. 네 말대로 할께.”
미하일이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내 말 들어서 나쁠 것 하나도.....크헙!”
로웨나는 미하일의 발등을 콱 밟고, 몸을 뒤트는 순간에 그의 사타구
니를 걷어찼다. 그리고 비통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이는 그의
뒤퉁수를 팔꿈치로 꽉 내리찍었다. 단 세 방에 미하일이 울부짖으며
풀썩 쓰러졌고, 로웨나는 그의 몸을 뛰어 넘어 현관문을 열었다.
“가자, 유리.”
“.....”
유릭은 신음을 삼키는 미하일을 보며 아무래도 이거 응급사태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웨나가 우산을 휘둘러 대는 것을 보니,
머뭇거리다가는 자신역시 그에 맞아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에 처
할 것 같아 미하일을 남겨 놓고 얼른 문을 닫았다.
“두, 둘다....끄흐...나중에 보....끄흐....특히 너 로이....크흐....!!”
비통한 신음 소리가 들렸지만 유릭은 무시했다. 유릭이 나오자마자
로웨나는 기다렸다는 듯 투덜댔다.
“무시해 버려. 하긴, 네가 신경 쓸 리도 없겠지만 말이야. 어렸을 때
는 밤낮 에닌 이야기만 하고, 지금도 틈만 나면 에닌 이야기만 하는
주제에, 내가 다른 남자 만나기만 하면 꼭 저러더라.”
“그래도 진지하던데.”
“오빠 같은 심보야. 자기는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괜찮은데, 자기랑
똑같은 남자가 여동생 옆에 붙어 있으면 모조리 도둑놈으로 보이는
거지. 여동생에게 절대 아무 짓도 안하는 건전한 남자는 오래비인
나 하나뿐이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랄까.”
“오래 같이 지냈나 보네?”
“시골에서 살 때 거의 매일 같이 지냈어. 여덟 살 때부터 열한 살 될
때까지 삼촌 학교에서 같이 다녔으니까...... 그런데 그 때의 나는
내가 봐도 원숭이 비슷할 정도로 못생겨서, 저 녀석은 여자 취급도
안했어.”
로웨나는 파우더 케이스를 꺼내어 미처 끝내지 못했던 화장을 마무리
했다.
“그러다가 에닌이 날 보러 시골에 왔었지. 잘 데가 없어서 별 수 없
이 동네 여관에 묵었는데, 그 때 여관집 아들이었던 저 바보가 에
니에게 홀딱 반해 버렸지 뭐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고학생의 눈
물나는 짝사랑이 시작된 거 아니겠니. 에닌 네 집이 워낙에 부자라
엄두도 못 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로웨나는 케이스를 닫아 손가방에 넣었다. 유릭은 그녀의 옷깃에 뭍
은 파우더 가루를 털어 주다가, 문득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평범하고 생각 없는 기척이 아닌, 의도
적으로 줄이고 있음에 분명한 그런 수상한 기척이.
유릭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
흰 옷을 입은 검은 얼굴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 있었다는 듯이.
석상에 박힌 유리 같은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유릭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
로웨나가 유릭의 옆으로 나섰다.
“어머나, 오터 씨. 여긴 웬일이세요?”
“데리러 왔지.”
낮게 깔리는, 조심스러운 발자국 같은 그런 목소리다. 그러나 유릭은
신경 끝에 얼음이 닿은 마냥 오싹했다. 정말 신경 쓰인다.
로웨나가 빈정댔다.
“아하, 데리러 왔다? 이상하네. 오터 씨가 백작님 대신 꽃이나 선물을
건네주던 에닌 마델로 양은 여기 없는데 누굴 데리러 왔다는 걸까.”
“아가씨는 언제나 우리 주인님에게 적대적이군.”
“나 같은 꼬마 계집애가 적대적이어 봤자 댁의 주인님께 해 될 일 같
은 건 없잖아요. 세상 모든 여자가 백작님에게 매혹되는 건 아니라는
것 좀 알아주면 좋겠어요. 그건 그렇고 정말 웬 일이신지, 그거나
말해 주세요. 진짜 데리러 온 거에요?”
“주인님께서 마차를 보내셨다. 아마도 아가씨나, 저기 저 어린 분이나
모두 마차가 없을 듯하니 불편할 것 같다고 해서.”
“어머나, 주는 건 절대 사양 않죠. 고맙네요. 친절이 좀 과해서 이상
하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로웨나는 우산을 휘두르며 현관 쪽으로 갔다가 윽, 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유릭이 돌아보니, 현관과 비스듬하게 보이는 골목길 끝에
정말 사두마차가 놓여 있었다.
유릭은 오터라고 불린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은 여
전히 유릭을 향하고 있었다. 유릭은 로웨나가 골목 끝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남자에게 말했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백작이라는 분은?”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거지.”
남자의 목소리는 꽤나 무구하게 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
이다. 유릭이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카밀턴 경을 보좌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인님의 친구 분이신 렌든
경에게 들었어.”
유릭이 웃었다.
“친절하게 출처를 밝혀 주신 덕에 제 첫 번째 의문은 사라졌군요. 하
지만 저를 그런 자리에 초대한 진짜 이유는 아주 궁금합니다. 저는
댁의 주인에 대해 전--혀 모르거든요.”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하나?”
“물론입니다.”
오터가 자신의 눈을 툭툭 쳤다.
“내게서 정직한 말을 듣고 싶다면 눈을 제대로 떠 보라고, 소년.”
“무슨 말씀이신지.”
“그린 얼굴 말고, 제대로 얼굴을 보여 달란 말이다. 그런 얼굴로 내게
묻는 다면, 나는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아. 상대가 나를 속이는데,
내가 어찌하여 솔직하게 이야기 하겠나.”
“그거, 바리암식 교훈문답입니까?”
“지금 자네 얼굴이 진실 된 얼굴이라면, 도화지에 웃는 얼굴을 그려
놓고 그 도화지가 웃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낫겠군. 나는
그런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답하기 싫군.”
유릭은 앞으로 한걸음 나갔다. 오터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진다. 유릭
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적진으로 직접 가서 알아내야겠군요.”
“왜 내 주인을 ‘적’이라 말하는 건가.”
“저는 프리델라 각하의 부하이며, 그 명으로 카밀턴 경을 보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부터 그분을 보호
하는 것이 지금의 제 임무입니다. 우연찮게 들었는데, 댁의 주인님
은 그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될 가능성이 아주 많으신 분이더군요.”
“두 달 뒤면 군인도 아니지 않나.”
순간 유릭은, 정말 순간적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오
터를 보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주
침은 짧을 지라도 강렬했고, 그것은 번쩍이는 불꽃이 비록 번쩍임이
라 할지라도 어둠에 내리 찍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오터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심장이 뜨거운 냉혈한이군, 마탄.”
유릭의 총구가 오터의 이마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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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아, 정말 살아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 초조하군요,
저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요일부터 계속 약속이 잡혀서.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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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