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편
쌍둥이 성#2
******************************************************************
“진짜 용무가 무엇입니까.”
검은 얼굴위로 나타났음 직한 표정은 저녁의 야트막한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꺼낸 말 역시 고인 물 마냥 아무 변화가
없었다. 유릭은 자신이 꽤나 손해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유형수더군.”
“네.”
“아직 식민지 법에 묶인 동생도 있고.”
“물론입니다.”
“내 주인님은 아주 놀라운 분이시지. 자네처럼 하잘 것 없는 소년에
게 기적을 베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닌 그런 분이야.”
“원하는 것은?”
“협조.”
“누구를 위한?”
“백작과 추기경, 현 황제와 돌비체 수상을 위한.”
유릭은 웃었다. 오터의 검은 눈길이 내리꽂혀온다. 유릭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방아쇠를 찬찬히 당기며 속삭였다.
“제 아버지가 누구의 고발과 판결로 유형지로 떠났는지도 알고 있겠
군요. 그리고 제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도, 누구 때문에 그리
되었는지도.”
“추기경을 증오하나?”
“증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협조할 수 있을 정도
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또, 이미 한번 제 아
버지를 파멸시킨 사람들을 위해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프리델라
각하를 배신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오늘 파티에 가서 내 주인님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 답해 봐. 우리는 몇 번이나 물을 것이고, 자네에게도 몇 번이나
답할 기회가 주어질 거야. 우리는 급하지 않고, 자네 역시 이제
막 식민지에서 건너온 시골 소년이라 무지하지. 하지만 되도록 긍정
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하기를 바라네.”
“더 믿기 난처해 졌군요.”
“어째서?”
“당신들은 제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고, 가치
가 별반 없는 자에게 당신 같은 분들이 기대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해 줄 것. 또한 버려질 때 아쉬움 없이 버려
질 것.”
오터의 흰 이가 다시 드러난다. 비웃는 것 같았다.
“몇 번을 거듭 만나고 보아도 답은 똑같을 거라는 건가?”
“다른 답을 듣고 싶다면 제대로 유혹해 보십시오. 지금 그 유혹은 순
진한 시골 아가씨에게도 먹히지 않을 서툰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릭은 총구를 거두었다.
오터가 젖은 이마를 훔쳤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 하사. 네 욕망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네 처
지에 양심을 넘겨서도 안돼. 그 자리는 아주 위험한 곳이고, 승리는
있어도 타협은 없는 자리야.
떠나는 날에 프리델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유릭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본국의 상황이 어떤 지는 상세하게 들었다. 열여덟 살 소년 이전에
장교였다. 비록 강등을 두 번이나 거듭하여 하사로 전역하게 되었
지만, 그는 특무부 내에서 분명 한 축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존재이
며 비밀을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임무에 관
련된 기밀사항에 대해 모두 듣게 되었고, 그것을 차근차근 들으며
유릭은 그 비밀위에 묵직한 책임이 얹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
피 비밀이란 책임과 함께 오는 것이다. 비밀을 나누면, 의무도 따라온다.
벌써 오래 전 일이나, 서부전선에서의 퇴각과 성도탈환의 보류, 바리
암과의 완전한 휴전 조약 성립, 조세 개혁 등을 추진하던 선황제의
암살과 함께 그의 신임을 받던 수상 그루체키온이 실각했다. 의회
는 해체되었으며, 수상 선출은 보류되었다. 그루체키온을 뒷받침하
던 선대 레반투스 대공은 엑토르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황태
자마저 실족사 하자, 돌비체 장군을 선두로 하여 북군이 반란을 일
으켰다. 그는 선황의 조카를 황제로 앉히고, 새로 구성된 귀족원
귀족들의 투표로 수상자리에 올랐다. 그와 손을 잡은 것이 바로
니콜라스 추기경. 그는 분명 성직자였으나, 철십자 기사단에 대한
지휘권을 이용하여 돌비체 수상의 집권을 도왔다. 수도가 장악되고
군 지휘권은 절반은 마비되고 나머지 절반은 수상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국에는 한번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마법사이자 팔시티 공작, 동시에 카밀턴의 아버지인 게오르그가 체포
된 것도 그 때였다. 마그레노 항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역시 고작
2년 후였다. 검은 나비 모임이라는, 아주 오래된 클럽이 발각되어
수 천 명이 체포되고 감옥으로 가거나 사형당한 것은 4년 뒤였다.
근 10년 동안, 돌비체 수상은 ‘합법적인’ 권력행사를 통해 ‘제국
의 평화와 안보’를 위하여 수 천 명을 유형지와 형장으로 보냈다.
그나마 기록이 남은 것만도 행운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중이니.
카밀턴 경의 위치는 그 중에서도 특이했다. 팔시티 공작가는 폐문되
고 말았지만, 게오르그 카밀턴의 아들 헨리 카밀턴은 후임 레반투스
대공의 보호아래 살아남았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몇 년 뒤 레
반투스 대공의 사촌인 프리델라 마고와 결혼함으로써 간신히 지위를
확보한다.
그러나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의 그의 인생은 참담하리만큼 괴로운
고행길이었다. 끝없는 견제와 압박이 가해지고, 헨리 카밀턴 자체도
별로 순종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아예 묵살하거나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약자도 아니었기에 돌비체 수상이 택한 것은 끝도 없이 트
집 잡고 깎아 내리는 것이었다. 서부전선으로 보내진 것도 그 때문이
었다. 무능의 무능을 증거하기 위해. 그러나 오랫동안 고착화된
전선으로 간 카밀턴은 제국군에게 대승을 안겨주었다. 수상과 귀족
원은 카밀턴에 대한 사문회 소환으로 그 승리에 보답했고, 그 동안
그의 자리를 대신했던 수상파의 장군은 서부군단의 전멸과 함께 전
사하게 되었다.
카밀턴은 단 이 천 명만 남은 서부 전선으로 돌아갔고, 한 달 만에
셀롯 요새를 점령하며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수상이
온갖 신문을 통해 그 전과를 깎아 내리려 해도 안 되었다. 강대한
바리암에 완승을 거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카밀턴은 국민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카밀턴의 암살 미수 건이 그토록 중요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직 증거도 충분하지 않고 배후에 누가 있는 지도 모르나, 이것이
증명되나 증명되지 못하냐에 따라 서로의 입지는 또 한번 달라진다.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카밀턴은 눈에 불을 키고 트집거리를 찾
는 귀족원과 돌비체 수상에게 탄핵될 것이고, 찾게 된다면 또 한
번 카밀턴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동시에 카밀턴이라는 인간 자체도
더 이상 찝쩍댈 수 없는 거물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무명의 식민지 장교인 유릭 자신을 택했는지는, 그렇기에 분
명하다. 일단은 수도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은 인정할 만 하며, 동시에 카밀턴 경과 처지까지 비슷하
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감하며 유릭은 눈을 들어맞은 편의 로웨나를 보았다. 이런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관심 있을 필요도 없으며 관심 쓸 일도 없어
보이는 이 소녀도 이 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실은 때론 연극보다 극적이지. 연극의 우연은 헛웃음이 나지만,
현실의 우연은 가슴 뜨거워지는 반전이니까.
칼 뷰겐트의 말이었던가.
유릭은 전임 상관의 말을 다시 한번 되 내이며 로웨나가 바라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로웨나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유릭은 아주
잠깐이지만 놀랐다. 로웨나가 갑자기 유릭의 어깨를 잡아 창밖으
로 당겼으니.
로웨나가 들뜬 목소리로 외치며 창밖을 가리켰다.
“홀라그로 성이다! 저런 성 처음 보지? 하긴, 나도 무도회 초대 받아
가는 건 정말 처음이라 멀리서만 봤었어!”
유릭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성, 노을에 젖어 붉고 찬란하게 빛나는
그 성.
그리고 그 성은 기억 속에서 그를 짓누르는 파난 섬의 그 감옥과 너무
도 닮아 있었다.
아니, 쌍둥이 형제처럼 똑같다. 성은 멀고 먼 바다를 넘어 서로를 응
시하는 잃어버린 형제인양 그 곳에 우뚝 서 있었다.
****************************************************************
작가잡설: 이봐, 에드. 원조교제 신청정도는 직접 하는 게 어때? 부하
시키니까 퇴짜 먹지. 쯧-
내일도 올라갑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