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45화 (45/174)

제44편

쌍둥이 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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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아주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 너무나 기묘한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숨겨 놓은

것, 유릭 자신마저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그 성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 느릿 느릿 되살아난다.

유릭은 다시 추위와 두통을 느꼈다. 숨이 차오르다가, 결국에는 가빠

진다.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저 성은 정말 오래된 성이야. 와스테 윌린과 팔콘이 이곳으로 오기

도 전에 만들어진 성인데, 사람들은 유령 붙은 성이라고도 하지.”

“어째서?”

“저 성에 살았던 사람 치고 잘 된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 첫 번째 주

인이었던 와스테 윌린은 그 다음해 전투에서 끔찍하게 죽었고, 아

가테이아도 죽었지. 마법사이자 대부호였던 젠타 그로슨 역시 죽었어.

모조리 그냥 죽고 사형당하고 미치고 하면서 성 주인이 계속

바뀌었는데, 란슬로 백작은 저 성의 스물다섯 번째 주인이야. 게오

르그 카밀턴의 흡혈귀 성과 함께 아주 유명한 흉성이지.”

유릭은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며 저녁노을에 젖은 성을 바라보았다.

“원래 저 성의 주인은 누구였지?”

“루스카브.”

다시 한번 기묘한 떨림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파난 섬의 그 성은 아

그리피나, 즉 루스카브의 연인이었던 마법사의 것이었다. 유릭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인 동시에, 아직 그 누구도 모르는 은밀한 탈법

을 저질렀던 곳이기도 했다.

유릭은 참으로 오랜만에, 정말 실로 오랜만에 아주 예전에 그의 손으

로 도망치게 해 준 남자를 기억해 냈다.

영문도 모르고 생매장 될 뻔했던 남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담아 그의 손으로 그 무덤의 섬을 빠져나가게 해 주었던 그 남자.

유릭은 다시 온 몸이 오싹해졌다.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한 것이 있다. 그 동굴에서, 모든 힘줄이 다

잘려나가 걷지도 못하던 그 남자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것일까.

입구까지는 기어서 갔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은 대체 어떻게?

마차가 멈추었다. 숨이 갑자기 터지며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리기 시

작한다. 유릭은 목덜미를 꾹 짓눌렀다.

마차 문이 열리며 오터가 검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리십시오.”

트레비스의 저택에서 열렸던 파티는 동네 댄스파티다. 그것이 마차에

내리는 순간에 유릭이 내린 결론이었다.

로웨나가 옆에서 너 왜 그래, 하며 툭툭 쳤지만 유릭은 그대로 얼어

붙어서, 정말 ‘얼어붙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태까지는 조금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릭은 자신이 ‘파난 촌놈’이라는 사

실을 처절하게 자각해야 했다. 심지어 방금 전에 오터 앞에서 잘난

체 했던 것조차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꽤나 도도하게 말하는 소년에

게, 그 남자는 분명 촌놈아, 성에 한 번 만 가 보면 홀딱 넘어 갈

거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유릭은 현기증이 일어나 마차 문에 기대고 말았다.

“유리, 너 왜 그래?”

“....큰....곳은 익숙하지 않아서.”

황량한 것에는 익숙하지만, ‘큰 것’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한 유릭이었

다. 자연이 만들어 낸 웅장함에는 태평한 유릭이었지만, 인간이 만

들어 낸 웅장함에는 보는 순간에 가슴 뻐근한 압박이 느껴질 지경이다.

성의 정원은 말 그대로 하나의 찬란한 빛의 세계였다. 성의 정문까지

이어진 길에는 조각상들이 일렬로 서서 사열하고 있었으며, 그 주

변에는 만개한 꽃들이 구름처럼 나무들을 휘감고 있었다. 진한 꽃

향기가 사방에 풍겨오며 머리를 몽롱하게 하고 바람이 소슬히 불어

올 때마다 흩어지는 꽃잎의 윤무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리고 성

의 거대한 창으로 보이는 연회장은 유릭에게는 가히 충격에 가까운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샹들리에가 별덩이처럼 빛나고, 연회장의 벽과 바닥에는

금빛 장식들이 반짝인다. 벽은 꽃과 덩굴무늬에 화려하게 덮여 있고,

드리워진 커튼은 물줄기 쏟아지는 듯 매끄러운 윤기가 흐른다.

화려한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들이 놓여 있고, 수정처럼 투명한 글라

스 안에는 붉고 투명한 술들이 가득 가득 차 사람들의 손에 나누어

진다. 그 안을 거니는 귀부인들의 목덜미에는 무시무시한 보석들

이 번쩍이고, 그들의 몸을 휘감은 실크 드레스에는 꽃과 화사한 무

늬들이 물결친다.

“괜히....온 것 같다.”

유릭이 창백한 얼굴로 말하자 로웨나가 까르르 웃었다.

“걱정 마.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야, 다 돼지 비슷한 머리통을

가진 인간들뿐이거든. 밤낮 누가 무슨 실수 안하나, 누가 나보다

얼마나 못났나, 이런 바보짓 밖에 안 해.”

“씹을 궁리만 하는 사람에겐 씹을 것 밖에 안 보이고, 너하고 난....충

분히 씹힐 것 같은데.”

“뛰어 다니는 돼지가 튀긴 진흙이 네 옷에 묻었다고 생각해 봐. 그

돼지에게 진지하게 분노할거야?”

“아니.”

“비슷한 거야. 저 안에는 돼지가 반, 그 돈 많고 신분 높은 돼지들에

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난 들개들이 반의반이야. 그런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어깨 피고 허리 피고 가면 되는

거야.”

“그러는 너는 뭐냐.”

“멀쩡한 극소수 중 하나지.”

로웨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릭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렇

게 있으니, 아주 훌륭하게 에스코트 하는 남자와 에스코트 되는 숙

녀의 모습이었다. 오터가 그런 둘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연회장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욱 굉장했다.

유릭은 그 화려함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참만에야 그 구조역시 파

난 섬의 감옥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화려하게

개조되었다고는 하나, 그 골격만큼은 아주 유사했다. 입구에서 홀

로 향하는 복도라든가, 그 중앙의 계단이라든가 문의 위치라든가

하는 것은 정말 너무도 똑같았다. 물론 파난의 형무소에서는 무도

회장은 죄수들의 조회에 쓰이고, 긴 복도는 일주일에 한번씩 죄수들

을 목욕 시킬 때 쓰이고 있지만 말이다.

유릭은 문득 2층이 아주 궁금해졌다. 파난 섬에서는 홀과 몇 개의 좋

은 방을 제하고는 모조리 감방이기 때문이다.

로웨나가 유릭을 잡아끌었다. 오터는 지치지도 않고 따라 붙었다. 음

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커진다. 그

리고 홀로 가까이 가다 보니, 거의 오케스트라 급에 육박하는 악단

이 보였다. 음악 소리는 홀을 가득 채우고 천장까지 휘감아 돌

정도였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술과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사람들이 로웨나와 유릭을 보게 되자, 당장에 옆에

있는 사람들과 수군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 성의

주인인 알렉산더의 하인중 하나이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빈번하게 목격되는 바리암 인 오터가 그들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주인님과는 나중에 뵙게 될 겁니다. 우선은 파티를 즐기십시오.”

오터가 그리 말했다. 유릭은 차라리 지금 당장 만나게 해 달라고 말

할 뻔 했다. 아니, 노란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아가씨와 이야기 하고

있는 연미복의 청년만 보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막 말하려는 찰나에 그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로웨나를 툭 치

고 말았다. 로웨나가 고개를 들자, 유릭은 그 청년을 가리켜 보였다.

유릭이 예상했던 대로 로웨나가 입을 딱 벌렸다.

“어머나! 저 녀석은 언제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미하일이었다. 그것도 구질구질한 방안에서 바퀴벌레들과 더불어 굴

러다니던 지저분한 대학생이 아니라, 연미복을 쫙 빼 입고 머리는

깨끗하게 다듬어 빗고, 세수에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친 신사의 모

습으로 서 있었다.

“진짜 빠르다!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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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여러가지로.....차암.

착찹하군요, 정말로. 너무나, 젠장!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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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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