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46화 (46/174)

제45편

쌍둥이 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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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물어보기로 한 로웨나는 당장에 유릭의 손을 던지듯 놓고는 미

하일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미하일은 노란 드레스의 아가씨에게서

눈길을 떼고는 로웨나를 이제 발견했다는 듯 돌아보더니 두 팔을

벌렸다.

“이야, 로이! 정말 너무 이뻐서 집에 도로! 들고 갔으면 좋겠다.”

“어떻게 된 거야, 미키!”

미하일은 방금 전까지 이야기 하던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로웨

나를 잡아끌었다.

“어떻게 되긴. 에니에게 같이 좀 가 달라고 부탁했지.”

“대체 어떻게! 에니네 아버지가 네가 그 저택 근처에 얼씬거리는 걸

허락이나 하든?”

지난번에 에닌과 이야기 하다가 살비에 마델로에게 들켜 두들겨 맞은

것이 먼 옛날도 아니다. 그날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 터지고 눈 시

커먼 미하일에게 이 등신아, 어쩌고 하며 얼음물을 퍼부어 댄 것이

로웨나였다.

“이렇게 차려 입고 가니까 아무도 뭐라고 안 하던 걸. 마침 에니를

에스코트 해 주기로 했던 어떤 누군가가 지나가던 어느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실려 가는 행운이 있기도 했고.”

그리고 히죽 웃는 모습을 보고, 로웨나는 그 ‘지나가던 어느 누군가’

가 이 미하일이었을 거라 확인할 필요도 없이 확신했다.

미하일이 다가왔다.

“어쨌건 에니는 다른 사람들 하고 이야기 하느라 바쁘니까, 나하고

놀자. 그리고 어이, 유릭 크로반 군.”

미하일의 푸른 눈이 번쩍이며 유릭을 향했다. 로웨나가 빈정거렸다.

“유리에게 시비 걸지 마. 그리고 너, 에닌이랑 함께 왔다며. 지금쯤

에니 옆에 남자들이 사탕 옆의 개미떼처럼 바글댈 텐데, 다른 놈이

에니하고 춤추는 거 보기 싫으면 당장에 달려가서 예약이라도 받

아 둬.”

“아, 그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춤추러 온 건 아니니까. 그

건 그렇고 둘 다 어디로 가는 거야?”

자꾸 미하일이 엉뚱한 말을 하자 화가 난 로웨나가 쏘아붙였다.

“트레비스 씨 찾으러 간다, 왜!”

유릭은 속으로는 웃었다. 로웨나가 트레비스와 특별히 할 일이 있을

리 없다. 로웨나는 이런 파티 자리에서 겨울잠 자는 것과 비슷한

상태로 멍하니 있을 유릭을 위해(하는 짓이 좀 유별나긴 하지만,

어쨌건 유릭은 ‘촌놈’ 이니까) 유릭이 아는 사람인 동시에 유명인

사이기도 한 트레비스를 찾기로 한 것이다.

로웨나는 그녀의 팔을 잡은 미하일의 손을 떨쳐 내고는 유릭의 팔을

잡았다. 미하일이 따라오려 하자 로웨나는 그를 쏘아보고는 퉁명스

럽게 말했다.

“괜히 오빠 행세 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하일이 얼굴을 구겼다.

“얌마, 그냥 같이 가자.”

“미쳤니이? 트레비스 씨나 다른 사람한테 너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해? 같이 사는 사이라고 말하리?”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설명을 하든 말든, 모르는 사람이라 하든 말든

나는 너를 쫓아다닐 테니까.”

“콱 그냥!”

로웨나는 사납게 노려보고는 유릭의 팔을 휙 잡아끌었다. 그러나 미

하일은 로웨나의 뒤로 따라 붙었다. 로웨나는 이를 뿌득 물기는 했

지만 더 이상 미하일에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대신 구둣발로 발등

을 콱 찍고는 뒤돌아섰다.

“어서 가자!”

미하일이 절뚝거리며 따라왔지만 로웨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유릭

역시 미하일에게 괜찮냐, 비슷한 말도 건네지 않았고, 미하일은 매우

서럽다는 눈초리로 그 둘을 보며 절뚝절뚝 따라와야 했다.

“얌마, 같이 가아아!!”

“세상에나, 로웨나 그린 양, 유릭 크로반 군. 어서 와! 아는 얼굴, 그

것도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니 기분 좋아 미치겠군.”

어렵잖게 찾아낸 트레비스는 마침 가볍게 칵테일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의 옆에는 에닌이 앉아 있었다. 트레비스는 평소의 그답게 머리도

깔끔하게 찰싹 붙이고 콧수염도 잘 정돈하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

로 곱게 차려 입은 아름다운 에닌은 유릭과 로웨나, 거기에 미하일

까지 따라 오자 놀란 눈으로 셋을 보았다.

로웨나가 손을 흔들었다.

“에니, 너무 반가워! 그런데 아직 춤 출 생각은 없나 보네? 우울한

트레비스 씨하고 같이 있는 걸 보니.”

그러며 로웨나는 트레비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너무 하는 군. 이래 뵈도 난 총각이라고. 아가씨와 식사좀 같이 하는

것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며 트레비스는 슬쩍 유릭을 보았다. 유릭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짓을 해 보였다. 트레비스는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전날에 가르쳐 준 것이다. 나중에

할 말이 많으니 잠시 시간 내 주십시오, 이런 뜻이라고.

유릭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마다 초대된 손님

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활짝 열린 창 옆에는 꽃이 만개한

나무가 한그루 서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을 떨구어 냈다.

꽃잎이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늦은 봄 하늘로 너울댄다.

잠시 뒤 성의 시종이 유릭과 로웨나에게도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

트레비스는 로웨나 옆에 찰싹 붙어 눈을 부리부리 빛내는 미하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군가, 그린 양.”

“제 고향 친구에요. 지금 카스톨 제국 대학 인문학부에 다니고 있죠.

파티 장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지 뭐예요.”

로웨나는 그리 말하고는 미하일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예상과는 달

리 소개를 ‘멀쩡하게’ 해주자 미하일이 더 놀랐다(그리고 유릭 역시

로웨나의 솜씨라면 말 몇 마디만으로도 미하일을 충분히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역시나 놀랐다). 트레비스

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트레비스 카트슨이라고 하네. 나도 카스톨 제국 대학 법학부를

다녔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내에서도 트레비스 씨의 명성은

자자하지요.”

“무엇으로?”

“대중적인, 동시에 매우 상큼하게 각색된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 주시

는 분이라고요. 높고 고상하신 분들이야 그 오페라 극장에서 조는데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익숙한 만큼 진부하지 않아서 싫어하지만,

오페라를 정말 듣고 보러 가는 많은 친구들이 선생님의 오페라를

사랑한답니다. 그리고 저도 무척 좋아하고요.”

“정말 고맙군.”

로웨나가 네가 웬일이니, 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미하일을 바라보았

다. 미하일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 보니, 매일같이 티격태격 하긴

해도 마음 통하는 친구 사이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에닌이 유릭에게 호기심 찬 눈빛을 보냈다. 유릭은 그녀가 자신

이 무언가 말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물었다.

“이 성의 성주분에 대해 잘 아십니까?”

단번에 에닌의 볼이 붉어졌다. 눈빛도 꿈꾸는 듯 몽롱해진다. 성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미하일은 물론이요 트레비스와 로웨나마저도

눈을 반짝이며 그 둘을 바라보았다.

“잘은 몰라요. 하지만....... 저에게 친절한 분인 건 사실이에요. 게다가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자산가시죠. 어떻게 이렇게나 부유하신 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저

희 아버지 회사는 물론이고 여러 군데 투자를 하시고 계세요.”

유릭은 참으로 난감할 정도로 수확이 적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는 쥴

리안도 답해줄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로웨나가 턱을 괴고는 말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말이야, 리스카 해역의 그 유명한 해적 검은

갈매기가 란슬로 백작이라더라. 요즘 안 나오는 걸 보면, 거기서

모은 보물로 여기 이렇게 정착한 것임에 분명해.”

“어머나, 무슨 말이니 너! 그런 나쁜 사람하고 비교를 하다니.”

그런데 트레비스가 말했다.

“나는 아카보 왕국의 보물과 함께 실종된 왕자, 페르시바라고 들었는

데. 그 왜, 아직도 아카보 왕이 이를 박박 갈며 찾는 그 왕자.”

로웨나가 말했다.

“혹시 펜리키언의 왕자일 지도 모르죠. 그 사람들은 정말 엄청난 보

물을 숲에다 숨겨 놓고 살잖아요. 혹시 알아요? 달뜨면 정말 늑대로

변할 지.”

“세샤티언일 지도 모르지. 장갑을 벗으면 발톱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라고.”

이번에는 미하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에닌이 얼굴을 더욱 붉혔다.

“백작님에 대해 그리 말하지들 말아요. 백작님은 정직하게 돈을 모은

분이에요.”

“증거는 없잖아.”

로웨나였다.

“게다가 정직하게 모았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기도 하고요.”

미하일이었다.

“얼굴까지 가리는 것을 보면 정말 수상하기도 하고.”

이번엔 트레비스였다.

에닌은 정말 새빨개졌지만, 다들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이

대화에서도 역시나 수확이 없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유릭은 한 가

지만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성의 성주 란슬로 백작

알렉산더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던 유릭은 트레비스의 어깨너머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지난 파티 때 카밀턴에게 집적이던, 바로 그 윌리엄 렌든 경이 뒷자

리에 앉아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주인 알렉산더가 니

콜라스 쪽 사람이라, 렌든 역시 초대된 듯 했다. 카밀턴을 사문회에

가둔 것이 그를 얼마나 기쁘게 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번쩍

이는 제복을 입은 그는 축배를 들 듯 잔을 들고 있었다. 볼은 상기

되어 있다. 그의 앞에는 낯선 중년 남자와 예쁘고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는 금욕적인 사제를 연상시키는 차림새였다. 장식 하나 달

려 있지 않은 아주 단순한 검은 옷에, 단추만이 조명에 번쩍일 뿐

이다. 붉은 빛 감도는 머리도 아주 깨끗하게 빗어 넘겨 한 올 흐트

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이 날카롭고 입술이 얇아, 검소하거나 단

정해 보인다기 보다는 굉장히 차고 잔혹해 보이는 인상이다. 숱만

은 콧수염도 너무 잘 다듬어 아차 실수하면 찔릴 것만 같다. 그러나

아내인 듯한 옆의 여자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목까지 덮은 번쩍

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귀에도 완두콩만한 다이아몬드 귀걸이

를 하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손을 흔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

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보석이 번쩍였다.

그들 옆에는 또 다른 젊은 남자가 벽에 기대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것으로 보아 일행인 듯 했고, 중년의

남자와 차림새나 인상도 비슷해 보인다. 늘씬하고 큰 키에, 안색

은 아주 창백했다. 코는 깎아낸 부리처럼 날카롭고, 짙은 눈썹 아

래의 눈매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동자는 불그스름했지만, 그것은 자

세히 봐야 간신히 보이는 색조였다. 얼핏 본다면 평범한 검은색으로 보인다.

남자의 눈길이 유릭을 향했다. 유릭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유릭은 빙긋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고

개를 돌리니 옆의 로웨나역시 유릭과 같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창백했다. 입술 안쪽을 꾹 짓누르고 있었고, 테이블 보

아래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하일이 테이블 보 아래로

손을 밀어 넣더니 그런 로웨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유릭은 무슨 일인지 물어 보고는 싶었지만 그럴 정도로 친하지 못하

다는 사실이 먼저였다.

대체 뭘까.

그 때 만찬장 안으로 오터가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유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역시나 그를 찾으러 온 듯 오터가 성큼 성큼 걸어왔다.

그런데 렌든이 마치 아주 잘 아는 사람의 하인 부르듯 큰 소리로 그

를 불렀다.

“어어, 오터가 아닌가! 란슬로 백작은 대체 언제 내러 온다던가.”

“긴히 만날 손님이 있으니, 잠시 뒤에 살롱으로 내려가실 예정이라

하십니다.”

오터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그리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살롱에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벌써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가셔

도 됩니다. 그리고 그레이브 각하, 주인께서 각하를 위해 특별히

암로크 산 시가를 준비했으니 기대하시라 하시는 군요.”

철을 두드려 만든 듯 냉혹해 보이는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유릭은

자기도 모르게 로웨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를 외면하는

로웨나의 눈 위로 불꽃같은 것이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오터가 유릭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트레비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릭은 가볍게 입술위에 손을 얹었

다가 뗐다. 나중에 다 한꺼번에 이야기 하지요, 정도였다. 트레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을 훌떡 비웠다. 그의 눈 안에 불안함이 잔

뜩 일렁이고 있다.

유릭은 지금 당장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지 변명할 수는 없는 지라

일단 인사와 함께 일어났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것은, 이상할 정

도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그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과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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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내일도 올라갈....지도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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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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