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49화 (49/174)

제48편

아주 깊은 곳#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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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단 둘이 가 버렸다, 이거냐--!!?”

“어차피 너는 여자들 꼬시느라 바빠서 내가 어디에 있는 지 관심이나

있었겠냐.”

“너는 정말 왜 그렇게 나를 파렴치한 바람둥이로 모는 거야?! 젠장,

거기 간 이유 자체가 그거랑 상관없는데 내가 왜 그런데 신경 써!”

로웨나가 코웃음을 쳤다.

“어머나 그럼 가슴 두툼하고 어깨 튼실한 남자 꼬시느라 바빴니? 아

항, 아닐지도. 네 취향은 콧수염 근사한 중년 남자일 지도 모르지.

트레비스 씨가 좋니?”

“로웨나아아악!!”

유릭은 마지막으로 닦은 접시를 찬장에 올려놓았다.

무도회 다음날 아침부터 내내 싸우기 시작하여, 로웨나가 극장에 다

녀온 오후에도 끈질기게 쪼아대더니, 그 다음날 저녁식사 시간인

지금까지 싸워대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미하일이 로웨나의 말 대로 ‘오빠 행세’를 하려는 것인지

‘남편 행세’를 하려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누가 봐도 외박하고

돌아온 마누라 족치는 남편 모습이다.

화가 치민 로웨나가 체리를 집어 우적 우적 씹어 시작했다. 미하일이

으르렁대더니 바구니를 휙 빼앗았다.

“너 요즘 행실이 왜 이런 거야!”

“밤낮 너한테 관심 없어, 넌 여자가 아니라 제3생명체지, 따위나 지

껄이는 녀석이 오늘 따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네 마누라냐!”

갑자기 미하일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어깨를 부르르 떠는 폼이, 정말

불쾌해 하고 있었다.

“누구 혼삿길 망칠 일 있냐? 네가 왜 내 마누라야!”

“네가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촐싹대는 건 내 혼삿길 망치는 거 아니

고? 아하, 이러다가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데이트 할 때도 그

렇게 쫓아다닐지 모르겠네.”

“네 혼삿길을 망치려는 게 아니고, 너는 너무 순진하고 멍청해서 남

자들이 조금만 상냥하게 해 줘도 홀딱 넘어가니까 그렇지. 봐, 저

녀석이랑 알고 지낸 지 며칠이나 지냈다고 단 둘이 같이 돌아 오냐,

이거야! 상식적으로 나를 불러다가 같이 왔어야 하는 거 아냐!

상식적으로!”

유릭은 차를 끓이며 생각했다. 로웨나가 능글맞은 바람둥이에게 넘어

갈 확률 보다, 저 미하일이 능글맞은 바람둥이에게 넘어갈 확률이

더욱 높다고(둘 다 남자라는 전제하에). 미하일이 유릭을 가리키며

윽박질렀다.

“더 볼 거 없어. 당장 저 녀석 쫓아내!!”

“너 방세 낸 지 얼마나 됐어?”

갑자기 미하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석 달간 방세 낸 게 누군지 알기나 해? 정작 쫓겨나야 할 건 너라

고. 저 산더미 같은 책들이랑 같이 보따리 싸서 쫓아내기 전에 입

닥치고 있기나 해.”

“그린 선생님께 너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어.”

“아하, 너는 내 옆에 다른 남자가 얼쩡거릴 때만 그 약속이 생각나나

보지? 행여나 그 남자에게 시집가서 네가 살 곳이 없어지기라도 할

까봐. 에닌에게 꽃 보내고 선물 보내고 편지 보내면서 그 애와 만나

러 다닐 때, 그 때 나는 여전히 일하고 돈버느라 바빴어. 그럴 때

네가 나한테 관심이나 줬어? 걱정해 준적은 있었어? 방세만 던지듯이

놓고 간 것 밖에는, 도와주거나 친절하게 해 준 적은 단 한번도 없

었다고! 그런데 지금 새삼스레 이렇게 보호자 인 척 행세하는 이유

는 대체 뭐야?”

“그야 이건 다른 문제잖아!”

“내가 세상 물정 몰라서? 무진장 미안하지만, 네가 공부하느라 집에

처박혀 있을 때 내가 뭘 하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해? 황실 아카데

미는 누가 공짜로 보내 준 건줄 알아? 이 방을 누가 얻었지? 너야 말

로 정말 돈 낸 것 밖에는 한 일이 없잖아!”

“이, 이건 남자 문제니까.”

“정말 남자 문제라면 나도 좀 덜 억울하겠다. 나는 유리를 사랑하니

까 내 버려 둬, 젠장 이러면 좀 덜 억울하겠단 말이야!! 하지만 정작

저 녀석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밖으로 나갈까, 하고 유릭은 생각했다. 그러나 차 향기가 아주 근사

하게 풍겨 와서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한잔 마시고 가야겠다(그

리고 어차피 ‘시끄럽다’는 것을 제하고는 별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너는 내 사생활에 간섭할 하등의 이유도 권리도

없어. 여태까지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있었다면, 나를 보

호해 주고 있었다면! 그리고 정말 내게 관심이 있었다면, 그러면 너

는 분명 내게 상관할 권리가 있겠지. 네 친절과 관심에 대한 대가

로 말이야! 하지만 아니잖아. 너, 내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고 있어?”

미하일의 얼굴이 이제는 하얘졌다.

“내 생일날 너는 무슨 서클이니 뭐니 하면서 들어오지도 않았어. 반

대로 에닌의 생일날에는 없는 돈 털어서 선물이랑 꽃을 보냈지. 네가

나한테 이런데, 나는 네 생일이 5월 27일일이라는 걸 알아. 억울하

고 분할 지경이라고--!”

“야, 그게......좀 잊을 수도 있잖아.”

“잊을 수도 있어? 기본 적인 건 좀 챙겨 달란 말이야, 이 바보야!”

그리고 로웨나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멍하니 있는 미하일의 옆에 유릭이 차한잔을 들고 와 앉았다. 미하일

이 멍하니 있다가, 옆에 유릭이 앉자 눈을 하얗게 치뜨며 노려보

았다. 시퍼런 눈으로 그리 노려보니, 정말 오싹하다.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잘못한 거 알면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해라. 잘못한 걸 잘했다고

우기려 하다 보면, 절대 용서 못 받게 된다고.....”

‘바보’는 생략하기로 했다.

“제길!”

미하일은 수염이 비죽 비죽 튀어나온 턱을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유릭 크로반. 본심이 뭐냐, 너?”

“그러는 너는 뭐지?”

미하일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유릭은 차분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

보며 그리 물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미하일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린 선생님이 나한테 저 애를 부탁했다고. 잘 보살펴 달라고. 저래

뵈도 외롭게 큰 아이야. 친한 사람에게는 참 상냥하고 친절하기도

하고. 그리고 나, 저 애 싫어한 적 없어. 편다하 보니.....좀 막 나가

는 건 사실이지만.”

“나도 다른 흑심이 있는 건 아니야.”

“흑심 없는 놈이 생판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스토커로부터 지키기 위

해 이렇게 둥지 틀고 앉아 있냐. 말이나 좀 되는 소리를 해라.”

그제야 유릭은 이 집에 온 핑계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유릭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

말 없이 계속 있다가는 이 미하일이 밤낮 로웨나를 들들 볶아 댈

테고, 매번 이런 식이라면 유릭 본인이 괴롭다. 유릭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부드럽게 말했다.

“미하일, 나는 에닌을 좋아해. 아주 사랑하고 있어. 첫눈에 반했거든.”

“응?”

미하일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닌 마델로 양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로웨나 양이 위험하다고 하

면서 그 안전을 부탁했지. 그녀의 부탁이니, 이렇게 최선을 다해

들어줄 수밖에 없어. 무리라는 건 알지만 나 같은 촌놈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어. 이해해 줘.”

그리고 흘끔 미하일을 보았다. 경쟁자라 생각해서 눈 부라릴 줄 알았

는데, 미하일의 표정은 성자처럼 밝고도 환했다.

“정말이냐?”

“정말이야.”

그러나 미하일의 눈초리에 다시 의심이 번쩍였다.

“그럼 그저께 무도회 날 그렇게 살갑게 군 이유는 뭐냐?”

“에닌 양이 로웨나에게 잘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으니까. 로웨나 성

격 알잖아. 성심성의껏 잘 해 주지 않으면 에닌 양에게 뭐라 일러

바치겠어. 게다가.... 춤 신청 안 해주면 에닌 양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정말 협박하기도 했고.”

미하일의 눈은 이제 완전히 풀어져 버렸다. 갑자기 크게 웃어젖히더

니, 유릭의 등을 퍽퍽 치면서 크게 외쳤다.

“으하하,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로이

옆에 붙어 있어도 돼! 파하하하하! 짜식, 진작 그렇게 이야기 할

일이지! 그러면 벌써 안심했을 거 아냐.”

“응?”

“아, 보는 눈은 있구나. 에닌 마델로 양이야 말로 천상의 목소리에,

천사 같은 얼굴과 마음씨에, 그레타 님 같은 상냥함과 정숙함을 가진

여자지! 아하하하! 로이하고는 정말 비교도 안 돼. 너는 정말 상대

를 잘 고른 거니까, 절대 그렇게 밀고 나가. 알겠지? 와하하하! 절

대 한눈팔면 안 된다!! 절--대! 특히나 로이한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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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으하하핫;;

늦기는 했지만 연중은 아닙니다~~ ;;; 죄송죄송.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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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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