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편
오래된 흔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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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좋은 날이다. 어디로든 햇살이 비껴들며 촉촉하게 물오른 여린
봄 잎을 비추고, 아침 공기 는 투명하고 차갑다.
제국 정보부의 문서 보관실로도 그 물 오른 봄 햇살이 비껴들며, 어
둠과 추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유릭은 별로 마음 편하게
있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날만은 좋았다.
유릭은 제복차림으로 오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식민 특
무부의 제복은 파난 섬에 놓아두고 왔고, 해결 못하고 돌아가게 되면
그 자리에서 2년 더 복무하게 될 테고, 해결하게 되면 더 이상 필
요 없게 될 테니 무엇 때문에 들고 오겠는가. 그러나 그 덕에 지금
꽤 까다로운 눈길에 시달려야 했다.
신분을 증명할 모든 것을 내 놓았건만, 눈앞의 장교는 유릭의 출입
자체에 굉장한 거부감을 표하고 있었다. 제복 없는 군인은 인식표와
신분증 백 개를 내놓아도 소용없다는 파난의 말이 생각난다.
담당자는 나이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꽉 쪼이는 듯한 체
구를 가진 장교였다. 주름은 나이답지 않게 깊게 패여 있고, 입이 꽉
물려 있는 것이 고집 세고 고집 센 만큼 편견역시(그리고 본인은
아마도 ‘사전 지식’이라 착각할 테고) 대단한 남자인 듯 보인다. 게
다가 자꾸 유릭의 터진 입술을 흘끔 흘끔 보는데, 가릴 수도 없어
서 난처하다.(그리고 칼 뷰겐트를 잠시 원망했다. 아무리 실망했기
로 서니 그 자리에서 두들기다니.)
마침내 그 차돌멩이마냥 깐깐한 장교가 입을 열었다.
“칼 뷰겐트 중령의 전갈은 받았다.”
“그렇다면 괜찮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2 보관실 까지다.”
그리고 남자는 옆에 놓인 카드 중 푸른 테가 둘러쳐진 것을 꺼내어
유릭에게 건네주었다.
제2보관실 까지만 가도 된다는 출입증인 것이다. 유릭은 말없이 그것
을 받아 갈색 제복의 두 병사가 험악하게 지키는 문 앞으로 가서
흔들었다. 병사들이 고개를 까딱이자 유릭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장서실은 연한 햇빛이 은은하게 비껴들고 있었다. 여기 저기 문서를
지키는 병사들이 서 있고, 문에서 뻗은 길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어
그 옆에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문 위에는 숫자 3이 적혀
있다.
제3 보관실, 즉 하사인(지금은) 유릭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기밀문서
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파난에서 국비는 물론이요 국비의 국비
보관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유릭인지라, 이리 대우를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 쥴리안이 덤빌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유릭은 느릿느릿 걸어 책장 옆에 적힌 번호와 알파벳을 차근차근 확
인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찾는 칸에서 몇 가지를 뽑아 들어
읽고, 몇 가지를 수첩에 적어나갔다.
몇 번 그 작업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슬며시 다가왔다.
“적는 건 좋은데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유릭은 적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꽤나 키 큰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으나 체격은 다부져 보인다. 입고 있는 치안청 제복은
아주 깨끗했으며, 단추나 계급장은 햇살이 번쩍거릴 정도로 잘 닦여
있었다.
유릭은 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싸늘한 남자의 얼굴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초대되었던 알렉산더 백작의 성에서 치안청장 그레이브-
즉, 로웨나의 아버지- 옆에 있던 그 젊은 남자였다. 인상이 아주
특이해서 잘 기억한다.
“한번 뵌 분이군요.”
“홀라그로 성에서지. 나도 기억하고 있어.....각하의 뒷자리에 오페라
여가수들과 함께 있었지, 아마. 굉장한 미인들에게 둘러싸여서 그
렇게 친밀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니, 정말 부러웠어. 나는 치
떨리게 칙칙한 상관과 같이 있는 것도 괴로운 그 마누라와 함께 있었
는데 말이야.”
유릭은 괜히 웃겨서 피식 웃었다. 에닌이라면 몰라도 로웨나도 굉장
한 미인이라니.(설마 미하일을 지칭할 리는 없으니)
“치안청 소속이셨군요.”
“정확한 직책을 말하자면 치안청 경감이지.”
경감이라. 나이는 젊어 보이는데 지위는 높다. 뿐만 아니라 파티 같
은 곳에, 그것도 치안청장이 부인과 함께 나오는 그런 자리에도 따
라올 정도이니 치안청장과도 사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남자가 물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면 군인인 듯한 데, 어디 소속인가.”
“식민 특무부.”
남자의 눈이 잠깐 커졌지만, 이내 그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얇은 입술이 씨익 웃는 것을 니, 로웨나가 본다면 기분 나쁘다며
입술을 비죽이며 꽤나 사납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남자는 느긋하게
턱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백작이 건 내기에서 자네가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군. 거
기 사람들은 꽤 특이하다고 들었는데.”
유릭은 다시 웃고 말았다.
“그 부서에 쓰는 ‘특출한 능력’으로 당신의 공무를 방해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백작님의 그 부탁은, 제 임무가 아니므로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에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최선을 다
해 범인 검거에 힘쓰십시오. 황제폐하와 우리의 위대한 수상각하
를 위해, 그리고 성스러운 제도의 안전을 위해.”
“안 한다고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본인이 더 잘 알잖아.”
“그 도둑 검거에, 제도 특무부가 동원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흑마법 관련이 아닌 이상 그들은 겨울잠 자는 곰처럼 꿈쩍하지 않는
다. 우리가 직접 증거를 가지고 가거나, 특무부 소속의 군인이 보
고를 하지 않는 한 그쪽 손 빌리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말하다가 남자는 유릭의 수첩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어쨌건, 내가 이곳과 관련이 아--주 깊어서 잘 아는데, 여기서 적
은 건 밖으로 못 가져 나가. 모두 국비로 취급되거든. 이건 내가
자네를 방해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기 때문이야.”
왠지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듯한 인상이 든다.
“여기는 제2 보관실. 그리고 제가 적는 것은, 이미 신문에 보도된 것
들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게 아니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게
국비가 될 정도라면 온 국민의 기억력은 가히 절망적인 수준이군요.”
“그래도 안 돼. 저 앞에 있는 오렌 소위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몸서
리 쳐질 정도로 깐깐한 놈이거든. 아마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몸수색
되어서 뺏길 거다. 헛수고 하지 말고, 머릿속에나 잘 담아둬.......가만
이름이 뭐지? 들었던 것 같은데 벌써 잊었군.”
“유릭 크로반 입니다.....브랫 키저 씨.”
“응,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유릭은 목덜미를 가리켰다.
“세탁소에서 붙여주는 이름표는 입기 전에 떼셔야지요.”
브랫의 제복 칼라 안쪽에 흰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브랫은 그것을 떼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녀가 좀 어수선해서, 늘 이런 실수를 하지. 그런데 자네는 그 도둑
을 어떻게 잡을 생각인가?”
“혹시 그 일을 직접 맡으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분명 그럴 듯 했다. 그레이브는 상류층의 파티에까지 이
남자를 붙이고 다니며 여기 저기 알리는 듯 했다. 그리고 얼굴을
알린다는 것은 곧 중요하게 써 먹겠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 일은 꽤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역시나 브랫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안청장께서 직접 맡으신 일이다. 나는 그 대리로 성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지. 하지만 그 뿐이야. 나는 별로 하는 일 없을 걸.”
그럼 그렇지. 유릭은 상황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도둑에
걸린 상금은 유릭으로서는 듣기만 해도 허리 뻐근할 정도의 액수다.
아무리 공직에 있는 치안청장이 잡는다 하더라도 그 상금은 고스란
히 그 그레이브의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며, 공훈역시 어깨에 두둑
하게 얹혀 진급과 훈장을 더불어 받을 기회가 될 것이다.
칼 뷰겐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좌천된 상태. 이번 일은 어렵긴 하지
만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일이 얼마나 어려울 지는 수도에 막 도착한 유릭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며칠 전에 본 그의 모습을 떠 올린다면 이런
일을 꽤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거나 손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전날에 백작이 상금을 걸고 유릭에게도 한번 해 보라
말할 때, 그의 표정은 유릭을 씹어 삼킬 듯이 살벌했다. 눈앞의
고깃덩어리를 아기 고양이가 집어 삼켰을 때의 늑대 표정이랄까.
유릭은 신문철을 접어 책꽂이에 밀어 넣었다. 브랫의 눈초리가 예리
해졌다. 유릭은 꽤 예민한(동시에 귀찮은) 사람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브랫은 유릭이 꽂았던 신문을 다시 뽑아 그 날짜
를 슥 쓸어 올리며 확인했다.
“대강 십 수 년 전의 기록이군. 박쥐는커녕 생쥐도 없던 시절이야. 이
건 왜 보는 거지?”
“달리 조사할 게 있어서요........ 그리고 경감 님, 그 도둑의 행적에 대
한 조사를 할 거면 저기서 하세요. 방해 안할 테니.”
유릭은 먼 곳을 가리켰다.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라이벌이잖아. 라이벌이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
“죄송하지만 저는 잡을 생각도, 필요도 없습니다. 전혀 상관 안할 테
니, 조사하실 것 있으면 하십시오.”
브랫의 눈썹 끝이 슬쩍 치솟았다.
“자네, 백작의 청을 수락한 것 아닌가.”
“저는 수락한 적 없습니다. 그 때 계셨잖습니까. 저는 중간에 나갔고,
백작님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같던데, 그리 된다면 중간에 따로 만날 수도
있지. 아니면 미리 이야기가 되었거나.”
유릭은 그 백작인지 뭔지와 만난 것이 두 번 밖에 되지 않는 다고 굳
이 말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더군다나 이 브랫인지 뭔지 하는 남
자의 집요함은 ‘의부증 환자(남편도 없으면서)’라는 별명이 붙은
카바냐에 버금갈 정도다.
“제가 뭐라 말하든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계신 듯한데, 그렇다면 설
득할 필요도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제가 말하는 것 보다
브랫 경위님의 자신의 가정을 굳이 더 믿으시겠다면, 저 역시 말리지
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유릭은 메모지를 찢었다. 브랫이 놀랐지만, 유릭은 거들떠보
지도 않고 그것을 몇 번을 거푸 찢어 조각 조각낸 후에 주머니에
넣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브랫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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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사방에서 찍히는 군, 유리. .........아냐, 네가 꼬시는 거
야.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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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