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52화 (52/174)

제51편

오래된 흔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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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어?”

나와 보니, 로웨나는 현관 계단에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고작 한 시

간 안에 있었을 뿐인데, 천년은 기다린 듯한 표정으로, 눈은 거의

반쯤 감겨 있었다.

“다음에 다시 와야 해.”

로웨나는 얼굴을 콱 구겼다.

“그럼 나는 또 여기 있어야 하는 거냐? 으아, 제발 부탁이니 그만 하

자고. 잘 생각해 봐. 그 동안 위험할 일이 있기는 있었니? 응? 없

었잖아. 아마 그 암살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내가 자신을 봤다는

사실조차 잊거나 모르고 있음에 분명해.”

“그걸 정하는 건 내 소관이 아니야. 카밀턴 경이 사문회에서 나오면

그 때 조르던 말던 해 보라고. 카밀턴 경이 허락한다면 기쁜 마음

으로 놓아주지.”

“결론은 네 책임 아니니까 그만 졸라 대라, 이거구나.”

로웨나는 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가량 유릭의 성격에 대해서

는 대강 파악했으니, 로웨나는 이 유릭을 설득하기 보다는 ‘속이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날과는 달리, 이제 유릭은 아예 속지

도 당하지도 않았다.

유릭이 먼저 정문으로 향하자, 로웨나는 치마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

고는 따라갔다.

“그런데 조사할 게 많아서 또 온다는 거니?”

“아니,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나온 거야.”

로웨나는 턱을 툭툭 두드렸다.

“상금이 크긴 큰데, 생각 있니?”

“없어.”

“황제 폐하가 건 상금이 자그마치 1만 카스티야, 각 보석이 들어 있

는 보험회사에서 지급할 상금이 오천, 거기에 란슬로 백작이 건 상금

이천! 이렇게 많은데 정말 안 잡을 거야?”

“잡고 싶다고 해서 쉽게 잡힐 거면, 그렇게 많은 상금이 걸려 있을

리 없지. 그리고 나는 행운에는 약해.”

“아깝다. 하지만 그놈 부하중의 하나가 잡거나 해서, 그놈이 상금 타

면 정말 열 받을 것 같은데.....차라리 네가 잡아. 이천 카스티야만

주면 나도 협조해 주지.”

“아는 거 있어?”

로웨나는 잠시 턱을 들고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양산을 빙글 빙글

돌리고는 싱긋 웃었다.

“음, 우선은 범인들은 한 명이 아니라, 적어도 세 명 이상 되는 사람

으로 이루어진 팀이다.”

유릭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로웨나 역시 멈추고는 양산을 한 번 더

핑그르르 돌렸다.

“그런 거만한 도둑은 성공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의외로 흔적 같은

것을 잘 남겨둬. 너무 많아서 헷갈릴 정도로. 그리고 훔치는 본인

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의도적이기도 하지. 그 흔적의 성격이, 내

가 나누어 보았을 때 세 가지 이상이었어. 한 사람은 굉장히 주도

면밀하고 철저한 사람이지. 그 사람은 흔적을 거의 안 남겨. 발자국

한번 남긴 적이 없지. 또 한사람은 본인이 굉장한 예술가라도 되

는 줄 아는 지 꽤나 거창한 방법으로 훔쳐가. 그 사람은 칠칠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흔적을 잘 남기는 편이지. 나머지 한 사

람은 꽤 소심한 사람이야. 조심조심 물건만 훔치고 가는데, 첫 번

째 사람과는 다른 것은 그 사람의 경우에는 발자국이라든가 하는

걸 잘 남기는데다가, 딱 한번 실패한 적도 있거든. 그 사람이 했음

직한 카젠델라 공작부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건은 실패했고, 목

걸이는 정원에서 발견되었어. 운이 좋았는지, 그 때 경찰들은 모조리

저택 근방에 있어서 그 범인으로 지목될 만한 사람을 잡지는 못했어.”

“언제 그런걸 다 알아낸 거니?”

“아, 너는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되서 모르는 것 같은데 범행 방식을

파악하는 건 아주 간단해. 다 신문에서 본 거야. 타블로이드 신문

말고 게일 지 같은 신문의 사건 개요만 읽어도 충분해. 이것 저것

스크랩하고 정리하고 대차대조표 작성해서 파악하는 건 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셋 이상이라면, 혹시 순서가 있나?”

“순서는 당연히 없어. 경비가 허술한 날에는 세 번째, 꽤 어렵다 싶으

면 첫 번째, 그리고 범행대상이 되는 보석의 주인이 한번 요란하게

망신당하는 게 좋을 위인이면 두 번째. 사실, 그래서 범행을 계

획하고 저택 내부를 물색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다 할 수는 없거든.”

“천재일 가능성도 있지.”

“관련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아무리 죽여주는 천재라도 우수

한 머리 두개만은 못해. 그리고 이런 예술적인 절도행각은 금방 매

너리즘에 빠지고, 성공한 방식을 계속 유지 하려는 습성마저 가지게

되지. 보통 연쇄절도범은 그즈음에서 잡혀버려. 아무리 치안경찰

이 바보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물건을 털어 가면 패턴을 파

악하게 되거든. 그리고 천재 한 명의 위험성은 여기서부터 발생하지

. 자기 빼곤 다 바보 취급해 버린다는 거야. 하지만 세상 사람이

그리 만만한건 아니거든. 십인십색,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이면

모일 수록 사건이 여러 가지 면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틈이 보이고 잡히게 되는 거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니야.”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몇 명인 것 같아?”

로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머리가 비판과 성찰과 이해, 상호 존중을 통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어쩌면 범행을 하는 세 명 모두가 그 일을

할지도 모르지. 두 명이 계획 잡고, 한명이 털고. 그리고 장담하건데

이들에게 내분이 일어나도 절대 괴도 박쥐 씨는 잡히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서로 돌아가면서 저택을 털었기 때문에 한 번의 범행

은 성립해도 그 전의 범행에는 이미 알리바이가 만들어져 있을 가

능성이 매우 높아. 결국 모방범죄가 되는 것 뿐, 진범이 잡힌 건 아니야.”

“그렇다면 상금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나타나지 못하게 되겠네.”

“다 잡으면 되겠지. 스물일곱 배로 어렵지만 말이야.”

“세 배가 아니고?”

“한 사람이 잡히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숨어 버리겠지. 그들이

우리는 보석털이 서클이요, 하고 광고하고 다녔겠니?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일 거야.

그 사람들을 다 어떻게 잡아? 몇 명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열심히 조사한 이유는?”

“상금 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돈 없다 보니까 별걸 다 기대하게 되

더라고. 하지만 세 명 이상이다, 라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포기 해

버렸지. 기껏 잡았는데 모방범이다, 하고 결론나면 상금은 모조리

회수되어 버린다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그래서 관뒀어. 그리고

만약 한 사람이 잡히고, 그 사람이 경찰과 형량을 대가로 하여 동

료들을 모두 배신할 경우에는 나는 정말로 헛수고 한 셈이 되어 버린다고.”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방금 전에는 왜

협조한다고 하는 거지?”

“너도 행운에 약하고 나도 행운에 약하니까, 이 마이너스의 행운을

곱하면 완벽한 플러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들어서.”

그리고는 로웨나는 히죽 웃었다.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범인 잡을 생각은 없어.”

“하긴, 너는 바보 군인이니까. 그런데 정말 너 어디 소속이야? 하는

일은 또 뭐고, 하려는 일은 뭐야. 갈수록 궁금해지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말하자면 꽤 복잡해.......그리고 그 때문에 한가하게 도둑잡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로웨나가 쳇-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백작이라든가 박쥐라든가, 하는 건 잠시 접어 두기로 하고. 유릭은

방금 전 옛날 신문에서 찾아낸 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제3, 제4

까지 들어가서 사건 기록을 보지 않는 한 그런 신문 기사가 전--

혀 쓸모없는 물건인 건 사실이다.

어차피 돌비체 수상의 집권이후 모든 신문 기사는 검열에 들어갔다.

카밀턴 경의 아버지 게오르그조차도 공작 위를 가진 대 귀족에 당

대의 석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재판도 공개되지 않고 바로

파난 섬으로 끌려갔다. 그러니 그런 공개적인 기록에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살비에 마델로, 발터 스게노차, 로웨나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레이브.

그들의 공통점은 과거 마그레노의 ‘거물’의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며, 유릭의 숙부인 노버스 크로반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 ‘거물’의 사건이 정말 걸리는데, 정작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아

무것도 없다. 유릭이 알아낸 것은 기껏해야 파난 섬의 광산에서 생

산된 어떠어떠한 보석이 경매에 낙찰되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그 보석을 경매에 붙인 상인의 이름이- 가만있자........ 막 거

기까지 읽으려는데 브랫 키저인지 뭔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유리, 성으로는 언제....”

“아, 그건.....”

“맙소사, 로웨나-!”

낯선 목소리에 유릭과 로웨나는 말을 하다 말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

다.

로웨나의 눈이 커졌다.

“마르코-!”

로웨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부른 젊은 남자에게 달려갔다. 늘씬

하게 잘 빠진 청년이었다. 잘 다듬은 연갈색 머리에, 각진 턱과 조금

튀어나온 광대뼈를 가지고 있는 지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착실하

고 성실해 보이기는 했으나, 연신 유릭을 살피는 모습을 보니 소심

해 보이는 구석도 어느 정도 있어 보였다.

청년은 로웨나가 가까이 오자 손을 잡아 그 손등에 키스하고는 빙그

레 웃었다.

“잘 지냈어, 로이?”

“물론이에요. 마르코는요?”

말투가 어쩜 저리도 공손한지. 유릭은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의 로웨

나를 떠 올릴 수밖에 없었다(파격적인 변화가 조금 괴기스럽기까지

했고, 왠지 불쾌하기도 하다).

마르코는 로웨나의 손을 더욱 꼬옥 잡으며 말했다.

“너와 헤어진 뒤에 가슴 아프고 괴롭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괜

찮아.”

“부담 가지지 말고 연락해 주세요. 저는 마르코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고, 친구처럼 지내고 싶으니까요. 비록 나를 찬 못된 남자지만,

이렇게 좋은 분이니 어쩔 수 없이 용서해 드려야지요.”

마르코가 불을 벌겋게 붉히며 웃었다. 그리고 유릭은 로웨나가 예전

에 사귀었다는 학생 이름이 마르코였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미하일의 친구라고 했던가.

“너그러이 보아 주니 너무 고마워, 로이.”

그리고 마르코는 유릭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반대편 손은 여전히

로웨나를 꼬옥 잡고 있다).

“마르코 반 피어슨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유릭 크로반입니다.”

그런데 유릭을 바라보는 마르코의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더 소심한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릭은 굳이 로웨

나와 자신의 관계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르코가 눈치를 살

피다가 슬그머니 말했다.

“그런데......로, 로웨나와 와는 어떤....”

“마르코 씨는 어떻게 되십니까.”

“아, 저는......예전에 잠시 로웨나 양과 교제를 했던 사이입니다. 그런

데.....혹시 그린 양과 사귀는 사이입니까?”

유릭은 로웨나를 살폈다. 로웨나가 손을 휙 그었다. 의심 살만한 말

은 절대 하지 말 것, 정도로 해석 될 수 있겠다.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카프첸코 씨의 소개로 로웨나 양과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놀란 로웨나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유릭은 모르는 척 하며 로웨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로웨나가 뱀이라도 닿은 듯 화들짝 놀

랐다. 마르코의 눈이 더 커지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미, 미하일 군이 소개...했단 말입니까? 정말이에요?”

“네. 우연찮게 알게 된 사이인데, 제가 술에 과해서 하룻밤 신세 진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알게 되어 이렇게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로웨나의 발이 휙 날아왔지만 유릭은 잽싸게 피했다. 갑자기 마르코

가 이를 뿌득 물었다.

“사귄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겨우 일주일 넘었습니다. 이제 서로 알아가는 중이지요.”

유릭은 로웨나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마르코는 입을 딱 벌린 채

그 모습을 보며, 입 속으로 미하일이- 미하일이-!! 이 말만을 험

악하게 되풀이 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극도의 분노를 참

는 것이 역력한 표정(눈초리와 입술과 턱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

키고 있었다)으로 말했다.

“어쨌건....추,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로이, 내가......그 때 좀 미안했

던 건 인정할게. 하, 하지만.....정말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믿어줘. 다 미하일 탓이었다고!”

“알아요, 마르코. 다 마르코에게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이해

해요.”

유릭이 보기에 로웨나의 말은 ‘이해’한다기 보다는 ‘관심 없다’에 가

까웠다. 그런데 눈치 없는 마르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다시 받아 줄 수도 있니, 로웨나?!!”

“네, 네?”

“내가 뭔가 단단히 오해했던 것 같아! 정말 너를 좋아해, 로웨나! 정

말이야! 비록 차남이긴 하지만, 상당한 유산도 받을 수 있고, 또 나는

미래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준비도 되어 있다고! 너 하나는 물

론이요, 네 어머니까지 책임져 줄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로웨나 그

린, 나를 다시 받아줘!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나하고 결혼해 줘!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정말이라고! 미하일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어.”

“네에??”

이제 당황한 것은 로웨나였다. 지난달에 헤어진 남자 친구가(게다가

별로 미련도 없는) 느닷없이 길바닥에 엎어지더니 청혼을 해 대고 있

으니. 이건 기쁨 이전에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제발 들어줘. 나 때문에 상처받은 것은, 이렇게 용서를 빌 테니 용

서해 줘!”

“아, 저...저, 저기?”

“이 남자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줘, 제발. 일주일 밖에 안 됐다며--!

젠장, 그 미하일 자식! 용서 못해!”

“아, 그게?”

로웨나는 유릭에게 이게 무슨 사태냐고 묻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유릭은 빙그레 웃으며 마르코에게 말했다.

“이건 제가 양보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군요. 로웨나, 로웨나 양은 정말

좋은 아가씨이니 저보다 더 좋은 남자에게 양보해야 도리일 것 같아요.”

“야,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야, 너어!!!”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야, 임마! 너 나중에 나한테 죽었어!! 아니 지금 죽어버려! 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나 유릭은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로웨나는 당장에 그의 멱살이라

도 잡아 흔들고 싶어 했지만, 마르코에게 잡혀 오도 가도 못했다. 결국

로웨나가 고함을 빽 질렀다.

“유릭 크로반!”

유릭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두 가지를 분명히 확신할 수 있

었다.

첫 번째는, 미하일 바보.

두 번째는, 로웨나는 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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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환타지에 대체 무슨 공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자주 자주 궁금해 지네요, 정말.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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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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